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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람은 자기에게 맞는 옷을 입어야 됩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01 조회수1,225 추천수0 반대(0) 신고

 

조금 전에 코로나 소식이 궁금해 인터넷을 열어보다가 정치인 안철수 의원에 대한 기사를 봤습니다. 그냥 타이틀만 대충 보고 댓글이 궁금했습니다. 근데 놀라운 것은 댓글을 그렇게 많이 보지 않았습니다. 순간 댓글을 보면서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뭔가 글감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오늘 댓글을 보면서 저는 안철수 의원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댓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에 보면 많은 댓글이 그랬습니다. 예전에는 정치판에서 그만 나가달라는 것부터 그랬습니다. 저는 누구를 평가할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오늘 이걸 보고 느낀 게 있습니다.

 

대구로 부부가 내려가 자원봉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사진에 나오는 건 수술복 가운을 입은 모습이었습니다. 첫 번째 댓글부터 안철수 의원에 대해 아주 호의적인 댓글이 시작되었습니다. 보통 보면 정치인 안철수보다 의사인 안철수 의원의 모습이 더 멋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걸 보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그래 사람은 자기에게 맞는 옷을 입어야 자신의 모습이 멋지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어울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인생을 본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인생을 사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안철수 의원이 이 기사에 나오는 댓글을 본다면 혹시 생각이 바뀔지는 미지수입니다. 저는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신앙과 연관시켜 생각해봤습니다.

 

우리 신앙인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람 사람마다 그 사람 나름의 고유한 바코드를 입력했을 거라고 봅니다. 이 세상에 아니 우주에서 자기와 같은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어떤 것의 가치를 책정할 때 고려되는 요소 중에 하나가 바로 희귀성입니다. 희귀하기 때문에 가치가 높게 책정됩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거라고 본다면 자신의 몸값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린 지금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고 부활을 준비하는 시기라고 강론을 통해 들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죽음 이면에 있는 걸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말고 다른 각도에서 한번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만약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과연 돌아가셨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세상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을 했기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입고 오신 옷을 존중하고 그걸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입고 오신 옷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은 어쩌면 미리 사형수가 입는 옷을 입고 오셨는지 모릅니다. 그 옷을 이미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실 때 입혀 보내셨는지도 모릅니다. 거기엔 하느님의 눈물이 고스란히 녹아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재물이 되어 죽게 될 거라 생각하면 말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재물로 바치려고 할 때 그 부모의 마음과 같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런 아픔도 삭히시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희생시킨 것은 저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우리 인간들은 자신이 십자가에 재물이 되려고 사형수복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모르고 하느님의 눈물이 배어 있는 사랑을 모르고 모함을 하며 배척을 했으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요?

 

그럼 우리는 그 문제에서 자유로울까요? 난 그때 있지 않았으니깐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본성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을 박해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가르쳐주신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게 예수님을 박해하는 거랑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일 복음을 보니 최후의 심판 내용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핵심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우리가 많은 사랑을 실천했는가 입니다. 그 사랑도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이, 가장 작은 이에게 사랑을 베푼 것을 예수님 자신에게 베푼 것과 동일하게 대해 주시겠다는 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지금 이 시대에서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은 그런 예수님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 게 바로 예수님을 배척하는 거랑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이를 넓게 확장하면 바로 모든 사람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린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저도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반성을 합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면 우리가 우리 주위의 사람을 미워하거나 시기, 질투를 한다고 한다면 그건 예수님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거와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만약 실제 그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옷과 예수님과 동일한 모습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과연 그들을 그렇게 대할 수가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을 겁니다. 깍듯이 대접하게 될 겁니다. 우리의 눈에는 그냥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보일 수 있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입혀 보내주신 그 옷과 동일할 겁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께서 입고 오신 그 옷이 하느님의 옷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어찌 박해를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지금은 사순시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람을 평가를 할 때 그 사람의 옷을 가지고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이 옷은 실제 의복인 옷도 옷이지만 또 다른 의미는 겉으로 드러나는 겉모습을 상징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입고 계신 그 옷의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는 말아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럴려면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외적인 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것이며 또한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이 세상에  예수님의 옷을 입고 온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말도 말로써는 쉽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해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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