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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_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요한 20,16)
작성자한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14 조회수1,310 추천수1 반대(0) 신고

2020.04.14.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요한 20,16)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은총이 여러분 모두의 가슴 속에 깊이 있게 뿌리내리길 함께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을 유심히 살펴보면 특이한 점 하나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리아의 ‘두 번의 돌아섬’입니다. 천사들을 보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복음서에서 전하는 바와 같이 마리아는 그분께서 예수님이란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참으로 의아해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렇게나 사랑했던 사람이 되살아났는데, 어떻게 알아보지를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어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바뀌었기에 예수님을 그다지도 사랑했던 마리아조차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전의 상태와 부활 이후의 상태에 대한 차이를 말하며 이것을 설명합니다. 문이 굳게 잠겨 있음에도 그 문을 열고 들어와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하셨던 예수님의 모습 또한 이와 매한가지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가 오늘 주목해보고 싶은 것은 ‘어떻게 변하셨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변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통해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자기 계시(스스로를 드러내 보여주심)’를 통해서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고 항상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실 때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태초에 창조로부터 이어온 당신의 사랑을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다시금 수없이 많이 재확인 시켜주시고 그럼에도 모자라 당신의 친 아드님을 통해서까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적 자기계시의 특징은 언제나 ‘그분께서 우리에게 먼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스스로 먼저 그분을 받아들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뵈었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계획하신 무한한 사랑의 신비가 이미 우리 안에 아주 오래 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부활 이후 그분의 자기계시는 오늘의 마리아에게,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에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이렇게 직접적인 그분의 자기계시를 통해 그분을 극명하게 바라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또 다른 방법을 통해 그분을 알아보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일상으로 돌아간 제자들을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을 거셨지만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그분께서 사랑하신 제자는 그분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말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본 베드로는 곧바로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어 예수님께 향합니다.

물론 이것 또한 이미 그 이전의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기계시를 통해 예수님을 참되게 만난 사람인 그 제자는 그 뒤로도 계속해서 예수님의 부활 흔적들을 발견하고 주변에 전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믿음 안에 충실한 ‘이미 하느님을 본 사람들’을 통해서도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분께서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단 한 번이라도 그분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그 경험을 움켜쥐시길 바랍니다. 우리들의 감정은 쉬이 사라지기에 그 경험을 감정의 방에 넣어두면 그 방과 함께 어느새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소중한 경험을 믿음과 의지의 방에 넣어두고 끊임없이 돌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그러한 경험의 중첩을 통해 우리는 점점 더 그분을 향한 믿음에로 굳게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처럼 주변에 그분을 전하는 하느님의 참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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