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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이야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27 조회수1,091 추천수1 반대(0) 신고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한 세상을 살다가 마지막 자신의 삶을 마치는 순간까지 전체의 삶을 돌아보게 되면 우리는 어쩌면 우리의 인생과 삶이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선택이 또 다른 선택을 만나서 결정하고 이 과정이 반복돼 가는 길이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여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전에 한두 번 방송에서 봤습니다. 자신의 이상향을 찾는 데 축구의 토너먼트 방식으로 해서 결국에는 최종 이상향이 누구인지를 자신만의 선택으로 결정되는 것을 봤습니다. 축구라는 스포츠도 아주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대진표가 나올 때 우리는 예상을 합니다.

 

각 대진표에서 우리가 맞붙게 될 상대팀이 우리와 경기를 할 때 누구와 경기를 해야 상대적으로 좀 더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을지를 예상하기도 합니다. 유리한 상대가 이기기를 바라거나 또는 어떤 팀이 지기를 바라는 걸 바라지만 운명의 여신의 도움으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정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종적인 결과에 따라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면 그 나라 전체가 기쁨의 도가니로 바뀌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세상 스포츠인 월드컵축구에 비유하면 어떨까요? 목표치가 나라마다 다 다를 겁니다. 어떤 나라는 16강만이라도 된다면 감지덕지하다고 생각을 하는 나라도 있고, 어떤 나라는 8, 어떤 나라는 4강 더 나아가서는 우승까지 목표를 잡는 나라도 있습니다.

 

저는 축구에서 우승을 하게 되면 우승 트로피를 받게 되는 걸 신앙과 결부해서 생각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바로 그게 생명의 화관, 영생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받게 될 영광의 상이 될 겁니다.

 

스포츠에서도 우승을 하는 과정을 보면 그냥 쉽게 얻어지는 과정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로 그건 눈물과 피땀을 흘린 결과로써 얻어지는 상이 됩니다. 그런 결과를 얻기 위해 남보다 더 많은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로써 얻게 되는 보상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여정도 마치 이와 아주 흡사합니다. 우리도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생명의 화관을 받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반드시 이 세상에서 지불해야 됩니다. 마치 축구선수가 땀 흘린 노력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여정의 최종 결승골라인의 깃발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천국 문 앞에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 깃발을 향해 지금 달리는 선수와 같습니다. 선수들이 달릴 때에는 오직 그곳만 목표를 하고 달려야 최고의 성적이 나옵니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딴 데 한눈을 팔면 되지를 않습니다. 딴 눈을 판다는 건 신앙으로 말하면 무엇일까요? 우리가 정상적으로 가야 하는 항로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를 보면 모세는 백성에게 하나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크게 생명과 죽음을 놓고 말입니다. 힘으로 강제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선택은 오로지 자신이 선택하는 길입니다. 외부의 강제적이고 물리적인 힘이 없다는 건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을까요?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말합니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될 것이고 그와 반대로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조건에 대한 결과를 제시한 후에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1독서 신명기 3016절을 보면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법규를 지키면, 너희가 번성할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멸망에 이르고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가나안)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축복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말씀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 멸망의 길로 갈지 이런 선택도 오로지 스스로가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멸망의 길과 축복의 길을 선택하라고 하면 축복의 길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처음 시작은 누구나 축복의 길을 선택해서 가지만 누구나가 축복을 받느냐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모세는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말을 합니다. 19절 이하에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 이런 선택권을 제시합니다. 이 부분도 영어성경을 보면 우리는 저주라고 표현이 되어 있지만 영어성경 표현을 보면 이 부분의 의미가 멸망’, ‘소멸이런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제가 봤을 때 그냥 단순하게 표현을 하면 생명과 죽음 양단간의 결정을 하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말을 합니다. 바로 생명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근데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고 합니다. 즉 다시 말해 하느님을 선택해야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20절 이하에 보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고 합니다. 바로 이게 무엇이겠습니까?

 

축구로 말하자면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려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는 건 그냥 귀로 듣는다는 그런 액면적인 뜻이 아닐 것입니다. 바로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고 그게 바로 계명을 지키라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모세는 하느님께 매달려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이렇게 묵상을 해봅니다. 저만의 방법입니다.

 

매달린다표현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봤습니다. 하나는 어디에 붙어 있는 것과 같은 것, 또 하나는 오로지 어디 하나에만 전념하는 것 두 가지로 나누어서 묵상을 해봅니다.

 

전자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비유처럼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는 말씀 말입니다. 마치 가지가 포도나무인 예수님에 붙어 매달려 있어야 살 수가 있다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선수가 결승라인을 보고 오로지 그것만 보고 달리는 것처럼 나에겐 오로지 세상의 영광과 부 이런 것도 좋지만 나에겐 하느님 당신만 있으면 된다는 그런 일념을 가지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화답송에도 나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나옵니다.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이라면 어찌 그분께 매달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분께 매달리는 사람만이 그분의 가르침을 되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또한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를 맺고, 잎이 아니 시든다고 합니다. 잎이 아니 시든다는 건 영원하다는 걸 상징하지 않을까요? 또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될 거라고 합니다. 바로 이게 축복일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축복의 길을 알고 그대로 가면 되는데 누구나가 그 길을 가지 않습니다. 그 축복의 길이 그냥 단순히 꽃길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꽃길만 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길은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은 후에 나타나는 길입니다.

 

가시밭길이 바로 운동선수로 말을 하자면 선수가 흘리는 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겐 그 땀이 무엇일까요?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보다 더 정확한 비결은 아마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이 쉽지 않기 때문에 이 길을 가다가도 힘들기 때문에 때론 좌절하거나, 힘이 든다고 그냥 주저앉다가 보면 힘이 부쳐서 그만 중도에 포기를 하고 마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 길을 가려고 출발을 하지만 누구는 최종 목적지까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완주하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에 이 길을 가는 도중에 어떤 유혹에 빠져서 시편 저자가 하는 말처럼 악인의 길인 멸망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축복의 길인 꽃길을 가기 위해서 먼저 가야하는 길이 바로 가시밭길입니다. 그 가시밭길 끝에 꽃길이 있고 그 길이 바로 천국문에 이르는 영광의 길이 될 겁니다. 근데 이 십자가는 한 번씩 어쩌다가 지는 게 아니네요. 바로 날마다 지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하늘나라 가는 그 순간까지 십자가가 없을 수 없다는 말씀으로 저는 이해를 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그렇게 생각을 해야만이 우리에게 오는 온갖 십자가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여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연하다고 여겨야 그나마 그 길이 어렵다고해도 그게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을 해야 우리에게 오는 십자가가 십자가가 아니라고 여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그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되겠습니까? 바로 십자가가 더 이상 십자가가 아니고 그 십자가는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걸 알 수가 있을 겁니다. 아마 이 경지가 최고의 신앙의 경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복음에서는 복음 때문에목숨을 잃는 것으로 나오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 ‘나 때문에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나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 천하를 설령 다 가진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만큼 목숨은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가 없다는 걸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 때문에라는 이 표현을 끝으로 묵상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텍스트상에 나타난 의미만을 놓고 보면 그냥 단순히 라는 건 예수님과 동일한 말이기 때문에 예수님 때문으로 이해를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저는 좀 다르게 한번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지금 이 말씀은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따라라고 하는 말씀 다음에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을 따라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즉 다시 말해 나 때문에이 말씀은 결국 예수님 때문에라고 하는 의미보다는 여기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 때문에로 이해를 하는 것도 논리에 어긋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제 언어적인 감성으로서는 그렇습니다.

 

결국 그 길은 자신을 버리는 길일 것이고 또한 그 의미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길을 가다가 목숨을 잃으면 하느님께서 그 목숨을 담보해 주시겠다는 말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앞 구절에 나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이 부분을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렇게 묵상했습니다. ‘나 때문에는 어떻습니까? 그게 자신도 자신이지만 남을 위해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이고 그건 자신의 삶을 생각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더 생각해서 사는 삶이라고 볼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하느님께서 목숨을 담보해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일 겁니다.

 

이제 그럼 지난한 이 묵상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여정에도 하느님의 길을 가야 하나’, ‘세상이 주는 달콤한 길을 가야 하나하는 그런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길에서 우리는 세상이 주는 달콤한 유혹의 길에서 벗어나 어렵고 힘들지만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이 비록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가고자 맹세를 한 이상 그 길이 아무리 고난의 길일지라도 예수님께서도 저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것처럼 그런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끝까지 인내하며 그 길을 간다면 그 길 끝에는 생명의 화관이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묵묵히 오늘 하루도 날마다 지라고 하신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과 각오를 하느님께 봉헌하면 하느님께서 기뻐 받아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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