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시험[2/2]/아브라함[1]/창세기 성조사[30]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25 조회수1,213 추천수1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30.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시험[2/2]

 

흔히 이사악의 희생 제사로 일컬어지는 하느님의 이 아브라함 시험의 슬픈 이야기는 이스라엘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을, 기원전 6세기까지도 위급한 상황에서 자행되었음이 분명하지만, 함축적으로는 결국 단죄를 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가장 소중한 것을 요구하신다 해도 그분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부각시킨다. 그의 아들 이사악의 번제물로의 묶임은 유다인들의 신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며, 여러 성경 연구가들과 교부들은 이사악의 희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예표를 본단다. 또한 이슬람의 쿠란은 아브라함이 제물로 바쳐야 했던 아들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은 채 이 이야기를 암시한다. 무슬림 전승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존재는 이스마엘이다.

 

이사악의 불과 장작은 있는데, 번제물인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참으로 대답하실 분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느님이실 게다. 단지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령을 받는 순간부터 그대로 홀로 다 실행만 했다. 그가 결정할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사악에게는 아직 하나의 가능성은 남겨져있다. 달리 말해, 이사악이 번제물로 바쳐지고 안 바쳐지고는 오직 하느님께만 달려 있다.

 

얘야,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이사악은 더 이상 질문이 없다. 그는 아버지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래서 둘의 대화는 끝나고 계속 함께 걸어만 갔다.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정성을 다해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장작은 아브라함이 집에서 이미 패 왔다. 제사를 준비하는 것은 숙달되어 있었다. 유목 생활을 하다 보니, 아무리 이동거리가 짧아도 간단한 기원제는 수도 없이 지낸 거였으니까.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의 목을 향해서 하느님, 자 보십시오! 이래도 저를 시험하시렵니까?”하고 내리치며 죽이려는 바로 그때, 얼마나 하느님이 놀라셨던지,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두 번씩이나 다급히 그를 불렀다. 한 번도 아닌 두 번을 연이어 부르는 것은 시간이 없다는 거다. 이에 아브라함도 놀라고 아들 이사악도 놀랐을 게다. 그가 ,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순간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 그리고 이사악의 질문에 이제야 그 답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때만 해도 이사악의 눈은 여전히 감겨져 있었으리라. 이렇게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숫양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이 그분의 명령임을 그도 아들 이사악도 안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하느님은 그렇게 답해주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번득이는 칼날처럼 빛났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이사악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이리하여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다. 우리말로 옮기면 주님께서 마련하신다이다. ‘이레라는 동사는 본디 보다를 뜻하기에 주님께서 보신다로 옮길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 ‘마련되다가 본디 보다동사의 수동태이기에, ‘주님의 산에서 그분께서 보이신다.’로 옮길 수도 있다. 또는 모음을 약간 수정하여 산에서 주님께서 나타나신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지명은 하느님께서 고통 받는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시고 그의 고통을 없애 주시는 분임을 가리킨다.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을 결코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다. 그는 그 며칠간의 칠흑 같은 어둠의 시간들을 걷어내고 이제는 광명의 빛을 되찾았다. 하느님의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것도 아주 훌륭히 통과했다. 외아들마저 제물로 바칠 만큼 하느님을 굳게 믿었기에, 하느님의 약속은 헛됨이 없었고 아브라함의 신앙은 승리했다.

 

사도 바오로의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의 11믿음에 관한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의 순종에 따른 신앙을 잘 읽을 수가 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8).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17-19).

 

바오로는 또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로마 4,18)라고 그를 만민의 조상으로 강조한다. 그는 그토록 감내하기 힘든 갈등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보이고자 백 살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러 모리야로 갔다. 여럿 중 적당히 하나를 고른 게 아닌, 단 하나 그것마저 내놓았다. 그는 이렇게 참으로 하느님을 믿었다.

 

악을 저지르기로 합심한 민족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지혜는 한 의인을 가려내어 하느님 앞에 흠이 없도록 지켜 주고 자식에 대한 애정을 이기도록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지혜 10,5) 하느님의 지혜가 악으로 물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하나밖에 없는 자식 이사악마저 하느님께 희생 제물로 바칠 만큼 하느님께 순종한 그의 역사와 의로움에 대해 지혜서는 칭송한다.

 

아브라함이 신앙의 아버지인 것은 하느님의 선택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 역시 그분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인간적인 논리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듯이 우리 신앙의 여정도 완전함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난관과 시련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신다는 것을 우리는 꼭 명심해야만 할게다.[계속]

 

[참조] : 이어서 '31. 아브라함의 축복과 그의 아우 나호르'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이사악,번제물,쿠란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