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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당신의잔속에담긴희망/위로가 되는 진리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01 조회수1,026 추천수2 반대(0) 신고

 

 위로가 되는 진리

우리에게 계시된 것 중

가장 확실하고 위로가 되는 진리는

(죄를 제외하고는)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와 가난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분도 그분이시다.

우리가 병이 든다면 그것도

하느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또 건강을 회복한다면 그렇게

해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갈이 있는 것도

하느님 덕분이며,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그 죽음의 잔 역시 그분 손에서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악인들이

우리를 박해할 때도 하느님께

원인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 우리가 당하는

불행에 대해서도 그 원인은

하느님께만 있다.

그분은 우리의 원수가

우리를 박해하면서 저지르는

죄의 원인은 아니지만

그 원수가 죄지으면서

가하는 불행의 원인이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는

악한 의지를 원수에게 심은 것은

하느님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힘을

원수에게 준분은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그로 인해 어떤 상처를

받았다면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분이 하느님임을

의심하지 말라.

모든 피조물이 힘을 합쳐

우리에게 대항할 때라도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치 않아

그들 편에 서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한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요한 19,11) 라고

예수께서 빌라도

총독에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악마와 인간과 심지어는

이성이나 감정이 없는

피조물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아니다. 너는 하느님의

명령이 없는 한 나를 괴롭히지

못하며 나를 불편하게 할 수 없다.

나를 유혹하고 내게 고통을 줄 권한을

네게 주신 분은 하느님이다.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한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때때로 이 믿음의

조항을 잘 묵상하기만 한다면

더 이상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손해와 불행 속에서

불평하지 않게 될 것이다.

나에게 재산을 주신 분은

주님이시고 그것을 빼앗아

가시는 분도 하느님이시다.

나를 멸망시킨 것은 어느 집단도

재판관도 도둑도 아니다.

험담으로 내 명예를 더럽힌 것이

어느 특정인 때문은 결코 아니다.

아이가 죽은 것은 내가

그 아이의 존재로 인해

행복을 더 오래 누리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 하느님,

모든 것이 속해 있는

하느님 때문이다.

하느님의 지혜에 의탁하기

이와 같이 세상 사람들이

원망하는 모든 사건을 이끄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것은 신앙의 진리다.

더 나아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모든 불행이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다고 의심할 수 없다.

우리는 보다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는 빛을 하느님이

지니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이상

이러한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다른 사람이

더 잘 아는 경우도 있는데,

하물며 하느님보다 우리가 더 잘 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느님은 맹목적인 열정의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며,

미래를 꿰뚫어보시고

사건과 각 원인에 따른 결과를

예견하시는 분이다.

당신은 가장 마음아픈 사건이

이따금 행복한 결말을 갖게 되고

반대로 가장 큰 성공이 불행한

종말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신중하게 택할 길과

정반대되는 길을 통해

목적에 도달하는 것은 하느님이

자주 택하시는 법칙이기도 하다.

다음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우리가 감히

어떻게 하느님의 허락으로 고통을

겪는 것에 불평 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섭리를 찬양해야

마땅할 때 불평하거나 또한

그 불평이 근거없는 것이라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이스라엘의 선조 요셉은 팔려가서

종이 되었고 감옥에 갖히기도 했다.

만일 그때 그가 비탄에 잠겼었다면

그는 자신의 행복에 대해

비통해한 셈이다. 왜냐하면

그의 시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이집트 재상에까지

올라가게 한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사울은 아버지의 암나귀를 잃어버렸다.

나귀를 찾기 위해 아주 멀리까지

가야 했지만 끝내 나귀도 찾지 못하고

시간과 힘을 공연히 낭비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 때문에

그가 슬퍼했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과정은 주님께서

그를 기름부어 당신 백성의 왕으로

삼으려고 예언자에게 인도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서게 될 때,

그토록 못마땅해 했던 그 십자가들을

하느님이 보내신 까닭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얼마나 놀라겠는가!

나는 꽃다운 나이에 죽은

외아들 때문에 통곡했지만

만일 그가 몇 달 혹은 몇 년 더

살았더라면 그는 원수의 손에

죽임을 당했겠구나.

그는 대죄 가운데 죽었겠구나.

나는 내 결혼이 깨어진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어야 했겠구나.

만일 그 결혼이 성사되었더라면

나는 슬픔과 비참함 속에서

생애를 보낼 뻔했구나.

나는 그토록 못견뎌하며 겪어낸

그 병 때문에 3,40년을 더 살았구나.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리게 했던

그 번민 덕분에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었구나.

내 그 돈을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영혼이 멸망할 뻔했구나.

죽은 후 진정 우리는 무엇 때문에

당황하게 될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도

우리는 불안해한다.

우리는 의사에게 자신을 맡긴다.

그는 끔찍한 고통이 따르는

수술을 받게 하거나 이따금 우리의

머리를 절개하여 열기도 한다.

어떤 때는 몸을 찌르고

또 다른 경우에는 심장까지

미칠수 있는 괴저(壞疽)를 막기 위해

지체를 절단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모든 고통을 겪으면서도

의사에게 고마워하며

그에 대한 보상도 한다.

약 처방만으로도 가능했다면

의사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의사의 기술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똑같은 영예를

하느님께 드리려 하지는 않는다.

하느님의 지혜를 불신하고

그분의 지혜가 우리보다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잘못할 수도 있는 인간,

그래서 우리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한 인간에게 몸을 내맡기면서도

주님의 이끄심에는

순종할 수 없단 말인가?

만일 우리가 하느님이 보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면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틀림없이 바랄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든지 피해 보려 하는

불행을 눈물로 애원하며 청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베대오의 아들들을

통해 이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눈먼 자들아, 너희의 무지가

내 연민을 자아낸다.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나로 하여금 너희의 이익을 관리하고

너희 운명을 인도하게 허락하여라.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이제까지 너희의 감정과 취향을

내가 존중했더라면 너희는 벌써

한푼도 없이 망해버렸을 것이다." 모든 것은

당신이 희망하는 만큼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잔속에 담긴 희망에서

(생 쥐르·라 콜롱비에르 지음)

-조안나 옮김/ 바오로딸 펴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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