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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색다른 관점에서 본 '최후의 심판'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02 조회수1,456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쉬운 내용입니다. 바로 최후의 심판 내용입니다. 이 복음에 대한 묵상은 지금까지 2000년 가톨릭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묵상과 강론이 있었겠습니까? 저는 오늘 약간 색다른 방향으로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 아침에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생각나는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마산교구 신부님이신 윤행도 가롤로 신부님, 한 분은 사랑의 선교 수도회 수사님 한 분입니다. 수사님 세례명을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수사님이라고만 호칭을 불러서 그럴 겁니다.

 

신부님을 만난 시점은 지금 대충 계산을 해보니 제가 영세를 받고 3년이 지난 시점인 것 같습니다. 이때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점이었습니다. 개신교에서 개종한 걸 후회를 하고 다시 개신교로 가려고 많은 갈등을 한 시점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 등등 그러던 차에 최종 마음을 굳히고 떠날 때 떠나더라도 마지막으로 성사는 보고 떠나자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미사 전에 본당이나 또 다른 본당에서 성사를 할 그런 상황이 아니라 교구청에 사목하는 신부님이 계시니 교구청으로 갔습니다.

 

마침 신부님께서 성사를 주시겠다고 해서 성사를 봤습니다. 제가 받은 상처로 인해 짓게 된 죄를 고백하고 보속을 받았습니다. 면담성사를 하면서 다시 개신교를 가는 내용으로 성사를 봤습니다. 왜 다시 개신교를 가려고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신부님께서는 제가 어리버리하게 말을 한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신부님 입장에서도 어찌 말릴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께서도 제 말에 수긍이 갔기 때문입니다.

 

끝에 가서 신부님께 질문을 드렸습니다. 제가 걱정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심판 때 걱정되는 부분이 천주교에서 믿었던 하느님이 심판하실지, 아니면 개신교에서 믿었던 하나님이 심판하실지 고민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각각 한 번씩 배신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곳에서 말씀드릴 수가 없어 요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때 신부님께서 갑자기 성경을 펼치시는데 바로 오늘 복음 최후의 심판을 펼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형제님, 다시 개신교 가고 싶으면 가도 된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좀 놀라웠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시면서 왜 개신교에 가도 되는지와 제가 걱정하는 부분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 형제님. 오늘 이 성경 말씀에 성당을 떠나 개신교를 갔다고 하는 내용이 심판의 내용으로 나오는 부분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이 복음이 최종적인 기준이 되니 형제님께서 그곳에 가더라도 이런 삶을 살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걱정은 덜었지만 이걸 보장을 할 수가 없어서 그래도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니 만약 그렇다면 신부님이 그 책임을 지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모르긴 몰라도 신부님께서는 제가 말은 그렇게 해도 심리상태를 봐서는 개신교에 가지 않을 거 같다는 판단을 내심 하셨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이젠 지나간 이야기라 언제 한번 뵈면 여쭤보고 싶네요.

 

그날 성사를 보고 수도원으로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기도도 하면서 마음을 정리하려고요. 그때 그게 인연이 되어 수도원에서 만난 수사신부님이 방황하는 제 신앙을 잡아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형처럼 생각하는 신부님이십니다. 그때부터 수도원을 다니면서 신부님과 많은 영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제 모든 삶을 신부님께 말씀드렸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하느님 다음으로 저를 가장 잘 이해를 하시는 분입니다.

 

이 신부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언젠가 한번 수도원을 다니다가 몇 개월 지나서 갑자기 어머니께서 뇌경색이 와 투병을 2년을 하셨는데 그때 제가 성모님과 하느님께 기도로써 의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돌아가신 사정이었고 그래서 어머니의 영혼만 기도를 하니 자식된 입장에서 마음이 걸렸습니다.

 

물론 어머니도 한평생 불자였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지 않았지만 제가 마지막에 뇌경색으로 쓰러지시고 부산 백병원에 입원하신 후에 어찌 될지 몰라 급한 마음에 가족들 몰래 병원에 수녀님이 계셔서 대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때 어머님의 의식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결국 그때 그렇게 했기에 장례미사도 할 수 없는 집안이었지만 극적인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걱정을 하니 신부님께서 칼라너 신부님의 익명의 그리스도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내용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자신의 탓이 아니고 양심에 따라 살면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영혼은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것이라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정확하게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때 마음이 많이 놓였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 안에서 신앙을 해야 하는 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이것만 너무 믿고 방심은 하면 되지 않을 겁니다. 절대적인 보장은 하지 못할 겁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울타리 안에 있어도 세례만 받았다고 어떤 권리가 생기는 게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권리가 있으면 그에 합당한 의무도 이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그렇게 방심을 했다가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이 나중에 그 사람들이 더 복음적인 삶을 살았다면 그때 그 사람들이 방심한 사람보다 구원의 문이 더 활짝 열려 있지 않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건 성경에 나옵니다.

 

바로 그건 마태오복음 721절이 그 근거가 될 겁니다. 이 내용은 개신교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제가 생각한 내용이라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뭐도 하고 뭐도 하고 했다고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시면서 나에게서 물러나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아무리 하느님의 테두리에 있다고는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자 이런 게 절대적인 보장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시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수사님 한분은 부산에 계신 분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세우신 수도원입니다. 수도원을 그 당시 계속 다니면서 여러 차례 피정을 오셔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선종하신 날이 20171218일인데 그날도 수도원 새벽미사에 갔습니다.

그날 수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 여쭤본 게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작은 이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연찮게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궁금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날이 제가 수도원과 인연이 되어 거의 이틀에 한 번씩 꾸준히 어머니 부산에 병원과 마산 수도원을 다닌 시점이라 수사님과 대화 중에 그럼 수사님, 지금 이 상황에서 저희 어머니도 복음에 나오는 작은 이에 해당하는 겁니까? 하니 그렇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당연히 자식이니 보살펴드려야 하는 그런 대상이라서 복음에 나오는 그런 대상과 좀 다른 개념으로 생각을 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아무래도 수사님이 계신 수도원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작은 이에 해당하는 그런 사람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수사님이 이에 대한 논리가 아주 특별했습니다.

 

저는 이때 작은 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했습니다. 언제 이 부분만 제가 나름 생각을 정리해서 올려보려고 합니다. 그날 수사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병원에서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갔는데 그날 다행히 제가 어머니 임종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부모님 두 분 모두 임종을 지킬 수 있어서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복 받은 것 같습니다.

 

복음에서 나오는 작은 이는 간단하게 말하면 좀 더 광의적으로 해석을 하면 그 대상이 모든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수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핵심은 간단하지만 그 원리가 좀 쉬운 듯하면서도 좀 어렵습니다. 기억이 되살아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핵심은 기억을 하고 있고 그 이후로 이 부분에 대해 많은 묵상을 했기에 나름 정리할 수가 있으리라 봅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해서 일어난 일화가 있습니다.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맞아들였다는 이 대목과 관련해서 생긴 일입니다. 언제 한번 저녁미사를 봉헌하고 나오는데 성당 마당에 낯선 한 사람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잘 몰랐습니다. 좀 있다가 다가오면서 하는 말이 정말 죄송하다고 하면서 지금 자신의 어려운 사정 이야기를 하면서 좀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사 마치고 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이야기를 했지만 별 생각 없이 멀쩡한 사람이 하니 신경을 쓰지 않고 지나간 모양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외면하고 집으로 가다가 순간 조금 전 이 내용이 생각나는 겁니다. 가면서 자꾸 갈등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이 복음 말씀이 제 귀에 맴도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나중에 심판 받을 때 이때 하느님께서 내가 그때 너한테 도움을 요청했는데 나를 외면하고 지나가지 않았느냐 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성당을 되돌아갔습니다. 다행히 주변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먼저 그 시간에 가까운 국밥집으로 모셨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고 일단 가까운 동네 찜찔방으로 모셔드리고 계산해드린 후 헤어졌습니다. 다음날 식사비까지 드리고 왔습니다.

 

어떻게 잘 일이 되시길 빌어드립니다라는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게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저는 제가 이걸 선행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서 언급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이때 집으로 가면서 생각한 게 있었습니다.

 

제가 그나마 하느님을 믿었기에 또 말씀이 어떻게 이 내용이 머리와 가슴에 남아 있어서 아주 보잘것없는 선행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수가 있었던 것은 말씀 덕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착하게 살려면 끊임없이 콩시루에 있는 콩나물에 물을 주듯이 설령 그 물이 다 밑으로 빠져도 콩나물이 언젠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느새 자라는 것처럼 말씀을 보는 그 순간만 뭔가 와 닿아 우리 마음에서 휘발되는 것 같아도 그 기운이 우리의 영혼 어딘가에 스며들어갈 것 같다는 생각을 집을 가면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오늘 한 가지 다른 시각으로 볼 점은 오늘 복음 내용에서 최후의 심판기준을 세상법처럼 몇 조 몇 항 이런 방식의 조문이 있어서 그 조문에 따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흔히들 법 없어도 살아가는 이라는 말처럼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니까 법이 어려워서 법을 몰라 규정을 어겼다는 항변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쉬운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상식적인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역으로 심판 기준의 잣대는 단순 평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단순 평범한 게 왜 어렵냐면 그게 실천 여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누구나 잘 아는 내용이고 틀에 박힌 내용보다는 좀 더 색다른 시각으로 한번 묵상을 해보는 것도 좋을 듯해서 주절주절했습니다만 내용이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사실 오늘은 가장 완벽한 복음 묵상은 다른 군더더기 필요 없이 그냥 복음 그 자체만 읽고 묵상하는 게 가장 완벽한 묵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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