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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독서 (사도3,1-1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15 조회수1,455 추천수0 반대(0) 신고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독서 (사도3,1-10) 

"그 무렵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1)

 

사도행전은 1-2장이 성령 강림 사건으로 인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설립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면사도행전 3-7장까지는 사도 가운데서도 베드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복음의 강력한 선포 및 초대 교회의 폭발적인 확장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3장에서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첫 치유 기적인 베드로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과 이것을 계기로 이루어진 솔로몬 행각에서의 베드로의 설교를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본절에서 시간과 장소기적의 주역을 소개함으로써 이 일이 꾸며낸 일이 아닌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오후 세 시는 유대인들의 시간표에서 제9시이다유대인들이 구별해서 정해 놓은 기도 시간이 제369시 (현대 시각으로는 오전9정오오후3)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마지막 기도 시간인 오후 3시경에 성전에 올라갔던 것이다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유대교의 좋은 기도 전통을 버리지 않고 정한 시간마다 성전에서 열심히 기도하였다(사도2,5.42.46).

또한 초대 교회 신도들의 기도는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기도와(마태6,5) 달리 역동적인 기도였으며 많은 기적과 승리를 가져왔다(사도12,3-17). 이런 차원에서 사도행전은 기도의 승리를 기록한 기도의 행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성전으로 올라가는데'에서 '올라가는데'에 해당하는 '아네바이논'(anebainon)은 미완료 과거 형태이다희랍어에서 미완료 과거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상태나 계속 이루어지는 동작 및 습관적인 동작을 묘사한다.

말하자면 베드로 일행이 성전을 방문하여 기도하는 것이 일회적인 일이 아니라 습관이 될 만큼 자주 하였던 행동이었음을 보여준다동시에 당시 성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움직임을 보다 생생하고 현장감있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는 과정에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궁금증을 자연스럽게 유발하는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왔다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여다 놓았던 것이다."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는 직역하면 그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앉은뱅이(콜로스; cholos)라는 말이다저자가 그의 병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불치병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사도행전 4장 22절에는 당시 그의 나이가 사십여 세가 되었으므로 40 여년간 굳어진 그의 뼈가 펴져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고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문'(미문美門)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높이가 23 미터에 이를 만큼 거대하고 금과 은으로 입혀진 황동으로 만들어진 이중문이어서 웅장하고 장엄하기까지 하였다.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에서 (사람들이)'들어서'에 해당하는 '에바스타제토'(ebastazeto)와 '놓았다'에 해당하는 동사 '에티둔'(etithun)은 모두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사람들이 앉은뱅이를 메고 오는 상황을 완료되지 않은 동작으로 현장감있게 보여 주면서 동시에 앉은뱅이가 '아름다운 문'에 앉게 되는 일이 이때의 당일만이 아니고 거의 매일 반복적으로(날마다행해지던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즉 그는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걸하는 일을 통해 생계를 꾸려갈 수 밖에 없는 직업적인 거지였던 것이다.

 

신명기 15장 4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아 그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다.

따라서 구걸하는 자가 다른 장소도 아니고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던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는 비극적인 상황은 이스라엘의 경제적 형편 뿐만 아니라 영적 상황까지도 극도로 빈약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이에 베드로가 '아름다운 문'앞의 그 불구자에게 그가 구걸한 몇 푼의 돈을 주기보다는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적을 행하는 것은 '아름다운 문'에서 구걸하는 불구자를 통해 투영된 당시 이스라엘의 무기력한 영적인 상황을 치유하기 위한 가장 현명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의 생명력 없는 형식적 껍데기 신앙생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역동적인 복음의 능력으로만 치유될 수 있는 무력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 (6-7)

여기서 '은과 금'이라는 표현은 금은으로 장식되어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아름다운 문'처럼 껍데기만 남아 형식적인 종교로 타락한 유대교를 빗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에서 '~으로'에 해당하는 희랍어 전치사 ''(en)을 직역하면 '~안에'(in)라는 뜻이다한글의 '~으로라는 번역은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단지 걷기 위한 수단으로 준 것 같은 잘못된 뉘앙스를 준다.

 

하지만 원문의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안에서'라는 표현은 앉은뱅이가 자신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영적 진리를 보여 준다.

또한 유다 사회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대표한다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이름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영원히 추구해야 할 목적이다(히브12,2; 묵시11,18).

 

앉은뱅이가 자신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보인 반응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은(8그가 예수님안에 머묾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장애를 극복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건강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본문의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은과 금'은 대조를 이룬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리스도교가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을 가리키고 '은과 금'은 외형적인 면에만 치우쳐 있는 예루살렘 성전과 영적으로 피폐해져 있는 유다교를 상징한다.

 

앉은뱅이가 형식에 물든 유다교의 화려한 성전 문 앞에서는 기껏해야 하루 하루를 겨우 연명할 수 있는 동전만을 받을 수 있었지만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는 자신의 병든 육신을 고침받고 참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안에 머무는 귀한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매우 인상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이름 앞에 '나자렛'이란 지명까지 거론하는 것은 지금까지 대부분 멸시하고 천대하는 의미로 사용했던 호칭(요한1,46; 18,5.7; 19,19)이 영광된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랑할 수 있는 높은 가치가 되었음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앉은뱅이가 강한 새 힘을 얻어 다리의 선천적 장애가 치유된 사건은 의료적 의미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도 갖는다.

 

먼저 사회적인 의미이다당시는 모두 자신의 손과 발을 사용하여 경제 활동을 해야 하는 농업과 목축업 중심의 원시 경제 사회였는데손이나 발 등 신체의 일부분을 쓰지 못하는 지체 장애인들은 구걸하는 일 외에는 자신의 생계를 연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사도10,46-52).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의 다리를 완전히 치유하여 걷게 하심으로써 이제는 구걸에서 스스로 경제적 행위를 하여 자립하게 하심으로써 사회의 일반 구성원으로 복귀하여 살게 해주신 것이다.

 

또 하나는 종교적 의미이다종교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김받을 수 밖에 없는 장애인이었던 앉은뱅이는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고단지 성전을 드나드는 유다인들로부터 몇 푼의 돈과 함께 경멸과 비난의 시선만을 받을 뿐이었다.

 

당시 유다의 형식적 율법주의자들은 몇 푼의 돈을 앉은뱅이에게 던져주며 상처받고 소외된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는 교만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적을 베풀어 그의 불구의 몸을 고쳐 줌으로써 그가 갖고 있었던 종교적 부정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한편 경제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무기력하게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의 모습은 영적으로 무기력한 당시의 유다인들 자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던져 주는 단편적인 진리가 담긴 불확실한 정보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희망없이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걷게하신 것은 영적 불구자인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포함한 복음만이 영적 건강을 회복하며하느님께 대한 바른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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