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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03.19)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19 조회수1,576 추천수8 반대(0) 신고

 


2020년 3월 19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제1독서 2사무 7,4-5ㄴ.12-14ㄱ.16

그 무렵 4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3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제2독서 로마 4,13.16-18.22

형제 여러분, 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

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것입니다.

복음 마태 1,16.18-21.24ㄱ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두 눈이 모두 잘 보이던 사람이

어느 날 사고가 나서 한쪽 눈을

못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한쪽 눈을 못 보게 된 것을

행복하다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불행하다고 생각할까요?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어떠할까요?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각막

기증자가 나타나서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행복하다고 생각할까요?

불행하다고 생각할까요?
똑같이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지만,

누구는 불행하다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구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결국, 행복과 불행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조건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행복을 만드는 ‘나’를 보지

 못하고 남 탓, 환경 탓, 주님 탓을

 외치면서 행복하지 못한 ‘나’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나’는

누가 통제를 할 수가 있을까요?

당연히 ‘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행복도 내가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주님 탓, 남 탓, 환경 탓 등 외부에서

그 이유를 찾다가는 화만 나고

 절망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내가 어떤 행

동을 해야 할지를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외적인 조건들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만의 행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남편인 동시에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요셉 성인 대축일인 오늘,

요셉 성인에 대해 묵상을 해 봅니다.

성모님과 약혼한 뒤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에게 큰 혼란을 주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아직 같이 살기도 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또 꿈에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하라는 천사의 명령을 들었을 때,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사건은 보통 사람들이

 평생을 통해서도 겪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성경에 요셉을 의로운 사람으로 나오듯이,

율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 상황에 고뇌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불행하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요셉 성인은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합니다. 불행의 이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행복의 상황으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곁에서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로 계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의 이유는

분명히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의 이유만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행복을 만드는 ‘나’를 바라보는 데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는

나와 뜻을 같이할 사람이 한둘은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공기를 호흡하는 데는

들 창문 하나로도 족하다(로망롤랑)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많은 판단을 다른 사람을 향해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 ‘너는 틀렸다’라는

생각으로 상대를 무시하고

때로는 상대를 향해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만큼

세상에서 가장 잘 ‘나’를

우리 각자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완벽한 모습도 아니고 끊임없는

실수를 반복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잘나지도, 어쩌면 가장

못났으면서도 자기 잘난 멋에

사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자기 자신을

비하하며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감을 놓아버리고 수동적으로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잘난

‘나’이듯, 남들도 자기

관점에서는 잘난 ‘나’라는 것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못 한다.’

라고 말하면서 뒤로만 물러서는

것이 겸손은 절대 아닙니다.
내가 나에게 소중하듯,

남 역시 자신에게 소중함을

인정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며,

나를 더욱더 건강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길입니다.

(요셉 성인과 예수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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