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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대축일 아침에 복음을 묵상하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12 조회수1,862 추천수0 반대(0) 신고

 

부활 성야를 기점으로 해서 전례라는 시간에 따른 관점에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부활로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보면 부활성야미사를 봉헌하면 서로 부활 축하합니다인사를 합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전 이 인사가 개종한 후에 들었을 때 좀 이상했습니다. 물론 이 인사의 의미를 모르진 않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런 인사말처럼 부활을 하였는지 자문해봐야 합니다.

 

지금도 그런 풍토가 있겠지만 예전에 보면 고등학교가 서로 자신의 학교의 명예를 상징하는 수단이 서울대 입학생을 많이 배출하는 기준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요즘도 암암리 존재할 겁니다. 소위 말해서 스카이 말입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남이 서울대 가는 기준으로 그 고등학교를 명문으로 인정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정작 본인 자신이 가거나 자신의 자녀가 가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예가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남의 부활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먼저 부활해야 합니다. 저는 언젠가부터 이 부분에 대해 한번 고민해봤습니다. 좋은 의미의 인사이지만 진짜 미사 봉헌 한 번으로 예수님 부활의 기쁨은 함께 누릴 수가 있지만 자신이 정말 영적으로 부활했다고 말할 수가 있는지 말입니다.

 

저는 약으로 말하면 남용과 오용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리 병을 치유하는 약도 정량을 준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잘못 사용하면 역효과가 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부활은 정말 기쁜 것입니다. 진짜 부활의 조건으로 자신이 부활했다는 느낌이 있을 때 그때 영적으로 주는 기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쁠 겁니다. 이와 관련해서 복음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부활 대축일 복음 내용이 성야 복음과 몇몇 내용이 상이한 것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어제 복음과 다른 면에 초점을 두고 제1독서와 2독서로 그 질문에 대해 해답을 한번 찾고자 합니다.

 

막델라나 여인은 오늘날 시간 기준으로 주일 이른 아침에 그것도 완전히 밝지 않은 날에 예수님의 무덤을 가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무슨 이유로 갔을까요? 저는 그리움 때문에 갔다고 한번 상상을 하려고 합니다. 이와는 다른 것이지만 이 복음을 묵상하면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이제 선친이 돌아가신 지 20년이 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정말 괴로웠습니다. 하루는 너무나 아버지가 생각나서 서울에서 바로 출발해 경상남도 진주에 있는 아버지 산소를 갔습니다. 시골 도로가에 차를 주차하고 산에 올라갈 무렵에는 해가 진 상태였습니다. 올라갈 때는 시야가 보일 정도였습니다. 산소에 가서 인사를 하고 내려오는데 앞이 어둑어둑해졌습니다.

 

마산에 어머니한테 가려고 하다가 고향에 당숙모님이 살아계십니다.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이분이 어머니랑 세상적으로 연세는 같지만 촌수로는 형님입니다. 제가 세상에 나올 때 저를 받아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당숙모는 저를 남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냥 서울로 올라갈까도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한테 가면 어머니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도 울적한 상태로 운전하는 것도 그렇고 해서 그냥 당숙모님께 갔습니다. 인사를 하니 당숙모님이 왜 왔냐고 해서 아버지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아서 내려왔다고 하니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작년에도 어머니 산소를 어버이날에 갔습니다. 당숙모님이 마을 경로당에 있어서 인사를 드리니 왜 왔냐고 하시면 어버이날이라 어머니 생각에 왔다고 하면 와야 엄마가 왔냐고 인사를 하냐, 가면 간다고 인사를 하냐 하시면서 인제 잊어라.”고 하십니다.

 

20년 전 그날 처음으로 당숙모님 곁에서 자고 왔습니다. 당숙모님이 그만 자고 가라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묵상을 하면서 너무 삼천포로 간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모르지만 이런 마음으로 막달레나도 갔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봅니다. 그간 복음에 나오는 막달레나의 성향을 보면 그리 짐작을 해도 무리는 되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셨을 때는 어땠는지 몰라도 막상 돌아가신 후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 같아 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마태오가 전한 것과는 달리 요한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막달레나 여인의 마음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를 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베드로 제자와 자신(요한 복음사가)에게 전했다고 표현을 합니다. 예수님께 가보니 돌이 치워져 있었고 오늘 복음에서 보면 확인을 했다고는 나오지는 않지만 단순히 돌만 치워졌다고 해서 예수님이 안 계신다고 단정하고 제자들에게 알려주려고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게 추론하면 일단 동굴 안을 확인했다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이때의 막달레나의 모습이 우리 자신이라고 가정해보고 싶습니다. 먼저 몹시 놀라웠을 겁니다. 예수님이 안 계신다는 사실에서 말입니다.

 

그다음 약간 진정을 한 후에 생각을 해봤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평소에 하신 말씀처럼 믿음이 정말 강했다면 부활을 하신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여야 하는 게 순서일 텐데 부활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금 목격한 상황을 제자들에게 전한 말 누군가가 예수님을 꺼내 갔다.”고 전한 말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일단 여기서 잠시 묵상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한번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하셨습니다. 부활을 하셨다고 믿을 수 있는 경우의 수와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강취해갔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그런 믿음을 가지지 못했을까요?

 

보통 보면 여자가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보다 신심이 더 많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오늘 복음 9절에서도 약간의 힌트가 있지 않을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표현은 같지만 예루살렘 영어 성경에서 오늘 복음을 다 찾아봤습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예루살렘 바이블에서는 아직이라는 표현보다는 여전히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참조를 한 것은 복음 8절의 끝과 9절이 한글 성경만으로는 논리가 분명하지 않아서 참조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부활을 여러 차례 언급을 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땐 귓등으로 들었다고 하더라도 왜냐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을 행하시기는 했지만 막상 그게 자신들이 피부로 와 닿지 않았을 겁니다. 그땐 그렇게 생각을 했다고 하더라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이 믿기 힘든 사실이라고는 하지만 성경을 기초로 한 절대적인 말씀을 신뢰를 했더라면 그때 상황에서 막달레나가 취해야 할 조치는 바로 예수님께서 성경에서도 나오지만 또 평상시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부활을 하셨다고 하는 생각으로 기울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추론을 한다면 성경에 말하는 믿음은 말씀에서 나온다는 그 말씀이 더 와 닿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럴 수도 있지만 저는 오늘 이 관점 외에 1독서와 2독서에서도 해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1독서를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이때의 베드로 상황은 자신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으로 가는 최고의 절정에 이르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하고 배신한 인물이었습니다. 나중에 회개를 한 후에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확신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오늘 1독서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때 베드로 상태는 성령을 체험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성령은 또 다른 하느님이시고 또 다른 예수님이십니다. 성령 체험의 힘인 성령의 힘으로 이젠 자신 있게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1독서에 나오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에 앞서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기적을 행하실 것 같으면 왜 죽음의 길을 피하지 않으셨을까요? 죽으셔도 3일 후면 다시 사실 거라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아니실 겁니다. 바로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실 겁니다.

 

저희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나자로가 다시 살아난 부활과는 다른 것이라고 가톨릭 교리서에 나옵니다. 나자로는 다시 살아났어도 다시 죽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나자로의 부활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주신 것일 수가 있습니다. 바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이런 희망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경고의 메시지도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1독서에도 나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부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되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심판관이 되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걸 단순히 증언하는 수준을 넘어서 선포하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선포는 강력한 효력을 가진다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1독서를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죽으면 죽음 그자체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것이고 히브리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고 그 뒤에 반드시 심판이 따른다는 말씀과 함께 생각해보면 우리가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심판이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두려운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사랑과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에겐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흥분되는 일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바로 자신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이렇게 자신의 모습이 성령을 체험했든지 무엇을 체험했든지 자신이 변화가 되어야 부활의 삶을 산다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달리 말하면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할 수가 있다는 반증이 될 수가 있습니다.

 

부활의 삶이 어떤 것인지는 무수히 많을 겁니다. 오늘 2독서를 바탕으로 한번 묵상해보겠습니다. 독서의 내용이 짧지만 어쩌면 부활의 핵심이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려면 바로 위에 있는 것 천상의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했다는 것은 과거 우리의 악습이라든지 그런 게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게 죽고 없어져야만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속에서 보호를 받을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천상의 것을 추구할 수가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삶의 결과는 바로 2독서에 나옵니다. 예수님과 함께 저희도 그 영광을 누릴 수가 있다고 합니다. 결국 진정한 부활은 자신이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변화가 되지 않으면 진정한 부활을 한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누군가가 부활 축하한다는 인사말을 건네주신다면 마냥 좋다고 덥석 받을 게 아니고 진짜 자신이 최소한 변화가 되도록 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살 준비 정도는 되어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부활이라는 신성한 의미를 오남용하는 결과를 가질 수가 있는 오류에 빠질 위험에 처할 수가 있을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그 기쁨을 누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부활도 중요하지만 정작 자신이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일일 겁니다. 이 세상에서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의 다음 생에서 제대로 부활의 삶을 살 거라는 기대는 어쩌면 허황된 생각일 수가 있을 겁니다. 오늘 하루 정말 부활신앙을 가지고 사는 우리에게 예수님 부활대축일을 지내면서 진정한 부활의 삶이 무엇일지를 묵상하며 은혜롭게 부활축일을 지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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