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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야고1,12~1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18 조회수1,191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야고1,12~18)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3~15)

 

야고보는 1장 2-12절에서 시련을 당할 때에 성도가 취해야 할 신앙 자세에 대하여 언급한 후에, 이제 13-18절에서 시험으로 이끄는 유혹의 원천인 인간 내면의 욕심에 대한 경계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선한 은사와 선물에 대하여 말한다.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죄로 유혹하는 분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시며 온갖 좋은 선물들만 주시는 분임을 말한다.

 

2절과 12절에서는 '시험'이 '시련'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13절에서는 죄를 짓도록 유도하는 '유혹'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앞에서 '페이라스모스'(pheirasmos)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단련하기 위한 '시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여기서의 '페이라조'(pheirazo)는 인간의 욕심으로 죄를 지으려 하는 '유혹'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직접 인간을 시험하신다고 하는 언급들이 자주 발견된다 (창세22,1 ; 탈출15,25 ; 신명8,2 ; 13,3 ;33,8 ; 2사무24,1 ; 시편26,2). 그러나 이런 구절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서 테스트하는 성격의 시험일 뿐,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으로서의 시험이 아니다.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으로서의 시험은 마귀가 하는 것으로(마태4,1-11), 죄로 기울어지는 본성의 성향을 가진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종종 자신에게서 발생한 죄의 유혹의 책임을 하느님께 돌리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창세3,12-13 ; 잠언19,3).

저자는 여기에서 인간들에게 닥쳐오는 죄의 유혹들의 배후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13)

 

본문은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 누구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의 문장이다. 여기에서 직설법 현재 시제 동사가 쓰였다는 것은 이 사실이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진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 마치 죄를 부추겨 악에 빠지도록 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탈출4,21 ; 7,3 ; 10,1.20 ; 2사무24,1; 1열왕22,19-23). 여기에 대해 우리는 로마서 1장 28절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려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는 이집트 왕 파라오가 계속 고집을 부려 하느님의 뜻을 어기도록 내버려 두심으로써, 오히려 온 천하에 주 하느님만이 참 신(神)이라는 사실을 더욱 드러내셨다(탈출10,1.2).

또한 하느님께서는 강대한 나라를 이루어 교만에 빠진 다윗의 마음을 사탄이 부추기는 것을 허용하심으로써(1역대21,1)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도록 내버려 두셨던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떠나 이미 악의 화신이 되어 버린 아합 왕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어 거짓말하는 영이 아합의 마음을 그 욕심이 이끄는 대로  꾀어 죽게하도록 허용하신 것이다(1열왕22,19-23).

이러한 세 가지 사례 살펴보면, 표면적인 것과 달리 하느님께서 악을 조장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죄의 유혹에 빠지게 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14)

 

'사람은 저마다'라고 번역된 '헤카스토스'(hekastos) '각 사람'이라 말할 수 있고, 인간 누구나 예외없이 자기의 욕심에 의해서 시험받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욕망'으로 번역된 '에피튀미아스'(ephithimias)의 원형 '에피튀미아'(ephithimia)는 '~을 향하여'란 지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피'(ephi)와 그 자체로 이미 '열망' 혹은 '뜨거운 감정'이란 뜻이 있는 명사 '튀모스'(thim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하여 갖게 되는 '갈망', '열망'이란 매우 강한 뜻을 지닌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싫어하고, 죄악된 자아만을 충족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나타내므로 부정적 의미로 쓰였다.

'욕망에'에서 '~에' 번역된 전치사 '휘포'(hypo)는 '~아래에'라는 문자적 의미와 더불어 '~의 영향력 하에서' 라는 비유적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여 욕심에 강하게 지배당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사로잡혀'(끌려)로 번역된 '엑셀코메노스'(ekselkomenos)는 사냥감이 덤불에서 끌려 나오듯이 사람이 자기의 욕심에 무력하게 이끌린다는 것을 의미하여 본절에서 수동태로서 그 무력한 태도가 강조된다.

 

'꼬임에 넘어가는'으로 번역된 '델레아조메노스'(deleazomenos)는 낚시나 사냥에서 물고기나 사냥감을 낚시 바늘이나 덫을 사용하여 현혹시켜 걸리게 하듯이 사람으로 하여금 욕심의 유혹에 걸리도록 속이는 것 의미한다. 이 단어 역시 수동태로서, 별다른 저항없이 무력하게 꼬임에 넘어감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야고보는 사냥이나 낚시에서 사용되는 두 단어의 수동태를 연속으로 사용하여 유혹을 받는 그 원인이 다른 제3자나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를 짓고 싶어하는 각 개인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 주고있다.

이같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욕심에 의해 죄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므로 죄에 빠진 그 원인을 하느님께 결코 돌릴 수 없다.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5)

 

이 구절은 욕망(욕심)이 갖는 치명적 결과를 보여주는 너무나 잘 알려진 구절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인간 내면에서 나오는 악의 진행과정을 인간의 생물학적 변화과정을 나타내는 단어를 사용하여 매우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잉태와 출산, 성장과 죽음의 모습이다.

 

'잉태하여'로 번역된 '쉴라부사'(shillabusa)의 원형 '쉴람바노'(shillambano)동사는 마치 여자가 은밀하게 아이를 가지듯이 마음에 욕심의 씨가 뿌려진다는 의미와 더불어 욕심이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 다음 '욕심'에 눈이 멀어 유혹된 인간의 내면에서 '욕심'은 그를 사로잡아 '죄'(하마르티아 ; hamartia)를 낳는다.  '욕심'이 '죄'를 잉태하여 그 '죄'를 낳는 것이다. (잠언7,15-23)

 

여기서 죄는 태아로 의인화되고 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죄는 갓난 아기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죄를 방치하면 성장한다. 

여기서 '다 자라면'(성장한 후)로 번역된 '아포텔레스데이사'(aphotelestheisa)의 원형 '아포텔레오'(aphoteleo) '완성하다', '다끝내다'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수동태 분사로 쓰였으며, '성취될 때'(when is accomplished), 또는 '완전히 자랄 때'(when is full-grown)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완전히 자란 죄가 도달하는 최종 목표 '죽음'이다(로마5,12 ; 6,20-21 ; 7,11). 여기서 '죽음'(다나토스; thanatos)은 바로 영적인 죽음, 즉 최후 심판때의 두 번째 죽음(묵시20,14)을 의미한다. 하느님과의 영원한 결별(분리)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욕심에서 비롯된 죄의 최종 결과인 '죽음'은 12절의 '생명의 화관'과 반대 개념을 이룬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 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뜻을 전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17-18)

 

이제 야고보는 17-18절에서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이야말로 성도들에게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를 주시는 분이심을 밝힌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좋은 것들만 내려주시는 성도들의 아버지이시다.

 

여기에서 '선물'로 번역된 '도시스'(dosis)와 '은사'로 번역된 '도레마'(dorema)는 동의어이다. '도시스'는 주로 행위에 강조점이 있고, '도레마' 주어진 결과에 강조점이 있는 단어일 뿐이고, 둘 다 영역으로는 'gift'이다.

'위에서'라는 의미는 '하느님으로부터'라는 의미이며, 이어지는 '빛의 아버지에게서'도 동일한 의미이다.

 

'빛의 아버지'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완곡한 표현이다. 좋고 완전한 것들은 모두 창조주로서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만 내려옴을 강조한다.

'뜻을 정하시고' 번역된 '블레테이스'(buletheis)의 원형 '블로마이'(bulomai)는 야고보서 1장 14,15절에 나오는 사악한 욕망(욕심)의 반대 개념을 지니기도 한 동사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 그리고 아름답고 선한 의지에 의해 피조물들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이는 외부의 간섭이나 구속을 받지 않고,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로써 인생에 대한 거듭남의 역사를 행하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낳으시어'로 번역된 '아페퀴에센'(aphekiesen)의 원형 '아포퀴에오'(aphokieo)란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이 동사가 부정 과거 시제로 쓰였는데, 이는 거듭남 일회적 사건임을 나타낸다.  거듭남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일회적으로 한순간에 이루어진다.

 

'첫 열매', 즉 '아파르케'(apharche)는 원래 구약의 전문적인 제사 용어인데, 이스라엘이 모든 인간과 동식물의 첫 열매를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소유임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종말론적 새 창조(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의 첫 열매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낳았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 즉 복음으로 낳았다는 의미이다. (1베드1,23 ; 2코린6,7 ; 에페1,18 ;콜로1,5 ; 2티모2,15 ; 로마10,13-1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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