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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복음 이야기(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13 조회수1,176 추천수1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없어진 사실을 알리기 위해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간 사이에 경비병들이 수석사제들에게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습니다.

 

경비병은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경비병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때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행동이 당대 지배층이었지만 지배층만으로 볼 게 아니라 인간 군상의 한 단면을 볼 수가 있어서 이런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마음 내면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경비병들이 소식을 전해왔을 때 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저는 수석사제가 복음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속으로는 인지했을 겁니다. 제가 인정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인지라고 했습니다. 이 표현은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인 것 같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인지를 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실제로 누가 만약에 예수님을 강취해갔다고 한다면 자기들이 예수님을 훔쳐 갔다고 모의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없는 사실을 굳이 모의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 사람들은 모의를 한 것일까요? 말 그대로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자기들의 입지가 좁혀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그들이 죽인 이유는 신성모독입니다. 결국 자기들이 주장한 신성모독이 허구의 사실이라는 게 증명이 될 위기에 처해지자 사전에 일을 꾸미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게 세상에서 사용되는 권모술수가 일어납니다.

 

빌라도의 귀에 이런 사실이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으니 경비병들의 입막음용으로 돈을 사용합니다. 이런 사실을 보더라도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모습을 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제 같았으면 설사 그땐 죄악이 눈에 가려서 예수님의 신성을 몰라봤다고 하더라도 지금이라도 그런 게 사실이라면 인정을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인간의 모습이 무섭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에 견주어서 한번 묵상을 해보면 믿음 생활에서 이와는 같지 않아도 이와 비슷한 권모술수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 대가는 나중에 하느님 심판대에서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공정한 판정이 이루어질 겁니다.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느님을 부정한 세력은 하느님을 인정을 하게 되면 자기의 역할을 다할 수가 없기 때문에 끝까지 사력을 다해 저항하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걸 마귀로 표현을 하지만 저는 이런 표현이 좀 그래서 우회해서 표현을 했습니다. 이런 모습도 우리의 모습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라고 하면 놀랄 수가 있습니다.

 

왜 성당도 잘 나가고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하는데 우리의 모습이라고 하면 놀랄 수가 있을까요? 잘 한번 보시면 그럴 수가 충분히 있습니다. 어제도 원주 교구에 계신 신부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요즘은 솔직히 코로나 때문에 전보다 신부님과 통화를 좀 더 할 여유가 있습니다. 사실 복음묵상에 대한 피드백을 해 주십니다. 피드백을 해 주시면서 알려주신 게 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신자들과 신자들의 고충을 듣고 상담을 해 주셨을 겁니다. 그에 대한 신부님의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물론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신부님께서는 확실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제에게 틀어놓는 일이니 진실한 사실에 근거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보시면 사람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실제 음흉한 모습이 많이 노출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담에도 있지만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면 축하를 해 주어야 하는데 실제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비유를 애들 비유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애들도 어리지만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근데 예전에 이와 관련해서 한번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지만 정말 진심으로 사촌이 논을 사도 축하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게 아무리 신부님의 강론을 많이 듣고 해도 자신이 변화가 되려고 노력을 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강론을 하셔도 그런 사람들에게는 밑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하셨습니다. 어제는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실을 아시지만 그래도 물을 부어주신다고 하시더군요. 왜 그럴 것 같습니까? 답변이 참 뭉클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느님은 그 영혼을 구원을 하시려고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영혼이 구원되지 않으면 그 영혼이 걸어가게 될 말로가 비참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가슴을 울립니다.

 

저는 어제 부활축일을 지나면서 개인적인 일로 솔직히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약간 속상했습니다. 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넘어질 때 넘어지더라도 그래도 부활축일 그날만은 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예수님 보기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 성금요일 새벽부터 오후 세 시까지 조배를 하고 그렇게 나름 준비를 열심히 하고 부활을 기쁘게 맞이하려고 했는데 너무 사소한 일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넘어지기 전에 조금만 조심을 하면 되었을 건데 왜 넘어지기 전에는 그걸 모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마치 밑 바진 독이 제 모습 같아서 그렇습니다.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 노력을 들인 게 수포로 돌아가 실망스러웠는데 그때 문자 하나가 왔습니다. 전주교구에 계신 자매님의 부활축하인사였습니다. 서로 답장을 주고 받다가 자매님의 문자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뭔가 저를 칭찬해주셨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참 예쁜 아들일 거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찔리는지 어제 사소한 실수로 부활축일이 기뻐야 하는데 이런 칭찬을 들으니 당연히 찔리겠죠. 저도 최소한 양심이 있는지라 답변에 많이 넘어지니 예쁜 아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한 문자에 보내주신 답장을 보고 제가 가슴 뭉클했습니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넘어진 줄 아는 것이 예쁜 것이고 은총이지요.” 이 문자를 보고 제가 어제 축일에 넘어진 그 마음에 위로가 되었습니다. 스쳐지나가는 인연인 것 같은데 그래도 때론 이모처럼, 다정한 누나처럼 이야기해 주시는 분이 있어서 저는 그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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