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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홍성남 신부님 / 제19회 행복한 삶 - 함께 살기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02 조회수1,328 추천수3 반대(0) 신고

홍성남 신부의 행복한 신앙


 



제19회 행복한 삶 - 함께 살기


안녕하세요? 오늘은 강의 주제가 행복한 신앙인데 오늘은 행복한 신앙의 조건 중에서 첫 번째 조건, 함께 사는 것에 대해서 좀 얘기를 할까 합니다. 행복이라는 건 누구나 다 추구하는 것인데 행복한 삶을 살려면 뭐가 필요하죠? 돈, 건강, 가족. 대개 뭘 가지면 행복하겠냐 그러면 거의 많은 분들이 돈을 먼저 얘기하십니다. 아, 돈이 있으면 행복하겠다. 실제로 연세 많으신 분들 중에는 자식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난 돈만 있으면 돼. 그런 분들도 계세요. 그런데 이게 돈하고 행복하고 물론 직결이 되지요. 그런데 돈만 가지고 내가 정말 행복해질 수 있는가? 그건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거 같아요.

 

가끔 호텔에서 일하시는 신자분이 그런 얘기를 하는 분이 있는데, 돈 많은 영감님이 호텔에 와서 혼자 투숙을 하고 계신대요. 그런데 돈은 많은데 사람이 없어서 식사를 혼자 하신다는 거예요. 세 끼를다. 그걸 보면서 아, 저분은 왜 돈은 많은데 왜 사람이 없지?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요. 그분 말로는 돈 보다 중요한 게 사람이 아닌가? 나하고 같이 밥 먹어 줄 사람이 없다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불행한 거 아닌가 하는 그런 얘기를 하는데 그게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본당에서 주일에 미사 끝나면 사목위원들 하고 화투를 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사목위원들이 바빠서 안 나올 때가 있어요. 그러면 혼자서 패를 띠는데 ^^* 그렇게 처량할 수가 없어요. 판돈도 있고 화투도 있는데 사람이 없으니까 재미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또 여행을 가도 그렇죠. 여행을 가도 아는 사람들하고 다 어울려 가야 재미있지, 모르는 사람들하고 같이 가면 참 불편하고 얘기할 사람이 없이 외롭고 그렇단 말이죠. 혼자 여행가 가지고 혼자서 셀카 찍어대는 사람 보면 좀 정신없어 보이는 사람 같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는 행복해지려면 돈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거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행복해지려면 함께 살아야 된다. 이게 아주 중요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함께 사는 거에 대해서 오늘 강의를 좀 해 드릴까 합니다.

 

사람이 내가 행복하게 사는데 친구, 사람이 필요한 거는 사실인데,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사는 게 또 쉽지는 않죠. 여행을 가기 전에, 성지순례를 가게 되면, 신자분들이 찾아와서 그러세요. "이 친구하고 나하고 친하니까 한 방을 쓰게 해 달라"라고. 그런데 저는 경험상 절대로 친한 사람끼리는 한방을 안 쓰게 합니다. 열흘만 지나면 다 원수가 돼서 나오는 거예요. 원수가 돼서 나오는 이유가 뭐냐 하면, 여행 기간 동안에 그냥 다른 때는 만나면 가끔 잠깐 만나서 헤어지기 때문에 서로의 문제에 대해서 안 보여요. 

 

그런데 여행을 가서 같이 밥 먹고, 자고 그러다 보면 아침에 누가 먼저 일어나 샤워하느냐? 맛있는 반찬 누가 먼저 먹느냐? 버스를 창가 쪽이냐, 아니면 복도 쪽이냐 가지고서 민감하게 서로 다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고 결국 나중에 작은 문제 가지고 싸우다가 다 끝날 때는 거의 등 돌리고서 집으로 가는 경우가 많아서 절대로 친한 사람끼리는 안 집어넣어요. 차라리 모르는 사람끼리 집어넣으면 서로 예를 지키느라고 싸우지는 않는데, 그런데 여행은 너무 단기간이라서 그런데 부부생활은 어떻습니까? 함께 사는 건. 난 결혼한 이래 지금까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초지일관 행복하다. 그런 분 한 번 손 들어 보세요.

 

1. 지배욕구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사는 게 어려운 이유가 뭘까요? 무엇 때문에 살 때 부딪치고 싸우고 그럴까요? 의견 충돌. 의견 충돌이라는 거는 사실은 그 뒤에 있는 거는 주도권입니다. 사람이 제일 행복할 때가 언제냐 하면 내가 주도권을 가졌을 때예요. 다 같이 식사하러 갔어요. 그런데 뭐 먹겠어요? 뭐 드실래요? 이렇게 안 물어보고 "아, 짜장 열!" ^^* 이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거예요. 그런데 "난, 짬뽕인데요." 이 사람은 불행한 거예요. 그래 주도권 문제라고요.

 

부부 싸움 같은 같은 경우도 싸움의 내용을 들어보면 양쪽이 다 사실은 맞는 얘기인데, 누가 더 주도권이 있느냐에 따라 갈등이 발생한단 말이죠. 사람은 누구나 지배 욕구라는 걸 갖고 있거든요.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은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존재인 줄 알고 태어나고, 천상천하에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자의식을 갖고 태어나는데 그래서 이렇게 두 살, 세 살쯤 되면 생떼를 쓰잖아요. 그게 주도권이거든요. 엄마도 내 맘대로, 아빠도 내 맘대로 하려고 하는, 그리고 또 맘대로 안 되면 그냥 막 드러누워 생떼를 부리죠. 그러다가 얻어터지면서 버릇을 고치는데 어쨌건 사람 마음 안의 가장 깊은 곳에는 지배 욕구를 가지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어떤 사람이 내 마음에 든다는 거는 그 사람이 내 지배 욕구를 충족시켜줬을 때 그때 마음에 든다고 그러는 거고, 저 사람이 자가 맘대로 날 하려고 그러면 그때부터 불편해지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이 지배 욕구를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잠깐 만났을 때는 양보도 되고, 겸손한 것도 되는데, 이게 장기간 동안에는 안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사는 게 쉽지가 않다고 얘기를 하고 있고,

 

2. 개인 성장사가 다 다르다


한 집안에서 자랐어도 그 집안에 그 사람의 위치가, 포지션이 어디였냐 따라 성격이 다르고 콤플렉스가 달라지는데 부부 같은 경우는 더하죠.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고 그래도 가난한 집이 있고, 잘 사는 집에서 자란 사람이 있고, 또 같은 부모님이라고 해도 엄하고 또 굉장히 관대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고, 환경에 따라 가지고 다 성격들이 다르단 말이죠.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의 상처와 콤플렉스가 다 다릅니다.

 

안에 가지고 있는 어떤 응어리들 이런 것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끼리 모였으니까 부딪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함께 사는 게 쉽지 않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사람이 있어야 되고, 특히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영적 수준이 높아지고 참 행복을 추구하는 신앙인이 되려면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아야 된다고 얘기를 합니다. 왜냐?

 

사람마다 누가 와서 무슨 얘기를 해도 다 받아줄 것 같은 그런 사람이 있지만, 사실 그 안에는 모난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의 성격을 모난 돌이라고 합니다. 각자가 다 모가 난 그런 성격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모난 돌이 부드럽고 둥근 돌이 되려면 어떻게 될까요? 모난 돌은 모난 돌들끼리 만나야 돼요. 강 상류에 있는 돌은 굉장히 다 모난 돌이예요. 그런데 이게 강물에 쓸려 내려가면서 서로 부딪치고 깎이고 그러면서 맨 밑에 가서는 다 이쁜 자갈돌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 성격을 원만하게 이쁘게 만들려면 신학교에서는 공동생활을 필수적으로 시킵니다. 신학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젊은 남자들이 수백 명이 한 학교에서 살죠. 그런데 저희는 목사님들과는 달리 반드시 공동생활을 하게 돼 있어요. 이 공동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공동생활의 기간을 충족하지 않으면 서품을 못 받아요. 개신교 목사님들 같이 학위 이수하면 그냥 안수해 가지고 안수 목사 되는 그런 게 아니고, 꼭 공동생활을 시킵니다. 그렇게 시키는 이유가 뭔가? 공동생활을 통해 모난 부분을 다듬으라는 얘기죠. 


신학교에 처음 갔을 때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 이 신학교라는 곳은 정말 날개 없는 천사들이 다니는 그런 곳이 아닐까? 굉장히 큰 기대를 갖고 들어갔는데, 딱 1년 지나니까 이제 아, 이게 아니구나. 야, 이거 연옥에 들어와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같이 사는 남자 애들이 왜 그렇게 못난 게 자꾸 보이는지. 신학교는 들어가면 식당도 다 자기 자리가 정해져 있고, 성당에 들어가도 다 자기 앉는 자리가 정해져있습니다.

 

그리고 그거를 바꾸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그 옆의 사람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그 사람하고 계속 같이 밥 먹고, 같이 기도하고 그래야 돼요. 또 방도 독방이 아니고 저학년들은 한 스무 명이 같이 쓰고, 올라가면서 여섯 명 정도로 숫자가 줄어들고, 부제들은 독방을 쓰는데 그 이전에는 다 같이 방을 씁니다. 취미도 다르고, 취향도 다른 남자 애들끼리 같이 있으니까 부딪치는 게 많은 거예요. 

 

그런데 그런 과정 속에서 제가 저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된 게, 제가 신학교에 들어갈 때는 제가 통이 큰 줄 알았어요. 그런데 들어갔는데 왜 그렇게 사소한 거에 민감한지, 그때는 신학교가 지금은 모르겠는데 그때는 재정이 어려워서 신학교의 식사가 형편없이 나왔어요. 고기를 먹는 날이 드물었으니까. 학장 신부님 축일 날 고기가 나왔어요. 북한하고 체제가 좀 이렇게 ^^* 비슷할 정도로. 그런데 보통 때는 어차피 이거 나오나 저거 나오나 다 그러니까 그냥 밥통에 반찬이랑 다 집어넣고 그냥 밥통을 흔들어요. 그래서 똑같이 분배해 먹었어요. 그런데 고기가 나온 날에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날 되면 유난히 고기를 밝히는 애들이 있어요. 그런데 어린 동생들인데, 그걸 보면서 "그래, 배고팠겠다. 많이 먹어야지. 먹으라고 얘기해 줘야지." 생각은 있는데 입에서 나가는 말은 그게 아니에요. "너 혼자 그거 다 처먹으려고 그러냐? 너 혼자 다 처먹으면 딴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고 해!" 하면서 욕부터 나가는 거예요. 그러고 나면 아, 내가 왜 이렇게 쪼잔해졌을까? 밖에 나가면 고기야 돈 조금 들이면 다 살 수 있는 건대 이 안에서 왜 내가 싸우지? 그런 생각이 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하면서 아, 내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쩌면 그릇이 작구나. 내가 나 자신을 너무 뻥튀기 식으로 봤구나. 내 나쁜 이미지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실은 작구나 하는 것. 아, 이게 나구나. 처음으로 이제 제 모습을 본 거예요. 그런데 제 모습을 보고 나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 비난할 거리가 수그러들더라고요. 그때 처음에 했던 게 이게 겸손이겠다. humilitas 겸손이라는 이 말의 어원이 humus라는 라틴어 단어에서 나왔는데 땅이라는 뜻이거든요. 겸손은. 

 

그런데 신학교에 들어가 보면 정말 땅바닥에 내려앉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아, 내가 하늘에 떠 있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이거 완전히 바닥에 살고 있네. 그런데 바닥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처음엔 비참한데 나중에는 아, 그게 오히려 편해지는 거예요. 그런 내가 정말 땅바닥에 있는 존재구나 알게 되는 게 거의 부제 반쯤 되면 그런 어떤 인식이 생니다. 그래서 서품 받기 직전의 부제들 보면 얼굴이 천사 같아 보이는 게 그때가 가장 겸손하거든요. 품 막 받고 나면 얼굴이 환하죠. 그러다가 나이가 먹으면 다시 또 하늘로 승천하시려고 그러시지만, 어쨌건 이런 이유 때문에 신학교에서 공동생활을 시키고 있죠.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대학원에서 한 번 특강 시간에 들은 일이 있어요. 제가 상담 심리 대학을 다닐 때, 소설가 한 분이 오셨는데, 그분이 제가 경험했던 거 하고 비슷한 경험을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당신이 위파사나 명상이라는 수행을 하셨는데, 한국에서 하다가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인도인가 어디 가셨대요. 거기서도 수행을 다 끝내고 거기 있는 스님이 이제 돌아가라고, 다 배웠다. 그래서 이 분이 이제 거의 공부를 끝내고 돌아오셨답니다. 우리나라에 돌아오셔서 사찰 한 군데서 식객으로 머무셨대요. 그런데 당신이 공부도 많이 하고 이랬으니 득도한 그런 자질을 갖고 사는데, 어느 날 그게 한순간에 깨지는 경험을 했답니다. 밥 먹는 자리에서.

 

그날따라 절에서 맛있는 반찬이 나왔는데, 한 스님이 유난히 그것만  먹더래요. 그런데 그걸 보면서 막 화가 나더라는 거예요. 그래 자기는 속으로 내가 위파사나 명상을 이렇게 전공한 사람인데 이러면 되나? 그러는데도 그걸 참지 못하겠더라. 그 얘기를 그때 대학원생들한테 하는데 사실은 저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저분은 정말 도를 깨쳤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에 "아, 내가 그분이 그렇게 맛있는 반찬 먹는 거 보고 마음이 흔들림이 없었어요." 이렇게 얘기를 했으면 참, 재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텐데, 그냥 솔직하게 나는 그게 참 미워 보였다는 얘기를 고, 참 인간적이다. 저분은 정말 명상을 제대로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쨌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그 모남이라는 것이 다른 모난 돌들과 부딪치면서 원만해지기 때문 정말로 내가 마음의 행복을 찾으려면, 내 마음의 어떤 수행의 길을 가려고 하면, 사람을 떠나서는 안 되는 거죠. 다른 사람들과 늘 같이 있어야 된다는 그런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러면 혼자서 도를 닦으면 어떤 현상이 생기는가? 물론 이제 혼자서 열심히 도 닦는 분들도 나름대로 경지가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저의 성당에서도 사람을 안 만고, 봉사 활동도 안 하고, 기도만 하는 그런 분들이 계세요. 수녀님처럼 살고 싶다고 그러고 혼자 기도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런데 문제는 그런 분들이 걸리기 쉬운 게 자아도취증이에요. 운동하는 선수가 다른 선수하고 같이 게임을 하면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요. 그런데 게임을 하지 않고 맨날 혼자서 거울 보고 연습을 하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데, 폼은 되게 이뻐 보여요. 자기가 거울 보면서 자기도취에 빠지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의 마음 안에 무의식이라는 게 있는데 이 무의식이 굉장히 장난을 많이 칩니다. 혼자서 도 닦는다고 앉아 있으면 이 무의식이 굉장히 많은 걸 보여줘요. 하느님도 보여주고, 성모님도 보여주고, 자기가 천상 존재가 된 거 같은 착각도 일으켜 주는 게 무의식이에요. 이런 자아도취증에 빠지게 되면 문제가 뭐냐 하면 자기 문제를 못 본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문제가 많이 보이기 시작해요. 이거는 너무 잘 봐요.

 

그래서 이분이 내뱉는 모든 말이 잔소리고, 주로 지시적인 말을 많이 합니다. 제가 가끔씩 종교 방송을 봐요. 개신교, 가톨릭, 불교 방송을 보면서 얘기하시는 분들의 내용을 들어보면, 아. 저분이 자아도취증인지 정말로 자기 자신을 아는 분인지가 말투를 보면 알아요. 훈계조로 사는 게 이렇게 사는 거야. 뭐 이렇게 가르치는 양반들이 거의 다 자뻑, 자아도취증에 빠진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분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본인이 별로 달라질 게 없다는 자아 동조적 현상이 일어나요. 내가 나를 보고 "아, 이만하면 됐지, 나 같이만 살아 봐!" 이거를 입버릇처럼 말하고 산다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주의 사람들이 잘 인정을 안 해 주거든요. 그래 이분들이 말하려고 그러면 다 도망을 가는 가요. "아, 또 잔소리 하네." 그러면서.

 

그래서 이런 자아도취증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간단해요.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살아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하고 살면서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해 주는 싫은 얘기도 들어야 되고, 또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부분을 보면서 화냈다가 아, 내가 저런 모습을 갖고 있지는 않는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그래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한 신앙인이 되는데 그래서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관상수도회 가 보셨어요? 수녀님들 봉쇄수도원 철창 안에 사는 분들 보신 분들 계시죠? 그런데 그 수녀님들 보시니까 얼굴들이 어떻든가요? 우울해 보이든가요? 봉쇄수도원 수녀님들 보시면 전부 어린애들 같아요. 아기들 같습니다. 그런데 왜 아기들 같을까요? 봉쇄라는 게 있어요. 우리가 보통 영성 수준을 얘기하는데 가톨릭에서는 봉쇄수도원이 굉장히 영성이 높다고 평가를 해 줍니다.

 

그다음에 활동 수도회는 그다음이고 그리고 맨 밑이 이제 교구 신부다. 본당 신부들은 영성 수준이 낮다고 얘기를 해요. 왜 그럴까요? 기도의 양이 아닙니다. 기도의 양 때문에 그렇게 평가하는 게 아니고 사람과 같이 사는 것 때문에. 교구 신부들은 보기 싫으면 안 만나면 돼요. 피할 수가 있어요. 스트레스 받으면 딴 데 가서 풀고 올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개인적인 삶이 보장이 돼 있어요.

 

개인적인 삶이 보장이 돼 있으니까 이 모난 부분이 웬만해서는 안 깨지는 거예요. 본당 신부 생활 오래 하면 성질이 개떡 같아진다는 게 ^^* 이것도 편집될라^^* 괴팍해진다는 게 부딪칠 일이 없거든요. 더군다나 보좌 신부 때는, 그런데 저와 같이 본당 신부 생활을 25년째 들어가면 이제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러면서 마음에 안 들면 잘라버리고 그러니까 와서 건드리고 이러는 사람이 없으니까, 늘 모나고, 괴팍하고, 까칠하고 그런 성격들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런데 봉쇄수도원은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다 같은 수도자들끼리 어디 도망도 못 가고, 같이 밥 먹고, 같이 기도하고, 그 생활을 해야 돼요. 신학교는 그게 5년이면 되는데, 이 봉쇄수도원은 평생을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 미우나 고우나 저분하고 나하고 살아야 되니까 나를 양보해야 되고, 나를 낮춰야 되고,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서 웬만한 거는 다 넘어가 줘야 되니까 속이 삭히는 게 많은 거죠.

 

그래서 이분들이 영성 수준이 높다.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래서 농담 삼아 그런 얘기를 해요. 다 죽고 나면 사리가 제일 많이 나오는 게 이 봉쇄수도원 이 동네다. 사리가 속상해서 생긴 돌덩어리니까 사리라고 누가 그렇게 재미 삼아서 얘기를 했는데, 교구 신부들은 그런 거 안 나올 거다. ^^* 그런데 어쨌건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이 버겁기도 하지만  행복을 주기도 한다. 그걸 잊지 마시고 나는 다 때려치고 어디 산에 가 가지고 절간에 들어갔으면 좋겠어. 그거 다 소용없는 생각이라는 거 아시고요. 사람을 떠나면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버거움보다 사람을 떠났을 때 외로움이 더 힘듭니다.

 

그리고 사람과 살 때 그 버거움은 사람한테 주는 병의 그 정도가 그리 크지 않아요. 사람이 없어서 생기는 외로움은 사람 몸의 만병의 근원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외롭게 살 것이냐, 부딪치며 함께 살 것이냐? 선택하라고 그러면 부딪치며 함께 살겠다는 쪽으로 선택하는 것이 훨씬 낫다.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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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홍성남 신부님, 행복한 삶,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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