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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독서와 복음 이야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06 조회수1,739 추천수0 반대(0) 신고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사실 어제 제가 일하는 곳에서 나름 묵상하면서 메모를 해 집에서 작성할 때 참고를 하려고 했는데 가방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가방에 없습니다. 다시 새벽에 가기도 좀 그렇고 해서 그냥 다시 새로 곰곰이 묵상을 했습니다.

 

참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게 있습니다. 원래 메모를 했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새로이 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메모해둔 것은 다음에 다시 이 복음이 나올 때 참고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장 큰 핵심은 화해와 회개인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늘 독서와 복음은 각각 좀 색다른 구조로 언급되어 있는 면이 눈에 보입니다. 말씀이 각각 모순이고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듯하지만 역설적으로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시는 면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를 지금부터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에서는 악인과 의인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먼저 독서의 말씀을 언급하기 전에 우선 의인과 악인이라는 이 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시는지요?

 

여기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어야 오늘 복음과 독서의 내용이 잘 이해가 되리라고 봅니다. 사실 하느님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악인과 의인으로 나누는 법과 사람의 입장에서 악인과 의인으로 나누는 시각에서 이 점을 각각 바라봐야만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화답송에도 나오지만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라고 나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죄를 촘촘히 따져서 살피시어 보신다면 어느 누구도 그 죄악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이해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바라보실 때 사실 의인이다, 죄인이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어쩌면 도토리 키재기라는 것입니다. 결국 원론적으로 말을 하자면 누구나 죄인입니다. 다만, 그래도 조금 그 죄악의 정도에 따라 악인과 의인으로 구분을 했을 뿐입니다.

 

우리 사람인 인간도 사람을 바라보는 신앙적인 관점에서 악인과 의인도 죄악의 정도로 편의상 나눌 뿐이지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나 죄인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내용은 오늘 독서의 내용을 깊이 생각하면 그런 답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럼 오늘 독서부터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악인은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산다고 합니다.“의인은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죽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 이후에 나오는 내용에 눈여겨봐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의인은 자기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을 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의인에게는 순전히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를 철저히 물으시겠다는 의도로 말씀을 하십니다. 악인에게는 자신이 저지른 모든 죄악에 대해서는 기억을 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다만 그 조건이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산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악인이라고 해서 완전히 악만 저지른 게 아니고 악인도 정의를 실천하며 살은 부분이 있을 수 있고 또한 나중에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 회개를 하고 선을 실천한 정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의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악인이라도 악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악인이 자신이 걸어가는 악행의 길에서 돌아서 회개를 하는 게 기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단순히 기쁘신 게 아니라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런 거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루카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 앞서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도 보면 이 내용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루카복음 157절에 보면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흡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복음 말씀과 연관지어 묵상하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의인도 살면서 정의를 실천했을 건데 의인에게는 자신이 지은 죄만을 물으시겠다고 하시고, 악인에게는 자신이 저지른 악도 있지만 그 악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돌아서서 정의를 실천하면 그 정의로써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논리로는 당연히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의 생각을 아시니 바로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이 하느님의 이런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고 하시지만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게 공평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논리가 되는지요? 바로 하느님의 논리가 공평한 논리라는 것입니다. 그럼 당연히 지엄하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논리가 공평하다고 말씀하시니 그런 시각에서 이 말씀을 이해를 해야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의인도 의인이지만 악인의 회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하신다고 해석해야 이 말씀이 이해가 될 수가 있다고 봅니다.

 

독서에서 나오는 것처럼 이런 하느님의 정의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하는 인간은 달리 말하면 인간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을 하는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메시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인간 자신 스스로가 무슨 잣대로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자신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이 남들보다 좀 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하느님께서 진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어느 누구 하나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을 거라 굳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 죄인, 의인을 이분법적으로 구분을 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속된 표현이지만 세상말로 틀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결국 오늘 독서의 내용은 회개에 초점을 겨냥해야 이해가 될 수가 있을 거라고 봅니다. 회개를 하는 것은 바로 죄에서 돌아서는 길입니다.

 

죄라는 것을 가톨릭 교리에서 봤을 때는 이런 시각으로 이해를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단절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영역밖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가 나중에 회개를 한 후에 생각난 게 바로 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게 결국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걸 상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 나라에 가는지를 말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개신교 성경에서는 결단코로 표현합니다. 이 말은 절대 어떤 일이 있어도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도 이해가 될 듯, 말 듯합니다. 예수님과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주로 대립각을 세운 사이입니다. 근데 오늘 복음에서는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하니 말입니다. 평소에 예수님께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런 게 아닐까요?

 

물론 계명을 잘 알고 또 계명을 잘 지키려고 하는 생각은 중요하지만 어쩌면 이들은 그게 순수한 뜻이라기보다는 이로 인해 자신들이 더 의롭다고 여기는, 다시 말해 교만의 늪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하는 것에 대해 주의와 경각심을 일깨워주시는 거라고 봅니다.

 

바로 복음에서 세리를 보며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며 그들이 하는 말을 보면 바로 그게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그들이 잘 계명을 지킨다고 생각하고 의식하는 게 남을 무시하는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는 것은 그들은 자신들이 단순히 계명을 알고 지키려고 하는 게 피상적인 모습으로밖에 보여주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지키면서 그런 면을 벗어나 정말 율법 속에 있는 근본정신을 제대로 이해를 해서 그 정신을 실천해야 그게 진정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뜻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도 보면 독서에서처럼 약간 대조를 이루면서 논리가 맞지 않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에 어떤 숨은 의미가 있는지 한번 묵상을 해봤습니다.

 

오늘 복음 마태오 복음 521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나옵니다. 그러다가 22절에 바로 그러나로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라고 하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최종에는 지옥에 간다고 하십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살인한 자가 재판에 넘겨진다고 하셨으면 이런 일은 살인에 비하면 죄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주 경미한 죄라고 할 수가 있는데 오히려 이게 살인보다 더 심한 대가를 치르는 조금 아이러니한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이치적으로 봤을 땐 맞지 않습니다.

 

바로 이 세 가지 내용을 하나로 포괄해서 표현하면 형제를 무시하거나 형제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이해를 해야 할 겁니다. 바로 이런 게 살인죄보다는 현실적으로는 더 경미한 것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살인도 중요한 죄지만 이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 부분을 제가 좀 더 논리적으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저는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라 언어적인 감각으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오늘 복음 22절에 접속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영어나 한국어나 이걸 역접이라고 표현합니다. 보통 우린 이걸 단순히 앞 내용과 반대되는 내용으로만 잘 알고 있습니다. 가령, “동생은 키가 작다. 그러나 나는 키가 크다라는 이런 식으로 보통 사용됩니다. 오늘 독서 24절에 나오는 그러나는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복음 22절에 나오는 그러나는 좀 더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제가 이 부분에 대해 영어 원어민 사전과 한국어 사전을 두고 대조를 해봤습니다. 사실 대조를 하게 된 게 실제 일반적인 역접의 의미로 알면 논리가 맞지 않아서 좀 더 자료를 구체적으로 찾아봤습니다. 중요한 단서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국어와 영어사전에서 공히 공통점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바로 그 점을 이해하면 오늘 이 말씀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영어적인 의미로 볼 때 영어 복음에 나오는 이때 그러나의 의미는 강조와 놀람을 말할 때 문장 앞에 놓여 표현을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국어의 의미에도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도 복음 묵상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았습니다.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앞의 내용을 조건으로 해서 뒤의 내용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위 빨간 글의 내용으로 결론내릴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근거가 됩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그 형제와 화해를 한 후에 예물을 바쳐라고 나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가령, 미사 때 통회의 기도를 할 때 자기의 탓이라고 세 번 두드릴 때라든지, 아니면 자비송을 할 때 그때 자신의 마음속에 무언가 자신도 모르게 형제를 무시하거나 비난을 했다고 하는 게 생각난다면 그런 상태에서는 하느님께서는 너의 예물을 받지 않을 터이니 즉 그런 상태로 나한테 나와봐야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물론 복음에서는 화해를 하여라고 하지만 실제로 하라는 뜻일 수도 있고 또 제 경험으로는 하고는 싶지만 상대가 절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거부의 태도를 취할 때도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용서를 청해야 되는 그런 상황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일 때는 오늘 복음 말씀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될지를 생각해봤습니다.

 

실제로 서로 화해를 하면 좋겠지만 누가 잘못을 했든 상관없이 복음의 의도는 마음으로라도 예물을 바치기 전에 그러니까 만약 미사 때 신부님께서 예물기도를 올리실 때 신부님의 기도에 자신이 형제와의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하느님께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하면서 자신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형제의 마음을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를 하면 하느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을까 하는 것을 묵상해봤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연관지어 묵상해 하나로 압축하면 형제를 마음으로라도 무시하거나 모욕을 주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이니 그게 얼마나 중한죄인지에 대해 심각성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형제를 사랑하는 게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말에도 최고의 효도는 부모님에게 고기반찬으로 봉양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처럼 우리도 이런 마음으로 비록 형제의 허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마음을 생각해서 그 형제의 부족한 부분도 넓은 가슴으로 품을 수 있는 자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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