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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19.“성령을 받아라"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오스딩신부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19 조회수2,175 추천수3 반대(0) 신고

 

요한 20, 19-31(부활 2 주일)-자비주일

 

 

 

찬미 부활! 찬미 자비, 알렐루야!

오늘은 부활 여드레 날인 부활 제2주일이고,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공동체에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자비가 신자들의 증가와 많은 표징과 이적을 통해 드러남을 전해줍니다. <화답송>에서는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 118,1) 찬양합니다. 그리고 <2독서>에서는 그 자비가 마지막 날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사람의 아들에게서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 첫째 날과 부활 여드레 째 날에 벌어진 일을 함께 들려줍니다. ‘첫째 날의 일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불안과 불신에 빠져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성령을 주시며 파견하시는 장면입니다. ‘여드레째 날에 벌어진 일은 의혹과 불신에 차 있는 토마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당신의 부활을 확인시켜주시는 장면입니다.

먼저, 부활 첫째 날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있는 데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하고 있는 그들을 질책하고 꾸중 할만도 한데,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21.) 하시며 두 번씩이나 평화를 건네주십니다. 그들은 의혹에 빠져 있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믿으시고 깊은 신뢰로 사명을 맡겨 파견하십니다. 이토록 당신의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사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믿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리고 이를 실행할 수 있도록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곧 당신 부활의 숨을 불어넣어(요한 20,22) 주십니다. 당신의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당신의 생명 곧 성령을 건네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토록 당신의 자비에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이는 성령을 단지 제자들에게 선물로 주신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으로 용서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나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용서하는 일, 자비를 베푸는 일이 그들에게 소명으로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입니다. 사실 용서와 자비계약의 핵심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 계약이나 새 계약이 맺어지는 과정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탈출기> 24장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나누는 식사증거판을 통해 계약을 맺으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금송아지 사건으로 계약이 파기되고, 모세가 다시 시나이 산에 올라 여러 차례의 중재기도를 바치게 되고 다시 계약관계를 회복시켜주실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애를 이렇게 드러내십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34,6-7)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자비하신 분, 용서를 베푸신 분으로 계시하십니다. 결국, ‘옛 계약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맺어진 계약인 것입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라는 말에는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진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용서는 당신께서 손수 인간의 모든 잘못과 그 결과까지 걸머지심으로써 그 잘못을 없애주심을 뜻합니다. 이를 예언자 이사야는 고난 받은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그는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이사 52,13-53)라고 노래하면서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진정한 용서는 단지 그의 죄를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와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지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지요? 걸머짐이 없이 그저 용서하려고만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또 다시 백성들이 계약을 파기하고 바빌론 유배를 받고 있을 때 예언자 예레미아는 새 계약에 대해 이렇게 예고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3-34)

 

 

 

그러니 용서는 단지 죄를 면해주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는 일입니다. 곧 그의 죄를 계속 곱씹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여전히 상대의 죄를 곱씹고 있다면 아직 용서를 하지 않은 까닭일 것입니다.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상처를 사랑의 통로, 구원의 통로로 만드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미사 중에 포도주가 담긴 잔을 쳐들고 새 계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상처 입으시고 피를 흘리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 구원의 피로 용서를 입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죄의 용서로 새로 탄생한 자녀들입니다. 분명, 우리는 이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인 용서를 먹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용서받은 죄인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용서하는 일, 자비를 베푸는 일을 사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당신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이를 우리는 <신경>에서도 고백하며,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도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오늘 예수님께서는 여드레 째 되는 날에 다시 오시어, 우리를 먼저용서해 주십니다. 사실, 부활 첫째 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렇게까지 자비와 사량을 베푸셨지만 그들은 여드레 날에도 여전히 의혹과 불신으로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아걸고 집안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들어오시어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요한 20,26) 토마스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이제 토마스는 그렇게 부활을 불신하고 거부하고 있는 자신을 이미 환히 알고도 믿고 용서하시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용서와 사랑에 비로소 토마스는 의혹과 불신의 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야, 그 배신을 미리 다 알고도 먼저 믿어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자비를 깨닫고 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용서의 체험, 자비의 체험이야말로 바로 부활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의 불신과 의혹은 믿음으로 바뀌고, 그의 거부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탄성으로 터져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삶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용서와 자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표징이 됩니다. 그러니 <자비주일>을 맞은 오늘, 우리는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일’,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하는 일’, 바로 이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인 것입니다. 바로 이 용서가 우리에게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감사요,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비인 죄의 용서를 세상에 선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내 옆구리에 내 형제, 내 이웃을 껴안고 있는가?

나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옆구리에 받아들여, 믿어주고 희망하고 있는가?

내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사랑의 피, 생명의 피를 형제와 이웃들에게 건네고 있는가?

나를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끌어안아, 용서하고 품어주고 도와주고 자비를 베풀고 있는가?

주님 용서하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주님, 주님을 믿습니다. 당신은 더더더 저를 믿으십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당신께 대한 저의 믿음이 아니라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으로 제가 살아갑니다.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더더더 저를 사랑하십니다. 제 사랑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기에 제 사랑의 방식이 아니라 당신께서 베푸시는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주님을 희망합니다. 당신은 더더더 저를 희망하십니다. 이제는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소서. 제가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주님!

당신 옆구리에서 다시 탄생하게 하소서

당신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받아들여 옆구리에 간직하고 위로하게 하소서.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끌어안아 옆구리에 품고 용서하게 하소서.

믿어주고 도와주며 제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피를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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