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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4주일 복음 이야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22 조회수1,175 추천수0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은 일반 보통 주일 복음보다 상당히 긴 복음입니다. 내용은 아주 간단한 내용입니다. 바로 눈먼 장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떠 앞을 볼 수가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예수님의 기적만을 보면 되지 않을 겁니다.

 

오늘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많은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하려고만 한다면 오늘 복음에는 엄청 숨은 뜻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 이 자료들을 보니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복잡했습니다. 이 부분은 다시 제가 한번 오늘 주일 저녁에 정리를 한번 해서 올려드리겠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말씀의 보고는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역시 복음 묵상에는 정답이 없다는 원칙 아래 약간 색다른 방식으로 접근을 해서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사람이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암담할 것입니다. 선천적인 장애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수가 있고 또 후천적인 장애로 앞을 못 볼 수가 있습니다. 이건 원래 장애로 인해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건네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이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는 눈뜬장님이 되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을 향하여 던지는 말씀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면서 태생 소경을 만납니다. 복음에서는 1절에 보셨다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본다는 의미의 본다입니다. 근데 실제 헬라어 성경에서 이건 본다의 의미보다는 인지하다의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된다고 합니다.

 

사실 영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왜 이 내용을 언급하느냐면요 여기서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아주 중요한 단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장을 보면 한결 복음 이해가 수월할 것 같습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계셨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말씀인 하느님으로부터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는데 그 생명이 바로 사람들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요한이라는 사람을 보냈는데 이는 빛이신 하느님을 증언하여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빛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그 빛으로 생겨났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요한사가는 말을 합니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오늘 복음을 한번 보겠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예수님께서 소경을 길을 가시다가 길에서 마주쳤다는 그런 의미보다는 인지하시고 소경에게 찾아가셨다는 데에 초점을 두어야 오늘 복음이 잘 연결된다고 봅니다.

 

눈먼 이는 눈이 멀어서 앞에 예수님께서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께 자기 눈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는 내용이 복음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치유를 해 주셨다는 건 예수님께서 먼저 이 눈먼 사람에게 다가가셨다는 걸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들은 눈먼 사람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아마도 요한복음사가의 의도일 겁니다.

 

눈이 먼 게 누구의 죄 때문에 그런지 하고 말입니다. 본인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인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게 누구의 죄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그 눈먼 사람을 통해 드러나게 하려고 눈이 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신 분의 일을 낮에 하셔야 한다고 하십니다. 바로 낮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밤은 예수님의 수난을 상징하는 의미입니다. 1장에서도 나오지만 오늘 복음 5절에 나는 세상에 있는 동안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고 나신 후에 바로 6절의 내용을 보게 되면 본격적으로 소경에게 다가가셔서 진흙을 사람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고 일러주십니다.

 

예레미야 3822절에 보면 진흙이 나오는데 이건 고통을 상징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저는 이 진흙을 독특하게 묵상하고자 합니다. 바로 고통의 십자가로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십자가로 묵상을 하면 예수님께서 왜 소경에게 진흙을 바르신지 이유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왜 그런지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태로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고 하십니다. 이 소경은 결국은 실로암 못에 가서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신 대로 해서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잘 한번 보세요. 그럼.

 

지금 소경은 그렇지 않아도 앞이 보이지 않는데 실로암까지 가서 나으리라는 희망보다는 그 거리를 가는 게 더 힘들 수가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좀 속된 말이 있습니다. 똑 같은 행동을 해도 만약 병신처럼 취급받는 사람이 하면 병신육갑한다고 합니다. 이 말을 한번 생각해보면 이때 이 소경의 마음이 어떨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눈도 멀은 상황인데다가 또 그렇다고 부유한 사람도 아닙니다. 거지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까지 간다든 게 쉬은 일은 아닐 겁니다.

 

어차피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이 자기의 그런 모습을 보고 조롱할 것 같다는 걸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눈을 뜬다는 희망보다는 그곳까지 가는 과정이 어쩌면 더 큰 고통스럽고 두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실로암까지 가는 그 고통의 길이 여기서 상징하는 의미가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에 나옵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이 되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빛이 되시어 하느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의미입니다. ‘실로암의 의미가 말입니다.

 

복음에서는 실로암에서 씻어 나았다고는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상징하는 의미로 봐서는 물로 씻었다는 의미보다는 말씀이 빛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서 나았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일단 실로암까지 가라고 해서 갔으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랐다는 걸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소경이 나은 것은 실로암 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명했기에 나을 수가 있었다는 게 더 설득력 있는 내용일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조금 전에 소경에게 예수님께서 발라주신 흙을 예례미야서 3822절에 나오는 의미로 볼 때 고통을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흙은 소경이 실로암까지 걸어가면서 남의 조롱과 멸시를 받게 될지도 모를 두려움이라는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저는 묵상을 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걸 하시지 않고도 얼마든지 복음에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의 종이 앓아누워 있는 그 종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할 때 말씀으로 치유하실 수가 있기 때문에 굳이 가실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극찬을 하신 것처럼 충분히 그렇게 하시고도 남을 분이신데 그렇게 하신 연유를 묵상해본다면 고난의 길을 순명하고 가는 십자가의 길이 영광의 길이라는 걸 알려주십니다. 누구나 그렇게 해야 실로암이 상징하는 예수님을 다시 말해 빛으로 좌정하시는 하느님을 보게 되면 하느님의 빛으로 자신의 눈이 멀은 암흑의 세상에서 광명의 세상으로 나올 수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정작 눈먼 사람은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근데 이웃사람들은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 내용은 오늘 복음 마지막 부분에 바리사이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게 보지 못하는 이들을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하신 의미와 일맥상통합니다. 이웃사람들은 눈먼 거지가 눈을 뜬 게 신기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궁금해 묻기도 합니다.

 

나중에는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갑니다. 바리사이들은 이 일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하신 것이라 어떻게 해서든지 꼬투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낫게 되었는지 묻고 나서 그가 대답하자 바리사이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것과 또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가 있는지 하고 말입니다.

 

아무튼 부모를 동원해서라도 꼬투리를 잡고 싶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은 많이 있지만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결론을 내는 방향으로 가보겠습니다.

 

32절에서 보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자신이 눈을 뜰 수가 있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런 말에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답변을 듣기는 고사하고 자신들을 무시하는 말을 하는 것처럼 느끼니 발끈 화를 내며 소경을 밖으로 내쫒아 버립니다.

 

이때 35절에 예수님께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후에 소경을 만나게 됩니다. 이건 세상으로부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에는 이런 고난이 따른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신 후에 예수님께서 소경을 만나셨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건 예수님을 따라 가는 길에서 믿음 때문에 받는 고난이 있다면 그 고난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셨지만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하는 말씀을 끝으로 묵상하면서 맨 마지막 말씀 우리는 잘 본다.’ 하는 말을 바리사이들이 하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를 잠시 생각해보며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잘 본다고는 하지만 이때 본다의 의미가 그냥 우리가 눈으로 뭔가를 보는 의미의 본다라는 의미보다는 복음에서 의미하는 건 예수님을 알아보는 의미에서 본다가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음에 예수님께서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시는 말씀으로 보면 이런 뜻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너희는 눈을 뜨고 뭔가를 잘 본다고는 하지만 실제 눈뜬장님처럼 나를 보고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니 너희들의 죄가 완악해서 이 세상에 빛으로, 말씀으로 오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질타하시는 표현으로 저는 묵상을 해봤습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여러 측면에서 바라보며 여러 시각으로 묵상을 할 수가 있겠지만 소경이 실로암까지 가는 그 여정이 우리가 예수님께서 내 뒤를 따르려면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처럼 실로암에 소경이 가는 그 길 끝에 예수님이 계셨고 또 그렇게 가야 이 암흑과 같은 세상에서 죄의 구덩이에 빠져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가 있는데 예수님께 가야만이 우리의 죄가 씻김을 받아 예수님을 진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이 열려야 진정 영적인 장님이 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는 영적인 장님이 아닌지 오늘 하루 묵상해보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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