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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1.“광야에서의 유혹과 시련”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5신부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01 조회수1,451 추천수2 반대(0) 신고

 

광야에서의 유혹과 시련

(사순 제1주일 긴 강론 : 마태 4, 1-11)

 

 

 

사순 제1주일이다. 오늘 <말씀전례>의 장소는 오늘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준다.

 <1독서>의 장소는 에덴동산이고,

<복음>의 장소는 광야이고,

<2독서>의 장소는 로마라는 도시 광야이다.

바로 이곳이 오늘 우리가 있는 장소이다.

이 이야기에는 역사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거대한 두 사건이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의 중심에는 유혹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유혹의 결과에 따라 두 개의 세계가 열리게 된다.

곧 에덴동산에서의 유혹과 광야에서의 유혹의 결과에 따라 열리는 두 세계가 있다.

이는 유혹에 대한 패배와 승리의 결과에 따라 열리는 세계이다.

그것은 죽음의 지배를 받는 세계와 생명의 지배를 받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 마디로, 말씀에 대한 순명과 불순명에 따라 결정된 세계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죽음의 지배를 받는 것을 세계를 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생명의 지배를 받을 세계를 택하고 있는가?

 

 

 

1, 광야

 

 

, 그럼 먼저 광야로 가 보자. 대체 광야는 어떤 곳인가?

 

 

 

광야’(사막)는 지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물이 귀하고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대신에, 마귀들과 해로운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이 살만한 땅이 아닌 저주받은 땅으로 간주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한가운데도 광야가 있다.

우리의 삶 한 가운데에 어둔 밤이 있고, 공허가 있고, 막막함과 무미건조함이 있다.

 어찌할 수 없는 나약함과 붙들어 매어지지 않는 흔들림이 있고, 불가항력적인 무능함과 도리 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무기력이 있다. 벗어나지지 않는 고통과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가슴 안에, 황량한 광야를 품고 살아간다.

결코 피해 지지 않는, 피할 수도 없는 광야를 좋으나 싫으나 부둥켜안고 살아간다.

<성경>에 의하면, ‘광야는 아주 독특하다. 곧 지리적인 장소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구세사적인 독특한 시기를 의미한다.

곧 일반적인 의미의 사막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입은 이들이 겪게 되는 사막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세는 홍해를 건넨 후에 광야를 길을 걷게 되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로 나아간다.

이미아직 아니 사이에 펼쳐져 있는 광야인 것이다.

그러니 이 광야는 이미 홍해를 건네 온 이들에게 주어진 광야이다.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홍해를 건네 온 이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인도하시기 위해서 사막을 통과하게 하셨다.

그것은 하느님에 의해 직접 선택된 길이었다.

 그 길은 가나안에 이르는 짧은 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인도하기를 원하셨던 길이었다. 이스라엘인들은 바로 이 사막에서 율법을 받았고,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목마름과 갈증, 허기짐과 베고픔이 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과 우상숭배가 있다.

이방 민족들의 침탈이 있고,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투정과 불평, 배신과 반역이 있고 불충이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는 만나와 메추라기가 있고, 바위에서 솟아나는 물이 있고, 그들을 인도하는 지팡이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다.

그들을 치료해주는 구리 뱀이 있고, 이민족을 물리쳐주는 하느님이 손길이 있다.

하느님의 보살핌과 연민, 자비와 충실함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승리가 있고 하느님의 영광이 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막에 살게 하지 않으시고, 단지 약속의 땅에 이르는 통과지로서 간주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유배지인 바빌론 또한 사막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묵시문학에서는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구원은 사막이 낙원으로 변하는 것으로 소개며, 그때에는 메시아가 사막에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마태 24,26;사도 21,38;묵시 12,6.14.).

따라서 사막은 신앙생활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광야라는 이 묵중한 십자가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

 곧 구원에 이르는 통로로 주셨다.

그리하여 이 사막을 걷는 길은 곧 신앙의 길이 된다.

그렇다면, 광야에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2, 광야에서의 유혹

 

 

 

오늘 사순 첫 주일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이다.

광야에는 예수님이 있고 유혹자인 사탄이 있고 주님의 천사가 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

먼저 있었던 그 말씀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들려준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참조).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신명 6,16 참조).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 6,13).

 

 

 

, 그럼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들려주게 된 상황인 사탄의 유혹이 대체 무엇인지를 보도록 하자!

유혹자는 치명적으로 악마적인 매력으로 유혹하는데, 이는 유혹의 세 단계를 보여준다.

<첫 번째> 유혹은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 해보시오.”라는 꼬드김이다.

곧 돌을 빵으로 만드는 능력에 대한 탐욕이다.

나아가서는 자신의 기능과 재능 등을 포함할 수 있다(; 술과 목숨을 걸고 도박을 벌린 청년이야기-영혼의 부패와 파괴).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하시면서 하느님 말씀을 생명으로 삼으신다.

<두 번째> 유혹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라는 꼬드김이다.

곧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다치지 않고 내려오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당신의 신적인 힘의 과시를 드러내라는 허영에 대한 유혹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하시면서,

겸손하게 땅의 낮은 곳에서의 설교와 기도와 고통을 겪으시고,

 마침내는 높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다.

<세 번째> 유혹은 당신이 땅에 엎디어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라는 꼬드김이다.

곧 권력과 영광의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이라도 승리의 방식으로 사용하라는 유혹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다.

이 유혹들은 한 마디로, 아버지의 계획에 맞서라는 것이었다.

곧 사탄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정해놓으신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구원하라고 부추기며 유혹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세상의 방식이나 자기 자신의 방식, 자기가 원하는, 자신이 유익하다 편리하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하라고 꼬드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에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이러한 유혹을 받으셨다.

그리고 겸손하게 성경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기셨다.

공생활의 시작부분에서뿐만 아니라, 공생활 내내, 그리고 십자가에서까지 그 유혹을 받으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순종함으로써 유혹을 승리로 바꾸셨다.

그리고 오늘 <2독서>는 아버지께 대한 예수님의 순종이 가져온 선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불순종이 가져온 악을 훌쩍 넘어선다(로마 5,10)는 증언을 담고 있다.

 

 

 

3, 유혹의 의미

 

 

 

그런데 유혹은 대체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오는가?

 

 

 

유혹(πειρασμον)이라는 단어는 이중적인 의미, 유혹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시련 혹은 시험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마치 우리말의 위기(危機)가 위험과 기회라는 뜻을 동시에 담고 있는 것과 같다.

 유혹은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면, 시련은 믿음을 흔드는 것으로 테스트하는 것이고 믿음을 굳세게 한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야고 1,2-3)

.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 1,12).

 

 

사실, 거의 모든 사건에는 우리의 두 가지 상반된 의지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

곧 그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려는 거룩한 의지와 하느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려는 악한 의지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같은 돌이 어떤 이에게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다른 어떤 이에게는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곧 어떤 사람은 유혹을 통해서, 오히려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고, 그것은 그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시련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시험하시기는 하지만 유혹하시지는 않으신다.

이에 대해 사도 야고보는 말한다.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13-15)

 

 

그렇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유혹에 빠지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곧 마음이 깨끗하면, 유혹은 마음 안에 침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존자 베다는 말합니다.

마귀라 할지라도 우리의 나쁜 생각들에 힘을 보태어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오상의 비오 신부도 이렇게 말한다.

그 어떤 경우라도 마귀는 인간의 응답 없이는 인간 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다. ‘유혹은 악마에게서 온다.

그것은 맨 처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서 벌어졌다(창세 3,1-7).

오늘 <복음>에서는 광야에 있는 예수님에게서 벌어졌다.

그리고 공생활 내내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까지 유혹을 받으셨지만 승리하셨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유혹과 패배의 한가운데로 찾아오시어 우리 손을 붙잡아 일으켜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인류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계속해서 인류를 유인하고 있는 유혹들을 예수님을 통해 이겨낼 수 있다.

이를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은 사람들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죄 외에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습니다.”(히브 4,15)

 

 

이처럼, 유혹은 사탄이 하며, 악과 관련된다.

그래서 마태오복음사가는 유혹이 사탄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주님의 기도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다음에 악에서 구하소서.”를 덧붙인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는 유혹 자체를 저지할 수는 없기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구해 달라고 청원한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이 구절을 유혹받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니라, 유혹에 굴하지 않기를 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세상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제자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5-1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 있으면서 악에서 보전되기를 기도하셨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그 보전되는 길을 기도하셨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말씀의 진리로 거룩한 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곧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악을 이기는 길이다. 따라서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며라는 기도는 우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라는 적극적인 기도와 같은 것이 된다.

그러니 우리는 단지 악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머물러 있어서만은 안 된다.

더 적극적인 의미로 선으로 악을 이겨내야 한다.

그렇다. 악은 단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으로 이겨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그러니 악에서 구원된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로서 선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4, 유혹에 대한 대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아담은 에덴에서 유혹에 걸려 넘어지고 시험에 실패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막아내고 시험에 승리하였다.

왜 아담은 걸려 넘어졌고, 예수님은 걸려 넘어지지 않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기도에 달려 있다. 아담에게는 기도가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40일간 드리는 기도를 통해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렇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탄의 계략에 이길 수 없다.

사탄은 어려운 일이 오면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원망하게 하고,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통해서 교만하게 함으로써 하느님과 멀어지게 만든다.

그렇지만 기도를 한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것들을 통해 성화되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루카 22,40)

 

 

 

아마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 충고를 따랐더라면, 그날 밤 스승을 배반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짐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무거운 시련을 허락하지는 않으신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으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여러분이 시련을 당당하도록 묵인하지 않으실 것이며, 오히려 시련과 함께 그것을 견디어 낼 방도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1코린 10,13)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유혹과 시련을 마주하지만, 그것들은 오히려 우리를 구원받도록 도와준다.

바로 그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동행하시며 우리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스 큉은 말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혹 속에서 오히려 하느님을 발견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길을 가르쳐주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다름 아닌 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영적 전쟁이란 복음에 신실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전투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 610-1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끝으로,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무기는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며, 말씀의 영이신 성령이며, 성령이 동반된 기도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곧 기도로 성경 말씀을 사용하시고, 성경말씀으로 기도하기를 제시하신다.

결국, 말씀이 유혹을 이기는 권능을 발휘하시고, 말씀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비추고 어둠을 몰아내신다.

 

 

오늘, 부활을 기다리는 우리는 텅 빈 광야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사막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 생명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주님!

나의 필요보다 타인의 필요를 먼저 헤아리고,

소유하기보다 소유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무엇이 유익한가보다 그것이 사랑인가를 보게 하시고,

능력을 가지기보다 가진 능력을 사랑으로 쓸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으로부터 떼어 놓는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에 힘입어 말씀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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