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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2주간 화요일 _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요한 3,12)
작성자한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21 조회수1,455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04.21.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요한 3,12)

 

우리는 참으로 믿음에 더딥니다.

그렇게도 무던히 반복적으로 말씀해 주심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믿는 것이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이제는 믿는 것 같다고 느끼다가도 어느 새 내 안에 자리 잡은 불신을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믿고자 하는데 믿어지지 않음에 속상해하기도 하고, 때론 완전히 길을 잃어 ‘믿음’이 어떤 것이었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자주 믿음을 잃기도 혹은 잊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첫 번째로 믿음은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서 옵니다.

“늑대가 나타났다.”하고 외치던 양치기 소년을 기억하시나요? 처음 두 번, 사람들은 정말 늑대가 나타난 줄로 알고 소년을 도우러 갑니다. 하지만 두 번 모두 그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정작 진짜로 늑대가 나타났을 때는 ‘이번에도 또 거짓말이겠지.’하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할 일을 합니다.

‘약속을 잘 지키는 친구, 항상 늦는 친구’라는 표현만 봐도 그렇습니다. 상대방이 가진 습관적인 행동들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믿음’을 체험하게 해주고 우리 안에 그에 대한 ‘믿음’이 자라도록 도와줍니다.

 

둘째로 믿음은 앎을 혹은 또 다른 믿음을 기반으로 하기도 합니다.

이는 사유를 통해 더 깊은 믿음으로 나아갈 때나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게 될 때에 사용되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결론이 도출되기 위해서 논리적으로 타당한 전제들이 필요한 것과 같이 또는 우리가 새로운 학문을 접할 때에 기본적으로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의 권위를 통해 그 지식을 전달받는 것과 같이 어떤 하나의 앎 혹은 믿음이 새로운 믿음에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셋째로 믿음은 의지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자주 믿음을 감정의 영역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흔히 믿는다는 행위 자체가 ‘내키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특히 이는 상대방의 행동이 내게 상처가 되었을 경우에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믿는 행위의 대상을 우리라고 전제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부족함에도 모자람에도 나를 믿어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의지가 도와줘야 합니다. 의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영역을 지탱해주는 큰 기둥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우연히 카페에서 한 연인의 싸움을 목격하였습니다. 그저 서로의 주장만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내가 상처를 받았기에, 내가 원하는 모습은 이것으로 정해 놓았기에 ‘그렇지 않은’ 상대방을 사랑할 수도 믿을 수도 없다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관점만을 주장하고 관철시키고자 하기에 상대방의 어떤 말도 그 어떤 행동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했습니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나는 그의 행동을 이렇게 믿기로 결심했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내가 정해놓은 기준대로 움직일 때야 비로소 ‘믿을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보다 늘 우리 곁을 지키는 애완동물들에게 더 편하게 마음을 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따라야 하는 직장 상사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내 부하직원이 더 편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늘 그 반대를 보면 좋겠습니다. 가끔 혼내도 다시 내게 달려와 꼬리를 흔들어 주는 그 아이처럼. 부족한 모습으로 이끌어도 연륜과 경험을 믿고 나를 따라주는 부하직원들처럼. 왜 우리는 먼저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런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한 평생을 살아가며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신비하고 새로운 죄를 짓는 경험을 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참으로 자주, 아니 항상 같은 죄에 빠지고 넘어집니다. 하지만 이런 무한한 반복 속에서도 그분은 우리를 믿고 계십니다.

우리도 들여다보기 두려워하는 우리 속을 그분께서는 훤히 알고 계십니다.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마태 10,30) 그분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믿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가장 강력한 믿음의 영역은 ‘의지’의 영역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어떠한 상황에서도’라는 것이 전제된 믿음은 그 어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사건이 아닌 상대를 바라보게 해줍니다. 그리고 그 상대에 대한 시선은 우리의 눈을 열어 상대를 믿을 수 있는 이유들도 우리 주변에 넘쳐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오늘 하루 힘을 주어 믿어보시는 하루를 보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믿어요.’하고 말하며 지금은 조금 힘들지라도, 지금은 다소 슬픔 중에 있더라도 결국 내게 좋은 것을 해주실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말과 의지의 반복은 어쩌면 ‘허황돼 보이는 그 무언가’를 상상하며 지금의 우리를 미소 짓게 해줄 것이며 나아가서 그 무언가가 우리 삶에 도착하는 순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열어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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