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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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첫날 새벽을 맞으면서 ( 재의 수요일 )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26 조회수1,068 추천수0 반대(0) 신고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매일미사에 보면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날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사람이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는 가르침을 상기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어느 정도 세례를 받고 성당을 다니면 아는 상식입니다.

 

왜 갑자기 슬프게도 죽음을 생각하라고 할까? 사순은 40을 상징합니다. 순은 국어에서 10이니 당연히 40이 됩니다. 또한 매일미사 서두에서도 사순 시기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부활 축제를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도 40과 관련된 의미를 상징하는 게 참 많이 있습니다. 제일 잘 아는 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40년이라는 세월을 일주일 만에 들어갈 가나안 땅을 돌고 돌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것에서도 보면 40년이라는 세월을 필요로 했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을까요? 심술쟁이 하느님이라서 그럴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겸손이 있을 겁니다. 바로 광야가 하느님을 만나는 데 필요한 자질을 함양하는 교육의 장이 될 수도 있는 공간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기도를 하실 때 또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시기도 한 장소입니다. 그런 공간을 돌리고 돌리신 게 바로 교육의 장이고 그런 공간에서 이런저런 온갖 경험을 다해서 드디어 마지막에는 40년이라는 길고 긴 광야의 과정 끝에 그토록 그리워하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장례미사 때 단골로 나오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정확하게 옳길 수가 없네요. 참 안타깝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장막이 허물어져 새로운 거처로 옮아감이라는 그런 내용의 말씀이 있잖습니까?

 

아마도 이 말씀은 죽음 그 자체를 그렇게 슬퍼하지 말고 단순히 새로운 세상 아니면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리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주지의 사실을 알려주는 의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음에 신부님께 여쭤봐야 되겠습니다. 이게 장례미사 때 기도문에 나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말씀은 많이 들은 기억이 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는 당신의 외아들을 저희를 위해 그의 몸에 우리의 죄를 씌우셔서 저희를 살리시려고 대속 재물이 되시여 그에 대한 대가로 저희는 의로움을 입게 되었다고 하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외아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저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가없는 그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하기에 바오로 사도는 2독서에서 당부의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이시겠습니까?

 

당신 아들의 핏값으로 저희를 살려주신 은혜말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을 하는 게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일 것입니다. 그러는 시간이 어쩌면 바로 사순시기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돌고돌아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들어간 것처럼 이 시기를 의미 있게 보내 반드시 하느님을 만나는 준비의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로 할까요? 바로 왜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셔야만 하셨는가를 진지하게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그건 신부님의 강론이나 영적인 독서로 묵상을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조 수단이 되어야지 진정한 묵상은 자신 스스로가 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시간이 되어야 진정으로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데 더 은혜로운 은총의 시간이 되리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 예수님께서 어떤 걸 먼저 모범을 보여주시고 그걸 따라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린 이 기간만이라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 속에서 저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과 가르침을 묵상하고 더 나아가서는 실행하는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와 관련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렇게 묵상을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당하는 갖은 수고와 십자가처럼,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은 실제 육적인 죽음이지만 우리는 육적인 죽음도 묵상을 해야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저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면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영적인 죽음을 묵상하는 게 더 의미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그냥 단순히 죄수의 형틀로 생각을 할 수가 있지만 저는 영적인 눈으로 보면 그 십자가는 바로 저희의 모든 죄로 상징되리라고 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상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고스란히 걸어야 되는 길입니다.

 

그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달리 말하면 죽으려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단순히 죽으려고 가는 길이 아니라 저희를 살리시려고 가시는 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 길을 걷는다면 어떻게 걸어야 될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으십니다.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겁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이 그 길을 걸으시는데 당연히 그래야 할 겁니다. 이때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전제조건이 바로 자신을 버리는 게 우선입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서는 어쩌면 십자가를 질 수가 없다는 말씀이 될 겁니다. 바로 자신의 아집, 고집, 에고 등 이런 걸 버려야 될 겁니다. 그러고 난 연후에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에서 진다의 표현을 영어 성경에 보면 받아들인다는 표현으로 해석이 됩니다. 바로 그렇다면 이렇게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살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무수한 십자가를 마지못해 억지로 등에 지고 가는 것처럼 짐 덩어리처럼이 아니라 우리가 그걸 받아들인다는 건 그걸 달리 말하면 품는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께서 한번은 예전에 고성 수도원에 계실 때 저에게 해 주신 말씀이십니다. 이것의 원래 원어적인 의미는 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원어는 제가 잘 모르지만 영어의 의미를 보면 맞을 것 같습니다. 근데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도 이게 쉽지 않으실 거라고는 아실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씀하신 연유가 무엇일까를 생각을 해봅니다. 바로 그게 저희를 살리시는 길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일 겁니다. 자아를 가지고서는 이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자아를 버리는 길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는 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을 찢어라고 하십니다. 이게 자아을 버리는 길이고 또 하느님께 돌아가는 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서 단식은 육적인 단식도 단식이겠지만 영적인 다이어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 속에 있는 온갖 탐욕 이런 것 말입니다. 시기, 질투 이런 것도 해당될 겁니다. 다른 의미로는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눔을 통해 이웃과 함께하는 의미가 진정한 단식일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은 것의 의미를 넘어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게 참회의 과정이지 않을까요?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권고를 하십니다. 하느님과 화해를 하라고 하십니다.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제 독서에 힌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 44절 이하에 나옵니다.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게 하느님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는 것일까요? 바로 세속에 탐닉해 세속에만 관심을 두고 하느님께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게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이 될 거라도 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 죄를 짖고 하느님께서 외아들의 피 값으로 저희를 살려주신 은혜에 배은망덕한 일을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인간 같으면 바로 분노와 응징이 가해질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1독서에서도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셔서 재앙을 내리시다가도 후회를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게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 강론에서 말입니다. 사순쯤에 하신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지칠 줄 모르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용서를 청하는 데에 지칠 따름이다고 하는 내용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속 마음을 찟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라고 재촉을 하시는데 하느님의 본성이 분노에 더디시다고 생각해 마냥 넋을 잃고 나중에 진탕만탕되어서도 돌아가면 용서해 주시겠지 하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시기를 지금으로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2독서에 나옵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이고 또한 구원의 날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과 화해를 하는 데는 미적미적거릴 시간이 없음을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저는 이렇게 이해를 하고 싶습니다.

 

회개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느님 입장에서는 죄의 늪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떠하실까를 생각해보면 바로 답이 나올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그 여정에 항상 함께해야 할 선물 3종 세트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자선, 기도, 단식입니다. 사순하면 이 3종 세트가 사순의 대명사이지 싶습니다.

 

오늘 복음 마태오 복음 6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 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다르게 한번 표현해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단순히 보여줄 생각과 의도로 의로운 일을 하면 하느님의 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 댓구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드러내 보이려고,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상은커녕 국물도 없다는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오히려 자선이나 기도 단식을 할 때 숨기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갚아주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갚아주신다는 게 아마 상급이나 마찬가지 뜻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런 걸 숨어서 한다고 해도 사람은 모를지라도 하느님은 다 아신다고 하십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 복음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까요? 그건 너무나도 유치한 답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떠나야 됩니다. 바로 우리 영혼이 가야 할 본향으로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도 성모찬송에 나오는 것처럼 지금 귀양살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잘못을 해서 유배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유배의 목적을 잘 생각해보면 어떤 마음으로 유배 생활을 해야 할까요?

 

바로 이 세상을 살면서 자선과 기도 단식 희생을 하며 우리는 우리의 죄를 보속하며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죄인이지만 실제 우리는 원래는 하느님과 창세 이전에 같이 살았던 영혼이었지만 그만 교만으로 타락해 온 천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건 욥과 하느님의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교만으로 하느님을 대적한 영혼이라 이 세상을 살면서 참회와 보속으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탕감을 받아야 되는 그런 신분이기 때문에 그 탕감을 받을 수 있는 근거를 하느님 앞에 제시해야 될 겁니다.

 

그걸 하늘나라에 그 탕감 받을 수 있는 보화를 쌓아야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제시할 수 있을 건데 이미 이 세상에서 그런 일을 하면서 자기가 자선을 하면서도 나팔을 불지 않아 자신의 자선을 숨겨두어 하늘에 저장을 해야 할 터인데 이미 죽고 없어질 이 현세에서 다 소진을 하는 결과가 되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러니 정말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단순히 사람들에게 과시하려고 뭔가 드러내보이려고 하는 행동을 하는 건 정말 어리석어도 너무나도 어리석은 짓이나 진배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넓은 의미로 이해를 하자면 이렇지 않을까요? 바로 우리가 뭔가를 다 드러내보이려고 하는 심리의 기저에는 바로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욕구가 숨어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근데 그건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게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보면 자신의 천국 곳간이 털털 비어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땐 이미 버스 지나고 손을 흔드는 격입니다. 끝으로 십자가 성요한 성인이 남기신 말씀을 한번 되새겨보며 오늘의 복음묵상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십자가 성 요한)

 

하느님을 위해 가장 순수한 사랑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비록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조차도 알려드리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설령 하느님께서 영원토록 자신의 행동을 모르신다 해도 여전히 기쁨과 사랑으로 봉사할 것이다.

 

참으로 멋진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사순기간 동안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늘나라 갈 때까지 마음속 깊이 고이고이 잘 간직해서 항상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하느님께 애걸복걸하며 매달리면 하늘나라 가는 건 이미 따 놓은 당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감사합니다. 은혜로운 사순이 되기를 빌어드리고 싶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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