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4주간 토요일 복음(요한7,40~5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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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20-03-27 | 조회수1,343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사순 제4주간 토요일 복음(요한7,40~53)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 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요?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49~52)
예수님께 대해 약간의 호의적인 반응이라도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 질책하던(요한7,47) 바리사이들은 이제 그들을 율법도 모르는 자로 매도하며 저주까지 퍼붓고 있다. 여기서 '저 군중'에 해당하는 '호 오클로스 후토스'(ho ochlos houtos; this people)는 랍비 문학에 나오는 '암 하아레츠'(am haarets), 곧 '땅의 백성'과 동일한 뜻이다.
랍비들의 규범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과 관련하여 6가지 사실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증거를 위임하거나 취하지 말 것, 그들에게 비밀을 말하지 말 것, 그들을 고아의 보호자로 삼지 말 것, 그들에게 자선비의 관리를 맡기지 말 것, 일체의 매매 행위와 친교를 하지 말 것을 규정한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저주받은 무리로 여겼다. 이것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독선적인 우월감과 아집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요한복음 7장 50절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에서 '말하였다'로 번역된 '레게이'(legei; asked)는 '레고'(lego)의 3인칭 단수 현재 시제로서 그의 등장이 극적이었음을 나타낸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7장 45절의 '돌아오자', '물었다' 그리고 7장 46절의 '대답하자'가 모두 부정 과거형으로 나오는 반면에, 여기 '말하였다'만 현재형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니코데모의 말이 당국자들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며, 그 어조가 매우 적극적이고 반복적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레고'(lego)라는 단어는 독자들로 하여금 니코데모가 말했다는 사실보다는 그 말의 내용에 관심을 집중하게 한다. '그들'에 해당하는 '아우투스'(autous; them)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루카18,9)을 가리킨다.
니코데모는 무조건 예수님께 대해 적대적으로 대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가 옳지 못하다고 판단했기에, 용기를 내어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니코데모는 불의를 보고서도 자신에게 돌아올 이해 득실을 따져서 가만히 침묵하는 그런 자는 아니었다.
한편 요한복음 7장 51절에서 니코데모는 율법이 사람을 판결하는 원칙을 당국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니코데모가 여기서 변호하고 있는 대상인 '그 사람'에 해당하는 '톤 안트로폰' (ton anthropon; the man)은 'a man'이나 'the man'으로 영역된다. 'a man'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반면에, 'the man'은 그 대상이 예수님께 국한된다는 차이가 있다.
여기서 니코데모는 산헤드린 최고 의회가 이미 논의를 마친, 예수님을 제거하는 문제에 대해 항의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the man'이 옳은 것 같다. 또한 '심판하게'에 해당하는 '크리네이'(krinei; judge; condemn)는 '판결하다', '단죄하다', '언도하다', '처벌하다' 등의 포괄적 의미를 지니는 법적 술어로 쓰였다.
니코데모는 여기서 율법이 판결하는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는 말을 들어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행위(하는 일)을 알아보는 것이다.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는 먼저 당사자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며, '하는 일을 알아보고'는 그가 무엇을 행하였는지 확인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아'로 번역된 '그노'(gno; know)는 '기노스코'(ginosko)의 부정 과거 가정법인데, 이 동사는 관찰과 경험에 의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관찰이라는 확인 절차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니코데모가 지적한 것이다. 율법에 정통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당연히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겠지만, 이미 편견과 선입견 속에 사로잡혀 판단력을 상실한 그들에게 그의 제안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끝으로, 요한복음 7장 52절의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라는 질문은 이미 니코데모가 갈릴래아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지만, 동시에 니코데모를 예수님을 지지하는 무리와 동등하게 취급하여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들은 진실을 말했던 니코데모를 무시해 버리고, 예수님을 변호하려는 그의 입을 막아 버리고 있다.
여기서 '예언자'를 나타내는 '프로페테스'(prophetes; prophet)에는 정관사 '호'(ho; the)가 붙어 있지 않다. 이것은 메시야와 동일시되는 신명기 18장 15절에 나오는 '나와(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의 예언자를 모두 통칭하는 것이다. 즉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야를 포함하여 그 어떤 예언자도 갈릴래아에서 나올 수 없다고 단정한 것이다.
하지만 예언자 요나, 호세아, 나훔이 갈릴래아 출신이고, 아모스와 엘리야 및 엘리사도 갈릴래아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열왕14,25참조). 그러나 당시 바리사이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할 정도로 지독한 지역적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 잡혀 있었기에, 진리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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