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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복음 이야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13 조회수1,143 추천수0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은 참 재미있습니다. 예수님의 포도밭 비유는 정말 탁월합니다. 아마 노벨 문학상에 버금가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매일미사 묵상난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께서 아주 깔끔히 정리해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비유와 묵상 해설도 정말 환상적인 콤비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복음 묵상글을 읽고 그 내용만 잘 숙지하셔도 매일미사 책값의 몇 곱절은 벌어신 것과 마찬가지일 겁니다. 묵상글을 적으면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8년이라는 세월을 성당을 다니면서 허송세월을 하며 성당을 다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동안 미사를 봉헌하면서 말씀을 그리 귀중하게 여기지 않아서입니다. 그렇다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것은 아니지만 지금만큼 열심히 말씀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자리를 빌어 원주 교구 신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신부님이 권유하시지 않았더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건데 지금은 힘은 들지만 재미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좀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는 듯합니다. 일단 예수님께서 비유를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신 후에 성경을 인용하십니다. 이 말씀이 자기들을 향해서 한 비유라는 걸 알아차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율법을 잘 알고 있으니 율법으로 한방 날린 것 같습니다.

 

예전에도 이 비유를 많이 봤지만 오늘 드는 생각은 이 부분만 봐도 그냥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게 증명이 되는 듯합니다. 사람 머리로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을까? 또 이런 비유를 성경 말씀을 인용하셔서 바리사이들을 통쾌하게 한방을 날리시는 장면을 보니 제가 간접적으로 통쾌하니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내심 속으로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능욕한 것 같아 마음속에는 분개한 마음이 들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주위에 군중이 있었고 군중들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다고 나오는 말씀으로 봐서는 예수님을 향해 어떤 행동을 취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포도밭 비유는 매일미사에 상세히 나오니 책을 참조하시고요 저는 오늘 이와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성경을 좀 살펴볼까 합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원래 모퉁이돌은 건물의 모퉁이에 놓여 벽을 지탱해주는 큰 주춧돌로서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석 역할을 합니다.

 

이 표현은 실제 시편 11822절에 처음으로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고 도피자의 신세가 되었을 때 하느님의 구원 은총으로 건물의 기초석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역사에 중요한 위치가 되었음을 하느님께 고백할 때 사용한 표현입니다. 바로 오늘 이 표현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셔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표현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죄인으로 몰려 죽으심을 당하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느님으로부터 높이심을 받고 교회의 머리로서 만유의 통치자로 등극하실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는 버린 바 된 돌과 같지만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데는 모퉁이의 머릿돌과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버림받은 돌이 주춧돌이 된다는 말에 우리는 희망을 두어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럴 수가 있습니다.

 

살다보면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인가 하고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겁니다. 우리의 눈에는 버림받은 것처럼 된 것 같지만 나중에 하늘 나라에서 주춧돌이 될지 어느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느님과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이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도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은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막내 아들입니다. 저도 대학시절에 신천지는 아니지만 사이비 종교에 간 적이 있습니다. 본부는 경기도 부천 역곡에 있습니다. 허구한 날 종로 제일은행 앞에서 노방전도를 했던 시절도 있습니다.

 

저는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크게 보면 저는 사이비를 갔기 때문에 성경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처음부터 성경을 접했더라면 그곳에 가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튼 어떻게 성경을 접했고 그곳에 나온 후에 정상적으로 개신교를 다녔고 최종 가톨릭으로 온 것입니다. 물론 중간에 개신교를 다닐 때 한 차례 먼 친척 때문에 잠시 하나님의 교회를 간 적도 있습니다.

 

참으로 저 같은 경우는 독실한 불교집안에서 어렵게 어렵게 구사일생으로 하느님을 믿게 된 경우입니다. 저는 지금 생각해보면 하느님께서 저를 하느님 품으로 인도하시려고 사이비라는 구렁텅이에도 빠트리신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좋지 못한 곳이지만 저는 그곳에 만약 하느님께서 가도록 허락하셨다고 가정한다면 왜 가게 하신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되돌아 보니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걸 알 수가 있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간 게 왜 은총인지 이해가 되지 않으실 겁니다. 그곳에서의 삶이 바로 요셉의 삶과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청년들 사무실이 서울 신촌에 있었습니다. 아무튼 대한민국에 수재들은 그곳에 다 몰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참고로 (저는 전혀 수재가 아닙니다.)

 

그런 곳에서 리드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던 점도 있습니다. 그게 지금 제가 신앙생활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고 하면 이해가 잘 되지 않으실 겁니다. 결국에는 아무튼 하느님께서 제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런지 수렁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것 같습니다.

 

오늘 요셉도 막내입니다. 저는 실제 서울에서 살 때 구체적인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자칫 잘못하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본 이후에 특히 오늘 나오는 요셉을 보면서 가슴 아픈 가정사가 있지만 희망을 가지고 이길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삶이 제 삶과 너무 비슷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요셉이 이룬 모습이 저에겐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가족들이 나의 삶을 이해해 줄 거란 희망이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막내입니다. 저도 막내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다 보니 형들의 미움을 받아 형들이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결국에는 이집트 상인에게 팔려가지만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는 고난의 가시밭길 같은 길을 걷습니다. 이집트의 총리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나중에는 형들과 만나게 되어서도 형들은 겁을 먹고 두려움에 떨지만 형들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바로 요셉은 형들에게 말을 합니다. 당신들의 악도 하느님께서 선으로 이끄셨다고 합니다. 바로 요셉의 삶이 예수님의 삶과도 같습니다.

 

형들의 미움이 바로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배척을 받으신 모습과 같습니다. 또 죽음의 고비가 예수님과 같습니다. 하나 다른 점은 예수님은 죽음을 겪으셨지만 요셉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된 게 저는 상징적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느님의 우편에 위치하신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형제들을 용서한 것은 마치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 세상을 멸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에게 보호자이신 하느님의 영인 성령을 보내주시는 자비를 베푸시는 것과 마치 흡사한 것 같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큰 틀에서 보게 되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요셉과 또 구세주로 이 세상에 구원자로 오셨지만 당신 백성들이 오히려 구세주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악행을 저지른 모습과 형들을 보복하지 않는 요셉으로 인해 형들도 요셉의 말과 사랑에 눈물을 흘리는 형들처럼 예수님께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죽음이 우리의 죄로 인해 돌아가신 걸 뉘우칠 기회를 주셔셨습니다.

 

결국 요셉과 예수님은 버림받은 삶과 같은 고난의 삶이었지만 그 고난 끝에 영광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영광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 자신의 삶이 고달픈 삶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께 봉헌하며 요셉의 영광을 생각하며 어려움을 잘 이겨내며 이 길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여정에서 이 여정 너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팔을 활짝 펴 저희를 반겨주실 거라는 모습을 상상하면 힘이 나실 겁니다. 그러니 고난이 하느님의 감추어진 축복이라고 생각하면 이 길을 끝까지 잘 갈 수가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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