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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04.15)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15 조회수2,162 추천수4 반대(0) 신고

 


2020년 4월 15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제1독서 사도 3,1-10

그 무렵 1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

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3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5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복음 루카 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땅바닥에 폭 30cm의 간격으로

두 개의 선을 긋습니다.

이 폭 30cm 간격 사이로 똑바로

 걸어갈 수 있을까요?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폭 30cm는 두 발을 모아도

 남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땅바닥이 아니라,

3m 높이 위에 폭 30cm가 되는

 나무다리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다리를 땅바닥처럼 편하게

 걸을 수가 있을까요? 아마 불안한

자세를 취하며 걸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혹시 나무다리에

몸을 완전히 기대서 힘들게

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땅바닥의 선과 3m 높이의 다리는

 폭이 30cm로 똑같은 크기입니다.

 하지만 그 위에 올라섰을 때의

반응은 분명히 다릅니다.

어쩌면 3m 높이에 있는

나무다리의 폭이 더 좁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발을 헛디뎌서 3m 아래로

추락할 수 있다는 의심이

두려움을 만듭니다. 땅바닥에서는

절대로 이 폭에서 벗어나는 실수를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혹시’라는

 아직 일어나지 않는 가정을 하면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많은 두려움을

안고 있는 우리입니다. ‘혹시’라는

 일어나지 않는 가정들이 할 수

있는 것도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를

복음이 전해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지요. 이 제자 역시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주님께서 함께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셨지만,

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뵙지

못합니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

이라고 표현된 것을 볼 때,

예수님과 가까운 관계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 죽음에 대한 실망, 절망,

 그리고 의심까지 이러한 부정적인

마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앞서

땅바닥에서와 3m 높이 위에서의

마음가짐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마음가짐이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도 누구와 걸어가는지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뵈었던 순간은,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을 때라고

 합니다. 바로 미사를 통해 특히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아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가리켜서 어렵고

힘든 곳이라고 말합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과 시련의

공간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실망,

절망,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님께서 주십니다.

 두려움을 접고 대신 큰 희망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더 이상 상황을 바꿀 수 없을 때는

우리 자신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빅터 프랭클)

어떤 성격도 괜찮아

어렸을 때 자기표현을 잘하는

사람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자기 의견을 내세워서

그 뜻을 관철하는 것을 보며,

저 역시 그렇게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하고

늘 후회만 할 뿐입니다.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하는데….’

라고 말입니다. 동시에 ‘나는 왜

그렇게 말하지 못할까?’라며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말을 하게 되면 울렁증이

시작되면서 떨려서 제대로

말도 못 했습니다. 또 후회했습니다.

‘괜히 말했다’라고 말이지요.
현재, 그때의 모습이 후회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의견을

 잘 내세우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모두와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친구들을 지금도

 만나고 있는 것도 당시의 소극적인

모습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비판적이고 자기 의견을

내세우는 사람은 외로울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친구를 많이 사귀어야 할

 시기에 가지고 있었던

저의 성격은 친구와 함께하기에

분명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떤 성격도 다 괜찮습니다.

자기의 성격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이 성격을 통해 분명히 더 나은

 나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선 부정하고 보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이유는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입니다.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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