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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복음 이야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14 조회수1,113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돌아온 탕자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누구나가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야기해 주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뻔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으로 한번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복음을 묵상하면서 어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지에 대해 몇 가지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첫째, 왜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요구했을 때 아들의 뜻대로 해 주셨을까? 꾸중이나 야단을 치셔서 따끔하게 혼을 내실 법도 한데도 말입니다.

 

둘째, 오늘 이 복음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지만 회개의 과정 속에서 회개를 어떻게 하는지와 그런 회개를 통해 어떻게 하느님과 화해를 하는지에 대한 과정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셋째, 우리 대부분이 작은아들과 같은 그런 위치에 있을 겁니다. 우리 속에도 큰아들과 같은 모습은 없는지에 대한 성찰입니다. 큰아들은 기껏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는 거에 화가 나 있습니다. 자기는 아버지가 염소 한 마리도 주시지 않았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정말 이런 말을 큰아들이 하면 될까 하는 문제입니다. 큰아들은 지금 기껏 송아지를 보고 있지만 정작 자기는 송아지보다 더 큰 선물을 받고 있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순차적으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왜 아들의 생각을 맨 처음부터 말리지 않으시고 내버려두셨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이건 부모님의 무책임이 아닙니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이 아들을 더 사랑했는지도 모릅니다. 큰아들에 비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아들 그 자체로서 말입니다. 묵상에는 정답이 없다는 원칙에 의해서 제가 나름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제 생각을 전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의도도 가지고 계셨을 겁니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작은아들의 소행은 큰 불효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상황에서 유산을 요구한다는 것은 말입니다. 집을 떠난다는 건 위험요소가 따른다는 걸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허용한 것은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세상말도 있는 것처럼 집에 아버지랑 같이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실제 그걸 세상에 나가서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알 수 있게 하려는 의도도 있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이 복음은 한편으로는 왜 우리가 죄인이라는 건지를 간접적으로 묘사를 해 주십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죄인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고도 생각을 할 수가 있지만 오늘 복음이 말하는 죄인은 하느님의 품을 벗어나는 게 죄라는 걸 알려주는 측면도 있습니다. 실제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죄의 본성을 이런 개념으로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드신 배경이 무엇입니까? 지금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을 보고 투덜거리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드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오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병든 이에게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고 건강한 이에게는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왜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지를 알려주시는 것일 겁니다. 지금부터는 작은아들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회개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몫의 유산을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납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죄가 발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것 자체가 죄의 시작입니다. 그러니 죄를 짓고 방종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도 그럴 겁니다. 물론 성당을 다녀도 죄를 짓게 되지만 성당을 다니다가 냉담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성당에 다닐 때보다 더 마음이나 생각으로 죄를 더 짓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품속에 있어도 죄를 짓는데 그건 당연한 것일 겁니다. 그렇게 방종한 생활을 하다가 바닥까지 내려가게 되어 이제는 생존에 위협이 되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16절에 보면 아무도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고 나옵니다. 돼지들이 먹는 열매로라도 구걸할 수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복음에서는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들었다고 나옵니다. 바닥까지 내려가 보니 이제 아버지의 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복음에는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아버지의 집은 먹을 것이 남아돈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돈다고 했습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품팔이꾼조차도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자기는 아버지의 아들임에도 품팔이꾼들보다도 못한 신세가 된 모습을 보니 자기가 아버지 품안에 있을 때가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후에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후에 아들로서가 아니라 품팔이꾼으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려야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이 이제는 죄인이라는 걸 알고 아버지께 자복하며 용서와 자비를 구하려고 하는 마음을 먹게 됩니다. 마음속에서 회개의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고 나옵니다. 바로 이제 본격적으로 회개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회개라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죄의 방향에서 다시 원래 하느님의 품으로 되돌아가려고 방향을 바꾸는 게 회개의 출발점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저는 여기서 아버지에게로 갔다고 하는 표현에서 이때 아버지가 바로 고해소라고 묵상을 해봅니다. 복음에서는 아들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고 나옵니다. 이때 아버지는 바로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실 거라고 상상을 해봅니다. 하늘이라는 곳은 물리적인 공간인 하늘을 말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누구나가 알고 계시겠죠.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고 그 죄를 뉘우쳐서 성당 고해소를 향해 오고 있는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계실 겁니다. 죄를 지었지만 그래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려고 마음먹고 성당을 향해 오는 모습을 보시면 올 때 어떻게 기쁜 마음으로 오겠습니까? 어찌 하느님의 얼굴을 뵐 수가 있을까 하고 죄를 지은 마음에 하느님 얼굴을 뵐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며 오니 그 마음이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런 마음을 보니 애처롭고 측은하게 여기실 것 같습니다. 그런 자식의 모습을 지켜보시는 부모님이 어디 꼴 좋다이렇게 하실 부모님이 계시겠습니까? 그러니 복음에서는 가엾은 마음이 든다고 나오십니다.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나옵니다. 예전에 어떤 신학자가 말씀하신 걸 봤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로 이 모습이 영적으로 고해소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고해소에서 신부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물론 신부님께 하지만 실제는 하느님께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신부님께서 사죄경을 주십니다. 이 또한 신부님의 입을 통하는 것이지만 하느님께서 용서를 해 주시는 것일 겁니다. 이미 천국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의 수위권이 지금까지 위임되고 위임되어 사제품을 받은 신부님께까지 그 권한이 유임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작은아들이 말을 합니다. 이 기분 이해를 하고도 남습니다. 고해소에서 죄를 고백하는 그 심정 죽을 맛입니다. 이 말에 그 심정이 녹아 있는 듯합니다. 이런 말을 아버지께 말씀드리니 불호령이 떨어질 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종들에게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열어라라고 말을 합니다.

 

저는 마치 이 모습이 고해소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죄를 짓고 고백을 하면 신부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떨 때는 형제님 잘 오셨습니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죄를 지었다고 너무 의기소침하지 말기 바란다고 하시면서 힘을 내라고하십니다. 이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잔치 분위기일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를 해서 아버지 품안으로 돌아오니 기뻐하실 테고 저희는 저희 죄를 용서를 해 주시니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니 홀가분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있으니 그 기분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잔치 분위기랑 얼추 맞을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큰아들의 입장에서 오늘 복음을 한번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모습은 대개 작은아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또한 큰아들의 모습도 있습니다. 한번 같이 묵상을 해보겠습니다.

 

큰아들은 들에 나가 일을 한 후에 집으로 돌아가는데 집에서 흥겨운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싶어 하인에게 묻습니다. 동생이 돌아왔다고 아버지께서 송아지도 잡고 잔치를 벌리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큰아들은 화가 잔뜩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에 아버지께서 큰아들에게 오셔서 타이르십니다.

 

큰아들은 아버지께 하소연을 합니다. 자기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모시면서 아버지의 명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고 말을 합니다. 자기에게는 송아지는켜녕 염소 한 마리도 주신 적이 없다고 하면서 동생은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동생에게 송아지를 잡아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못마땅하다는 뜻으로 원망하는 말을 합니다.

 

저는 이 상황이 마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가 연상이 됩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향해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한 채 자비를 구하는 세리를 보면서 자신은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하면서 자신을 치켜세우며 하느님 앞에 뭔가 드러내려고 의기양양해 하는 바리사이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한 것 같습니다.

 

제가 봤을 때는 큰아들과 아버지의 다음에 이어지는 대화를 보면은 자기는 송아지보다 더 큰 아버지의 선물과 은혜를 받으면서도 그 은혜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 처음에 보시면은 유산을 분배할 때 작은아들은 자기 몫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럼 큰아들도 자기 몫의 유산을 받은 것으로 이해를 해야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눈여겨 봐야 될 게 있습니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에서 내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하신 부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아버지가 재산을 유산으로 분배를 하는 과정에서 모든 재산을 두 아들 몫으로 다 분배를 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요즘도 한번 보시면요 부모가 모든 재산을 다 자식들에게 넘겨주면 큰 낭패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정 부분은 남겨두고 유산을 분배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아버지 몫의 재산이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건 이상한 상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아버지는 큰아들이 자신은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살았다고 하는 말처럼 아버지께서도 그런 큰아들의 일을 모르시겠습니까?

 

결국 그런 아들을 생각하셔서 아버지도 나름 생각해두신 게 바로 아버지 몫의 재산을 큰아들에게 주실 것 같다는 생각을 한번 해보면 큰아들은 자기가 말은 하시지 않았어도 아버지께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지를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또 하나 진정 큰아들의 말처럼 진정으로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들이라면 동생을 봐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생각해서 그런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면요 그렇게라도 해서 동생이 돌아오니 아버지께서 항상 마음속에는 집 나간 동생이 걱정이 돼서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마음 조리고 사셨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드리는 게 진정으로 아버지를 잘 섬기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너는 늘 나와 함께 있다고 하는 표현도 잘 볼 필요가 있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시면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의 품을 벗어난 게 죽음과도 같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니 늘 나와 함께 있다는 그 말씀에는 나의 품속에 있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냐 하는 그런 메시지도 숨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바로 큰아들과의 대화에서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전해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오늘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알려주시는 면도 있지만 또 그 속에 숨은 메시지는 하느님 품 속에서 사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려주시는 뜻도 있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바로 작은아들은 자기가 그걸 체험했으니 정말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절실히 깨달았을 겁니다.

 

복음에는 나오지는 않지만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 겁니다. 나중에 작은아들이 형에게 이야기할 겁니다. 형 정말 집나가 보니 집에 아버지랑 같이 사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하며 말할지도 모릅니다. 형 그거 내가 장담하니 형은 나를 통해서 그냥 공짜로 고생도 하지 않고 배우지 않느냐고 하면서 오히려 자기에게 고마워 해야한다고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외에는 오늘 저와 함께 묵상을 하면서 또 나름 자신만의 묵상을 해보는 시간을 한번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다소 정리가 되지 않은 느낌입니다만 저는 오늘 묵상한 포인트는 다른 각도에서 한번 이 이야기를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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