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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7주간 화요일 복음과 독서 이야기 (오늘은 아주 장문입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25 조회수1,003 추천수0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의 장소적인 배경은 바로 갈릴래아를 통해서 카파르나눔을 향해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나서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라는 말씀과 다시 사흘 만에 살아나실 거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 교육을 하시고 계십니다.

 

근데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이신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무슨 뜻인지 여쭤볼 수도 있는데 그것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복음에서는 이때 그들의 심리상태가 질문을 하는 그자체도 두려웠다고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성경적인 지식이 많이 없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마르코 사가가 되었든 누가 되었든 예수님의 말씀을 정리를 하면서 사가 자신의 입장에서 뭔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있을 겁니다. 다만 사가마다 다 다르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게 성령의 감화로 이루어져 쓰여진 것과 근본정신은 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은 같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사가가 기록을 할 때 모든 걸 세세히 다 기록하지 않을 수가 있을 겁니다. 어떤 핵심적인 상황만 묘사를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건 아마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그 행간의 의미를 이해해야 할 것을 우리의 몫으로 남겨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을 보면 여기까지가 길 위에서 벌어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왜냐하면 카파르나움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다고 하는 대목을 보면 그렇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 질문에 앞서서 다시 앞을 잠시 돌아가보겠습니다. 도상에서 벌어진 일을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저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은 예수님의 위치가 스승의 위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오랜 시간 지도를 하다 보면 애들 표정을 보면 이게 지금 이해를 하고 있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지 그냥 딱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건 정말 속일 수 없습니다.

 

애들을 지도를 하다보면 제가 전해주는 걸 잘 이해를 하는 애도 있고 어떤 애는 정말 놀랄 정도로 이해력이 뛰어난 아이도 있습니다. 그런 아이를 지도하면 지도하는 입장에서 보람이 있습니다. 근데 어떤 애는 정말 어떨 때는 세상말로 돌아버릴 지경까지 갈 정도로 이해력이 떨어지는 아이 같은 경우엔 정말 힘듭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보면서 만약 행간의 의미를 우리의 몫으로 마르코 복음사가가 남겨둔 것이라면 저는 이렇게 묵상을 해봤습니다. 복음에도 나오지만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또 무슨 뜻인지 어리둥절했을 겁니다.

 

저 같은 사람도 사람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는데 하물며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그걸 모르시겠습니까? 당연히 그걸 딱 보면 바로 아셨을 겁니다. 그런 사정을 예수님의 입장이 되어 생각을 해보면 앞이 캄캄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셔야 하는 길인 운명을 말씀하시면 그게 무슨 뜻인지 이심전심으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정한 제자들이라면 척하면 착하고 알아들어서 예수님께서 어떤 다른 말씀을 하지 않아도 그 의미를 파악해도 뭔가 될까 말까 하는데 이해조차도 하지 못하니 앞이 캄캄하셨을 거라고 추측이 됩니다.

 

지금 수난예고는 두 번째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이런 미련한 것이라고 나무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 마음 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이런 걸 한두 번 느끼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답답은 하지만 가르쳐야 되시기에.......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독톡한 화법을 사용하십니다.

 

오늘은 바로 돌직구를 날리지 않으시네요.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사실 이걸 예수님께서 모르셔서 물으신 게 아니라는 걸 다음 내용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시지만 모른 척하시면서 제자들의 반응을 떠보고 앞으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면서 이 부분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시기 위해 분위기를 조성하는 화법입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논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로 논쟁을 했기에 예수님의 물음에 답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맹색이 제자들이라고 하면서 염불은 생각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으니까 자기들 입장에서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기에 한마디로 염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의 입장이 민망하기도 하고 부끄러웠을 겁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본론으로 들어가시려고 하십니다. 사전에 도상에서 예수님께서 수난예고를 하신 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건 세상의 논리와는 완전 배치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숨은 의미가 무엇일까요?

 

바로 수난예고 다음에 이어지는 걸로 봐서 이 말씀은 이 세상의 가치도 가치지만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관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말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정치적인 메시야로서 등장하는 게 아니고 죽음과 부활 다음에 이어지는 세상을 한편으로는 설명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 제발 그런 이상한 세상적인 야심을 버리고 꿈을 깨서 현실을 잘 직시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꼴찌가 되려고 해야 첫째가 된다는 말씀은 이 세상 논리로는 맞지 않는 넌센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너희들이 발을 땅에 디디고 이 세상에 사는 것이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건 우리가 썩어 없어질 이 세상에 머물 것이 아니고 우린 하느님의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야 할 것이라 그 세계를 가려면 이미 이 세상에서 그 나라의 맛을 미리 체험을 하게 되면 천국을 앞당겨 사는 것이라는 의미도 녹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누가 큰 사람이냐고 하는 논쟁에 대해 확실하게 모범 답안을 제시 해주십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 살아도 단순히 세상 사람들이 이 지상에 사는 그런 지상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천국을 이 지상에서 맛보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단순히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뛰어넘어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어야 하고 또 그 종이 되어야 한다고 일러주시는 것일 겁니다.

 

여기서 종이 된다는 건 하나의 굴욕을 상징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종의 위치가 된다는 건 남을 지배하는 주인의 위치가 아니라 종의 신분은 섬기는 위치이기 때문에 단순히 종이 되라는 건 비천한 삶의 신분이 되라는 것이 아니고 종처럼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냥 단순히 저자세로 숙이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바로 눈높이를 낮추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눈에 나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을 이렇게 이해를 합니다. 우리도 다 누구나가 한 영혼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인데 왜 우리의 신분이 하느님의 아들인데 종이라는 신분으로 격하시킬 이유가 굳이 있겠습니까?

 

또한 눈높이를 낮춘다는 건 그 사람의 입장과 동일한 위치가 되겠다는 뜻이고 그게 바로 남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는 역지사지의 태도일 겁니다. 그럼 이런 결론이 성립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종이 된다는 건 남의 입장이 되어 남을 이해할 수 있는 아량을 가질 수 있는 상태가 종과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첫째가 되는 비결을 하나의 예를 들어 말씀을 해 주시지만 여기에는 많은 상징적인 뜻이 포함되어 있는 듯합니다.

 

한 어린 아이를 껴안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고 하시면서 복음은 마무리 됩니다.

 

이때 단순히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언급하시면서 단순히 어린 아이 하나로만 국한해서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이때 어린 아이가 상징하는 것은 나약함을 상징할 것입니다. 바로 어린 아이는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하는 대상입니다.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나오는 여러 인물이 있습니다. 과부, 고아 창녀 등등 있습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어린 아이 하나로만 나오지만 이런 사람들을 모두 상징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예수님과 동일한 인물로 간주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 세상에서 아웃사이드인 사람들을 예수님이라고 여기는 게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마태오복음 최후의 심판 2531절 이하에 나오는 심판 기준을 설명하는 데에도 나오듯이 이런 사람을 포용하는 게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게 결국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거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절대적인 필요조건이 오늘 복음에서는 한마디로 나 자신이 종처럼 되는 길인 바로 겸손의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겸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남보다 앞서려고 하고 또 남보다 좋은 위치에 있기 위해 한마디로 첫째 자리에 가기 위해 남을 누르고 경쟁에서 이겨야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는 좋은 말로는 선의의 경쟁입니다. 이것은 남과 싸워서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도 인간의 욕정에서 비롯되지 않습니까? 오늘 야고보서 독서 말씀을 보면 그렇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은 이런 식으로 하지 말고 청하라고 합니다. 청하지 않고 그냥 뭔가 싸워서 이루어내려고 한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근데 갑자기 청해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이 욕정은 바로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것일 겁니다.

 

사도는 또한 세상의 친구가 되는 건 하느님과 적이 되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세상과 친구가 된다는 건 저는 이렇게 묵상을 해봅니다. 바로 세상적인 것에 너무 많은 것을 집중하는 걸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사료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영을 갈망하신다고 하는 말씀을 보니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저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영이 우리가 세상적인 것에 현혹되면 그곳에 빠져 있기 쉽기 때문에 세속을 멀리해서 저희 안에 있는 하느님을 더 갈망하라고 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독서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입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 결국은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분모적인 요소는 한마디로 겸손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첫째 짜리는 경쟁해서, 싸움을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무한한 겸손을 가져야 된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독서에 나오는 걸로 생각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가까이 오실 거라고 합니다. 참 흥미롭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시다고 해석이 되어집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가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향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연인이 서로 만나 포옹을 하는데 한쪽은 가만히 있고 한쪽만 달려가는 그런 게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더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그런 모습으로 하느님께서는 그냥 저희가 다가오시길 가만히 기다리시면서 기다리시지 않는다는 걸 말씀을 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라고 합니다. 이건 무슨 말씀일까요? 하느님을 만나는데 악수를 하게 되어 손을 깨끗이 하라고 하신 말씀일까요? 저는 이렇게 한번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뭔가 나쁜 일을 그만두고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할 때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난 이제 손 뗏다이런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달리 표현을 하면 나 이젠 그런 데는 손 씻었다 이런 정도 말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마음을 정결하게 하라고 하는 말씀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 묵상은 상당히 깁니다. 이건 사실 엄격히 말해 묵상이라고는 할 수가 없네요. 묵상이라기보다는 그냥 말씀을 풀어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이지 싶습니다. 이제 끝으로 하나 남았습니다.

 

오늘 독서 야고보서 49절을 보면 탄식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하십니다. 참 이 내용도 흥미롭습니다. 웃음이 좋은데 왜 슬퍼하라고 하시고, 또 기쁨 대신 근심하라고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한번 생각해봅니다. 저만의 상상입니다. 사도는 이런 의도이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세속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그게 마치 즐거움인 줄 알고 웃고 희희낙낙하는 그런 것으로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그런 현실에 대해 그처럼 어리석은 영혼이 된 자신의 모습을 슬퍼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라는 말씀도 이처럼 세속에 빠져 그 세속에서 얻어지는 기쁨이 마치 진정한 기쁨인 줄 알고 하늘의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그런 자신의 마음에 대해 걱정을 하라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마지막 구절에 해답이 있는 듯합니다. 결국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 겁니다. 주님 앞에서라고 나오지만 이때는 주님 앞에서라는 건 더 포괄적인 내용일 겁니다.

 

어떤 공간적인 위치 그러니까 주님이 앞에 있는 그런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닐 터입니다. 바로 주님이라는 말은 저는 주님의 말씀으로 이해를 해야 이 말씀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춘다는 말의 의미는 달리 표현을 하면 하느님 말씀에 순명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를 해야 하지 싶습니다. 그러면 바로 하느님께서 높여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게 바로 첫째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지루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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