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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계명 준수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까? 짧은 소견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17 조회수1,132 추천수0 반대(0) 신고

 

어제 복음은 누구나 잘 아는 복음입니다. 내용 자체도 어려운 내용이 없습니다. 25년 전에도 특히 간음 부분에 관한 이야기는 워낙 설교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내용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했다는 내용입니다.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지만 복음쓰기 이벤트의 일환으로 복음묵상쓰기 코너가 있습니다.

 

그걸 쓰다가 문득 예전에 생각하지 못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특별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습니다. 그렇다고 뭔가 대단한 걸 발견한 것도 아니고, 단지 지금까지 늘상 봐왔던 개념에서 벗어나 조금 색다르게, 저도 모르게 본 내용이었습니다.

 

어제 주일 복음은 간단히 말해서 계명을 지키는 거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바이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복음은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이 내용과 연관지어서 어제 복음 전체를 묵상하게 된 것입니다.

 

단순히 하늘 나라에 들어 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결코 못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조금 주목해서 본 부분이 바로 간음 부분입니다. 먼저 간음하지 말라도 계명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어떤 사람이 만약 실제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내용을 근거로 해서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만약 그 계명을 어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요? 이것을 보고 우리는 간음 금지 계명을 지켰다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음욕을 품고 그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이미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추론을 하면 이런 결론을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굳이 설명의 편의를 위해 간음을 육적인 간음과 영적인 간음이라는 걸로 나눈다면 육적인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실제 간음을 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 게 아니고 실제는 마음으로도 간음을 하지 않아야 진실로 간음을 하지 않은 걸로 봐서 실제로 그렇게 해야 간음 금지 계명을 온전히 지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이런 논리가 맞는 논리라면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의 비유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계명을 지켜라고 하는 부분에서도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리가 마치 세상 법규를 지키는 것처럼 행위에 초점에 맞추어서 계명을 지켰다고 해석해 그걸 신앙에 적용하면 나중에 그로 인해 엄청난 결과가 초래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원래 도형에서 각도도 일정한 각도로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변의 길이가 길면 길수록 벌어지는 범위는 그 길이에 비례해서 커지듯이 말입니다. 아마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그래서 계명을 지키는 수준이 어느 정도 수준으로 지켜야 되는지 그 기준을 확실하게 제시해 주는 대목이 바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가 지키는 수준에서 한 단계 더 추가적인 기준이 바로 의로움’ 이라고 표현한 부분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의로움도 그냥 의로움이 아니고 그 의로움도 능가해야 하고, 능가하지 않으면 그냥 단순히 못들어간다도 아니고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결코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들어가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이걸 너무 문자적으로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해석을 하는 건 모르지만 어쩌면 그게 설사 복음사가의 의도와 다르게 너무 지나친 해석이라고 하더라도 믿음 생활에서는 예수님께서 또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씀과 같이 함께 대비해서 생각을 해보게 되면 어린 아이는 천진무구하고 어떤 사실이 있다면 그저 그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인식하는 성향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이런 말씀을 받아들일 때 이런 태도로 받아들여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상 말에 나오는 과유불급이라는 말처럼 지나침이 모지람보다 못하다고는 하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어쩌면 과유불급과 같은 태도로 해서 나쁠 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덕이 되면 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도리어 너무 확장해서 해석해 성경의 의미를 아전인수 격으로 자기의 입장에 유리하게 해석해 적용하게 된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마치 고무줄처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우려가 생길 여지가 많고 또 그렇게 된다면 하느님 말씀의 권위도 격하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우리가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할 때 때로는 바리사이파들을 바라볼 때 지나친 율법주의에 빠졌다고 비난의 화살을 보내는 경향이 있는데 무조건 그렇게만 바라볼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율법을 지키되 그 율법이 지향하는 근본 뜻을 헤아려서 지킨다면 오히려 그런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지 않으실까 하는 묵상을 해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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