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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1주일 복음 이야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01 조회수1,071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 제1독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을 창조를 하시는데 흙을 재료로 해서 만드십니다. 여기까지는 사람의 외형은 사람과 같겠지만 실제 온전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생명의 숨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아마도 하느님의 영이지 않을까요? 결국은 하느님의 영이 있어야만이 사람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하느님께서 에덴이라는 동산을 하나 만드셔가지고 그곳에 사람을 데려다 놓고 금지명령 하나를 내리십니다. 그 동산 위에 있는 흙 위에 온갖 나무를 재배하고 계신데 동산 한가운데에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 놓어시고는 동산에 있는 온갖 나무에서 나는 열매만은 먹어도 되는데 유독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열매만은 따 먹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 이미 어느 정도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열매만은이 표현에서 말입니다. '선악과는 먹지마라 하는 것'과 '선악과만은 먹지 마라 하는 것'의 뉘앙스에서 왜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하는 유혹이 생기게 되어 있는 구조입니다.

 

동산에 있었던 여자는 하느님의 금지명령을 어기고 나무 열매를 따먹었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하느님 말씀을 잘 지키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무엇으로 그걸 알 수 있을까요?

 

뱀의 간교한 말에 여자가 하는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뱀은 여자에게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고 하는 말에 여자가 뱀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 열매는 먹어도 되지만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말을 인용해 말을 해 주는 것을 보면 하느님께서 내리신 금지명령을 명확하게 이해를 하고 있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단 하느님 말씀을 확실하게 이해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뱀은 어떻게 이 순진한 여자를 꼬셔서 하느님의 금지명령을 어기게 하려고 합니다. 여자가 이렇게 나오니 자기가 할 일이 실패할 것 같으니 간교하게 여자에게 속삭입니다. 그럴 리 없다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난 후에 여자는 호기심에 그만 한번 그 나무를 쳐다보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견물생심이라는 사자성어가 여기서 유래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서 보니 이제는 그 나무가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탐스러워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먹고 만지면 죽게 된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는 나름 그래도 지키려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만 죽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보니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상상을 해보면 갈등이 있었을 겁니다. 죽는다면 모를까 그것도 죽지 않는다고 할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열매가 탐스러워 보이니 이젠 따 먹고 싶은 욕구가 불뚝불뚝 솟아났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애라이! 모르겠다고 생각해 그만 하면 안 되는데, 하면 안 되는데하면서 먹고 말았을 거라고 봅니다. 먹고 나서 생각해보니 유혹을 못이겨 먹긴 먹었지만 후사가 두려워 일단 책임을 나누어지려는 생각에 순진한 아담에게도 줬을 겁니다. 순진한 아담도 별 생각 없이 아내가 주니 날름 먹었을 겁니다.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두 사람이 먹고 나니 그 둘은 눈이 열려 자신들이 알몸이 된 것을 알아 두렁이를 둘렀다고 제1독서는 이야기합니다.

 

9절에 보게 되면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하는 말씀에서 저는 이런 상상을 한번 해봅니다. 앞에서 보면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표현에 비추어보면 이때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이 표현을 이렇게 바꾸어 설명을 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흙이 사람이니까 사람에게서 자라난다 이런 표현으로 말입니다. 거기에는 온갖 나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무가 상징하는 게 사람 속에 일어나는 온갖 생각이라든지 마음 즉 유혹이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선한 마음도 있고 또 악한 마음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런 표현을 하셨잖습니까? 이건 이분법적인 사고이지만 이 외에도 인간은 온갖 생각과 마음이 있습니다.

 

7절에 보면 먼저 화와가 먹고 난 후에 아담에게 주고 아담이 먹자 두 사람에게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이 된 것을 알고 두렁이로 가렸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알몸인 것을 알고 가렸다는 표현의 뉘앙스를 보면 어떻습니까? 딱 보면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하는 말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알몸을 가렸겠죠. 이 알몸이 아마 를 상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죄를 짓게 되었으니 그 결과로 인간은 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멍에를 안고 살아가야 되는 운명을 가진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더는 두고 볼 수가 없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오늘 제2독서를 보면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고민 끝에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내려 보내실 중대한 결심을 하시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이야기하십니다. 장차 오실 분은 예수님을 상징할 겁니다. 첫째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자신의 불순종으로 죽음이 지배를 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두 번째 오실 예수님은 철저히 성부 하느님께 자신의 목숨까지 인류의 죄를 대신해 순종으로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이 은혜로운 선물로 우리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누리는 은총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공로로 죽음의 사슬이 끊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2독서 마지막에 예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되게 될 거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을 하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거부하셨거나 또 오셨어도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거부하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그런 운명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철저히 성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그것을 배워야 할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아들인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한편 죽음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있었을 겁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께서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극도로 공포스럽지만 아버지의 뜻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하고 받아들이십니다. 만약 신성으로만 가득차셨다면 그런 고민을 하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신성도 있으셨지만 인성도 가지고 계셨기에 당연히 죽음에 대한 공포를 피하고 싶어하셨을 겁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성부의 뜻에 따를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바로 예수님의 삶 중심에 말씀이 항상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그걸 증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시는데 그때가 바로 40일간의 단식을 하신 후였습니다. 시장하신 상태에서 악마가 빵으로 유혹을 합니다.

 

이 상황에서 한 가지 중요한 걸 언급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분도 또 광야에 나가실 때 성령에 인도되어 나가시면 한마디로 성령 충만하실 텐데 그런 상황에서도 악마가 유혹을 하는 걸 보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악마가 유혹하는 건 뭐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유혹에 넘어가기 아주 취약한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악마가 돌로 빵을 만들라고 유혹을 할 때 전제조건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조건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 상황에서 그런 걸 하실 수가 없어서 못하셨겠습니까? 그런 악마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단호히 성경 말씀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시면서 단호히 물리치십니다.

 

이 내용을 잠시 앞 독서와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사람이 창조될 때 생명의 숨인 하느님의 영이 들어가서 온전한 생명체가 되는 것으로 봐서 사람은 하느님의 영인 말씀을 먹지 않으면 제대로 온전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은 그렇습니다.

 

이걸 다르게 표현을 한다면 만약 빵만으로만 산다면 유혹에 넘어가실 수도 있을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사실은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수가 있다고 하셨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신다는 걸 나타내 주시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라고 하십니다. 이때도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고 하시면서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악마는 두 번 다 실패를 하게 됩니다. 그러자 이제는 마지막 수단을 생각합니다.

 

세상의 영광으로 유혹을 합니다. 이때도 성경 말씀을 인용하셔서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말씀이 있다고 하니 그제야 악마는 두 손 두 발 들고 물러났습니다. 결국 말씀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이런 게 복음에 있는 게 왜 있겠습니까? 바로 모범사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유혹에 약한 존재이지만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승리하는 길은 오직 말씀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걸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절에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라는 말씀처럼 세상의 유혹에 넘어 가지 않으려면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에페소서 611절 이하에 악마의 간계에 맞서려면 하느님의 무기로 무장하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늘에 있는 악령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라고 합니다. 믿음의 방패로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도 막을 수가 있다고 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인 말씀을 받아 쥐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이길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는 수단은 오직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함을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절실히 알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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