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12시간을 공들인 사순 제3주일 복음 이야기입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15 조회수1,008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 복음도 너무나도 유명한 복음입니다. 사실 이 복음은 제가 예전에 개신교에서 나름 유명한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가장 인상적인 복음입니다. 우리는 강론을 그렇게 오래 할 수가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상세하게 들을 수가 없습니다. 20년 전에 들은 기억이라 내용은 다 휘발되었지만 그때 제 마음에 남긴 감동의 여운은 지금도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다른 관점에서 복음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의 배경은 시카르라고 하는 야곱의 우물입니다. 시간은 정오 무렵입니다. 우물가에 한 남자가 앉아있습니다. 유대인 남자입니다. 마침 그때 공교롭게도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옵니다. 이 당시에는 중동 지역에는 낯에 햇살이 아주 따갑게 내려않기 때문에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때는 아침이나 저녁에 보통 나오는 게 일반적입니다.

 

근데 이 여인은 한낮에 나옵니다. 그럼 어떻게 아침에 물을 길으러 나오지 못할 사정이 있어서 또 집에 남은 물이 없어 저녁까지 기다릴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그랬을까요? 사실 복음에는 왜 그 시간에 여인이 나왔는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상황 설명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복음을 읽는 사람이 복음의 구조상 예상할 따름입니다.

 

잠시 이후에 이 여인의 특성이 언급되겠지만 먼저 언급하자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만약 제가 가령 목사이거나 사제라면 이 여인의 특성을 설명할 때 박복한 여자라고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이 여인의 삶을 해석하는 기준이 분분합니다. 차차 왜 그렇게 표현하고 싶은지 잠시 후에 언급하겠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나 사마리아 사람 자체를 왜 무시하고 멸시하는지 그 이유는 대부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일단 우물가에서 한 유대인 남자와 어떤 사마리아 여인이 마주하게 됩니다. 근데 이 유대인 남자가 여인에게 청을 하나 합니다.

 

자신이 길을 나서다가 목이 말라 잠시 우물가를 찾은 것입니다. 또 잠시 쉬었다가 목이나 축이고 갈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물을 청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남자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상종을 하지 않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입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깜짝 놀랍니다. 유대 남자를 보면서 어떻게 자신에게 물을 청하는지에 대해 그 까닭을 물어봅니다. 만약에 이 여인이 유대 남자가 자기에게 물을 청하는 게 놀랍기도 하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물을 드렸다면 오늘 복음은 아주 시시한 내용이 될 겁니다.

 

실제 이 여인의 이 물음에서부터 한 낯설은 남자와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여인이 놀란 이유는 이 남자가 먼저 청을 한 것도 한 것이지만 일단 자기에게 말을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이에 남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지금 그대가 내가 누구인지 또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만약 알았더라고 하면 그대가 물을 달라고 하는 나의 청에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유대 남자의 말이 좀 이상하지 않나요? 아무리 유대 남자이지만 자신을 희롱하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여인은 이 남자가 무슨 의미로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두레박도 없고 우물도 깊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니 여인의 입장에서는 얼토당토 안 되는 말을 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자에게 그렇다면 당신은 조상 야곱보다 훌륭한 분이시라고 생각하시느냐고 되묻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걸로 봐서는 이 여인은 요즘 말로 하면 어느 정도 그래도 완전히 막힌 여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도 알 정도이면 말입니다.

 

참 이 남자도 속으로 답답하겠습니다. 물론 물 한잔 얻어 마시려고 하지만 이런저런 연유로 따지는 여인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답답하지만 물 한잔 얻어 마시려고 그렇지 않아도 목이 말라 청하는데 말대꾸를 계속해야 하니 목이 더 타들어갔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전혀 이상한 말은 합니다. 이 물은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그 사람 안에서 솟아오르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고 합니다.

 

이쯤되면 이런 말을 하는 남자의 말로 봐서는 상황적으로 판단을 하면 뭔가 좀 수상한 남자라고 일단 의심을 한번쯤은 해봐야 정상인 여자일 겁니다. 이 남자가 뭔가 나한테 수작을 부리는지 하고 말입니다.

 

근데 이게 왠 일입니까? 그만 이런 남자의 말에 끔뻑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물이 있다면 하고 생각을 했는지 아무튼 좀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이 여자는 정상적인 사람의 지적인 수준이라면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남자라고 하고 그냥 아무리 유대 남자라고 해도 상대를 하지 않아야 했을 상황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그런 물이 있다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러면 자기는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제가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을 예수님이라고 하지 않고 유대 남자라고만 이야기를 하고 전개를 했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신지요? 잠시라도 이렇게 표현을 하면 이 상황에 완전히 몰입을 해야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데 도움이 되시도록 하기 위해 제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과 여인의 이야기를 보면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실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은 마시는 물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구원의 말씀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근데 여인은 마시는 물로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어떤 모습에 홀딱 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주는 무슨 신기한 요술 같은 물도 아닐 건데 한 번 마시고 그것도 영원히 몸속에서 샘처럼 나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영생불사를 주장하는 말을 믿으니 말입니다. 이런 허무맹랑한 말에 빠져도 단단히 빠진 것입니다. 이 여인의 지적 수준이 좀 떨어져서 이런 말에 푹 빠졌을까요? 아니면 그냥 예수님의 어떤 모습 때문에 빠졌을까요? 그 이유를 한번 추론해보겠습니다.

 

상황을 보게 되면 이 여인은 자신의 처지 때문에 그만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는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은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결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지금 요한 복음사가가 의도한 것은 이것이 아닐 겁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말입니다. 제가 서두에 이 여인을 표현할 때 박복한 여인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 연유가 바로 이 대목에서 시작됩니다.

 

이 이후에 여인의 상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 그런 물을 요청을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뜬금없이 갑자기 화제를 바꾸십니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왜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제 실제 예수님이 그냥 이 여인이 처음에 생각했던 그런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시려고 하는 의도였습니다. 이때도 이 여인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잠시 후에 말씀을 드리겠지만 이 여인에게는 아무튼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아픈 상처가 많은 여자입니다. 이 여인을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단 여기서는 이렇게 이해를 하는 게 이 복음을 이해하는데 편할 겁니다.

 

갑자기 남편이라는 말에 자신의 아픈 마음에 돌이 하나 날라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 지금 현재는 어떤 남자랑 살고 있고 이 남자 이전에 다섯이나 되는 남자랑 살았던 여인입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남자관계가 좀 문란한 여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가 있습니다. 저는 좀 다르게 보고 싶습니다.

 

제가 서두에 말씀드렸다시피 박복한 여자라고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이 당시에 살았던 여인의 삶을 한번 들여다보겠습니다. 처음에 이 여인은 어떤 남자랑 결혼을 했을 겁니다. 사별을 했는지 이혼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 당시에는 여자 혼자서 살기 힘든 사회구조였기 때문에 남자랑 결혼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상황이라 또 다른 남자랑 결혼을 했을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섯 번이나 다른 남자와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면 좋은 의미로 봤을 때 박복한 여자라고 생각이 됩니다. 복도 없어도 너무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다섯 명이나 되는 남자랑 살아야 됐으니 말입니다. 중간에 어쩌면 남자가 일찍 죽을 수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한창 더운 정오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을 겁니다.

 

우물가에 오면 다른 여인들과 마주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어떻겠습니까? 주위 여자들이 이 여인을 두고 쑥덕쑥덕 했을 겁니다. 그러니 그런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시간을 택해 나온다는 게 정오였을 겁니다.

 

이런 아픔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라 외간 남자가 아픈 상처를 언급을 하니 애써 외면을 하려고 그냥 남편이 없다고 둘러댑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이런 상황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당연히 하느님이시니 말입니다.

 

남편이 없다는 말에 예수님께서는 대뜸하시는 말씀이 이 여인이 한 말이 맞다고 하십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이 말씀을 들은 이 여인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설마 예수님께서 자신의 과거를 알 수가 없다고 생각을 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시작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여인이 바른대로 이야기했다고 하십니다. 이 상황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까무러치게 놀랐을 겁니다. 이에 복음에서는 예언자이신가요? 하고 좋게 표현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여인의 상태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 여인에게 이런 방법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시고 싶었던 것일 겁니다. 그렇게 유도하시기 위해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뜬금없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럼 다시 조금 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게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 이해가 되실 거라고 봅니다. 바로 이 여인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예수님께 뭔가 세속적인 의미에서 빠진 게 아니라 지금 이 여인은 자기의 삶이 박복하고 다른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가며 살아가는 처지이기 때문에 우물가로 나오는 게 죽기보다 싫었을 겁니다.

 

그러니 만약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물이 있다면 물을 길으러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그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 보니 그만 그 물을 청했던 것이지 않을까요? 이런 상황만을 놓고 봐도 이 여인의 삶이 오죽이나 절박하고 피폐했으면 그랬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말은 하지만 자신의 상처를 애써 외면하려고 말을 또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예배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니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여인으로 판단됩니다. 이 말과 앞에 이 여인이 한 말을 놓고 판단을 했을 때 제가 모지란 여자가 아니라고 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야곱의 우물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하면 어느 정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성경을 조금은 안다고 유추할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여인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 이야기인데 이게 어쩌면이 아니라 이 여인에게서 이 말이 나오기를 예수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고 하십니다. 바로 지금이 그때라고 하십니다. 실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릴 사람을 찾으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영이시니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우회해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의 하이라이트를 향해 달리고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 여인에게 물을 청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 여인과 저희에게 알려주시는 대목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시니 여인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야가 오신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고 어느 정도는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대가 알고 있고 또 기다리는 그 메시야가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은 아무튼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몇 번을 놀라는 상황입니다. 이건 정말 놀랄 정도가 아니고 뒤로 나자빠질 정도입니다.

 

어떻게 자신과 같은 박복한 여자에게 메시야가 나타날 수가 있는지 상상이나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때 이 여인은 얼마나 놀랐는지 그만 자기가 꺼려하고 만나고 싶지 않은 동네 사람들에게 그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걸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흥분된 목소리로 왜쳤을 겁니다.

 

잠시 또 한번 정리를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요즘 전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미사가 중단된 그런 상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우린 어쩌면 이런 초유의 상태에서 진정 저 자신을 포함해 그동안 믿음 생활을 하면서 미사를 봉헌할 때 습관적으로 그냥 관성적으로 미사를 봉헌하지는 않았는지를 점검하는 시간을 가지고 냉철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이 시간은 국가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매우 안타까운 현실임에는 틀리없는 시간이지만 어쩌면 이왕 이리된 상황을 되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라 이를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에게 하시는 말씀을 저희에게 지금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를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22절에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는 말씀을 귀 기울여 마음에 새겨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를 하고 싶습니다. 지금 너희는 미사를 하느님께 봉헌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제대로 하느님을 영과 진리 안에서 미사를 봉헌하는지 하고 저희에게 되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아마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 아니 극소수의 신자를 제외하고 이 물음에 자유로울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진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영과 진리 안에서 드려야 하는 예배라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면 말입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한다면 오금이 저릴 정도의 말씀입니다. 저부터서도 이번 기회를 통해서 미사가 얼마나 중요하고 평소 미사를 열심히 드렸다고 하더라도 진정 생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미사를 봉헌하라고 하시는 성인들의 말씀처럼 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느냐고 자문한다면 과연 한 번이라도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참담한 심정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이 아주 깁니다. 일단 오늘은 이 정도 선에서 이야기를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다시 잠시 되돌아가겠습니다.

 

서두에 제가 이 복음을 다른 관점에서 한번 묵상해보고자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실제 분량만 아니라면 여러 관점에서 볼 수가 있겠지만 일단 두 가지 측면만 오늘은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우물가에 앉아계신 예수님이 상징하는 의미가 저는 바로 성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이 여인이 예수님을 뵈었을 때 한 유대 남자로 봤을 것이고 그 다음엔 이야기를 하면서 선생님 즉 랍비 정도로 인식을 하다가 예언자로 점차 범위가 확대되면서 나중에는 그리스도로 인식하는 내용을 알려줍니다. 이건 국어적인 의미로 보면 학창 시절에 배우는 수사법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점층법과 아주 흡사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이렇게 표현을 한 이유가 이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서 점점 예수님의 대화에 빨려들어가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하려고 했을 겁니다. 여기서는 대화이지만 우리가 이 말을 다르게 표현을 하자면 마치 조금 전에 우물가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성경이라고 비유를 하였듯이 예수님이 여인과 나누는 말씀이 바로 성경 말씀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 여인이 나중에는 급기야 예수님과의 대화를 나누면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걸 인식하게 된 내용을 가지고 추론한다면 결국 우리도 성경 말씀을 통해 이 여인이 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성경을 통해 만날 수가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야 여인에게 주고 싶은 물은 바로 구원의 샘물 같은 하느님의 말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먹어도, 먹어도 갈증이 나지 않는 게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샘이 되기만 하면 된다고 하십니다. 근데 이 샘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해 준다고 하십니다. 결국은 말씀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539절에 보면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고 나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말씀을 사모하는 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 하나의 방법임을 알려주시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단순히 성경을 연구하는 자체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성경을 알아서는 구원과는 거리가 멀 겁니다.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게 영원한 생명일 겁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행복의 파랑새를 쫒으려고 사람들은 달려가지만 실제 행복의 파랑새는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고 하는 말처럼 우리도 영원한 생명은 먼 미지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씀 속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말씀 속에 예수님이 계시고 말씀 속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말을 합니다. 백성들은 지금 지도자 모세를 향해 불평을 합니다. 왜 자기들을 이집트에 그냥 가만 내버려두었으면 좋았을 건데 나오게 하여 이 고생을 시키느냐 하면서 원망 섞인 소리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도 답답한 노릇일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느냐고 부르짖습니다. 백성들이 자기에게 돌을 던질 것 같다고 하면서 위협을 느끼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자기 손에 지팡이를 들고 호렙의 바위를 지팡이로 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지팡이는 탈출기 142절 이하를 보면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하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지팡이로 바위를 치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바위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여기서 바위는 구원을 상징합니다. 시편 8926절 과 95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3218절 이하를 보면 너희는 너희를 낳으신 바위를 무시하고 너희를 세상에 내신 하느님을 잊어버렸다고 나옵니다. 바로 하느님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표현인 바위를 지팡이로 치라는 건 화답송을 보면 좀 더 이해를 잘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구원의 바위 앞에 환성을 올리세라고 나옵니다. 바로 이 환성 소리가 바로 구원의 바위를 상징하는 하느님을 향해 울부짖는 모세의 간절한 마음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그 바위에서 물이 터져나와 백성이 그 물을 마실 수가 있을 거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물은 실제 생명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런 물이지만 실제 영적으로는 그 물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샘물처럼 솟아나오는 영원한 생명수인 구원의 생수를 상징할 거라고 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을 합니다.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고 합니다.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고 합니다. 쭉 뒤의 내용을 봐도 나의 말을 들으면 영원한 계약을 맺은 자애가 변치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젖은 무슨 젖일까요? 아마도 말씀일 겁니다. 베드로 사도께서도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 전서 123절 이하에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썪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는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2장으로 넘어가면서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 젖으로 자라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로써 영적인 집을 짓는 데에 쓰임을 입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인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어달라고 하시며 9절에서는 그로 인해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에 녹아들어 그만 자신의 아프고 어두운 과거에서 나와 자신의 물둥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 자신이 두렵게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려주는 놀라운 역사가 벌어지는 것과 같은 복음 선포자로 거듭남을 보여주는 것처럼 말씀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제 돌아온 탕자 복음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어제 복음도 제가 우리가 아는 그런 일반적인 복음 내용을 탈피해서 한번 살펴보자고 말씀드리면서 어제 복음도 결국은 하느님의 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드렸고 오늘 복음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가슴 아픈 박복하고 기구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도 하나의 희망의 등불이 될 수가 있다는 걸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결국 이런 희망도 사마리아 여인에게만 있을 수 있는 게 아닐 겁니다. 마음의 문만 열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이 여인처럼 우리고 그런 축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