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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장애인의 날) _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요한 3,8
작성자한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20 조회수1,421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04.20.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장애인의 날)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요한 3,8)

 

이제는 ‘정보화 사회’라는 말도 굉장히 옛 말처럼 들리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대사회에서 ‘정보’가 가진 영향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터넷을 열어보면 우리가 궁금해 하는 기본적인 질문들에는 모두 답을 얻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분야에서 마치 ‘준전문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믿을 수 없는 정보들과 광고성 정보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정보 자체의 진위여부를 판단하기도 정말 어려워져가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시대. 그러면서도 ‘진리’에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시대가 지금 우리의 현주소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사실 저도 그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 안에서 내가 마치 최고인 양 ‘교만하게’ 살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유학생으로 발탁되어 로마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얻게 된 지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때가 차서 영글지 않은 열매는 독을 품듯 저도 제 안에서의 숙성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채 밖으로만 밖으로만 향해왔습니다.

하느님을 담아내고 하느님‘만을’ 전해야하는 신학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응당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분이시고 이런 상황 속에서는 이렇게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제가 되는 삶을 준비하다보면 어쩔 수 없는 방향성일 수도 있겠습니다. 무언가를 전해야하고 가르쳐야 하고 교정해주어야 하는 위치. 지도자로서 목자로서 양떼들에게 믿음과 의미를 전해줄 수 있는 존재.

그렇게 저는 하느님의 왕좌에 ‘저 자신’을 앉혀 놓고는 저에게 경배하고 저를 찬양하고 제 주위의 사람들 또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오랜 고민 끝에 사제성소의 길을 떠나 사회에서의 삶을 살아온 지 이제 고작 5년이 되어갑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정말 수많은 깨달음과 통회 그리고 부끄러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음에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저 어딘가 중간에 부유하는 겁 많은 존재였고 그런 저의 부족함을 숨기기 위해 하느님에 대한 ‘지식’으로 저를 무장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는 세례자 요한의 말씀이 내 삶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나만’을 키워왔던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진정 자리 잡고 있던 것은 ‘교만’이 아닌 ‘두려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천한 내 존재가 드러날까 두려워, 그분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만 지는 내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두려워 그렇게 그분의 것들이 다 제 것인 냥 살았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정말 우리의 아빠이심이 분명합니다. 그런 부족한 아들의 모습도 어여삐 여기시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31)하고 말씀하시며 그분의 것들을 제게 다 허락해 주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던 한 교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신학을 공부할 때에, 특별히 ‘믿을 교리’라 불리는 교의 신학을 공부할 때에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어떻게?’하며 묻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지식으로는 절대 그 ‘어떻게’의 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느님 안에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묻는 가운데 그분과 우리의 관계가 더욱 더 깊어지며 진정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맞습니다. 지나고 보니 하느님께서는 매순간 제 삶에 생을 부어 주셨고, 수많은 좋은 생각들과 마음들을 통해 세상에 사랑을 실천하고 계셨으며, 저를 둘러싼 이웃들을 통해 제게 바른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저의 죄를 통해서도 깊이 있는 회개와 더 큰 사랑에로의 전이라는 그분의 은총의 힘을 보여주셨습니다. 정말로 그분의 자비는 끝이 없었으며 제가 인지하는 모든 부족한 것들을 통해서도 그분의 ‘완전함’을 드러내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이제야 조금은 그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는 이제 중요치 않습니다. ‘그분께서 왜 나에게’라는 질문을 지그시 응시하다보면 저를 향한 그분의 사랑만이 제 곁에 고요히 머물고 있음을 느낍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의 의미를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공기 중에 산소는 존재하고, 지구는 돌고 있고, 하느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알지 못하는 두려움, 지금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는 마음과 정신을 그리도 쉬이 빼앗기면서 ‘하느님’께서 ‘분명히 성경을 통해 말씀해주신 진리’에는 마음과 정신을 두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 보다 내 현실에 더 가까운 두려움이 더 선명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하루 조금 더 현명하고 지혜롭게 생각하고 판단하여 행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고민해볼 수 있는 하루이길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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