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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복음을 묵상하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29 조회수1,282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늘 자주 바치는 기도 중에서 주님의 기도를 한번 묵상하고자 합니다. 주님의 기도 가운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이 내용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 기도문을 늘 바치지만 실제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지입니다.

 

입술은 그렇게 고백하지만 실제 우리는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내심 바랄 것입니다. 어쩌면 마치 자기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같은 것이라고 마인드 콘트롤을 하면서 말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대해 정확하게 성경에 다시 정의를 한 곳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원론적인 자구적인 해석보다 언어적인 해석을 한번 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고 할 때 하느님의 뜻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자기에게 좋은 일도, 슬픈 일도, 힘든 일도, 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고통도 있다면 그 고통 속에서 나를 향한 하느님의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고통도 쉽지는 않겠지만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기 때문에 쉽게 견딜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을 때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가 있을 겁니다.

 

우리는 때로는 영성 서적이나 신부님의 강론에서 보면 이런 말을 자주 접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고통이 있다면 그 고통이 무슨 의미인지 고통의 의미를 잘 헤아려보자는 말씀 말입니다. 물론 그런 말씀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 대해 한번 다른 시각으로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물론 자신의 신앙 여정에서 이런 고통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한편으로 달리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그 고통의 의미 따위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고통의 의미를 생각해서 그 고통이 가져다주는 영적인 유익을 생각해서 이겨보자는 의미이지만 이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의 축복으로 이어진다는 생각만 하고 그 이후에 일어날 부분에서는 모든 걸 하느님께 맡기는 게 더 현명한 생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똑같은 상황에서 견뎌야 한다면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도 어떤 믿음에 더 많은 상급을 내리겠습니까?

 

순수한 믿음은 계산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뭔가를 베풀 때 계산을 하면은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고 흥정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는 믿음은 이렇게 한다면 뭔가 나중에 하느님께서 뭔가 보상을 해 주실 거다.” 라는 계산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십자가 성요한 성인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말 이런 영혼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는 부르지만 이런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세상에서 자신이 뭔가를 일하고 그 일에 대해 대가를 지급하는 고용주로 하느님을 전락시키는 형국밖에 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 하느님이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세상적으로 한 회사의 사장과 같은 분으로 만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혼탁한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부모에게 무슨 봉양을 해도 계산을 하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대로 된 자식이라면 말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이와 같아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려고 이 땅에 내려오셨다고 하십니다. 참 재미 있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샤워를 하는데 샤워 도중에 갑자기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찾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예전에 저에게 영세를 주신 신부님 강론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근데 지금 그 생각이 오늘 복음과 관련해서 묵상이 됩니다. 이 묵상과 관련지어 생각을 해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게 오늘 복음에서도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으신다고 했을 때 8년 전에 신부님께서 이 내용에 대해 이런 강론을 하셨습니다. 제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무게 중심이 어디에 두고 있어야 하는가입니다.

 

비율을 본다면 한 마리를 구하려다가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보호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 만약 잃어버린 한 마리를 포기를 한다면 아흔 아홉 마리가 좋아할 것인가 말입니다.

 

8년 전의 강론이라 지금 제가 신부님의 강론을 글로 옮기려고 하니 좀 길어지는군요.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게 있습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자기들만 보호를 한다는 게 마냥 좋은 것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만약 그런 논리라면 자기들도 그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의 신세가 된다면 자기들도 목자가 다수와 소수이런 식으로 해서 위험의 범위를 따져 생명을 구하게 된다면 자기들도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자칫 잘못하면 목자가 자신을 구하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에 목자를 신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린 양 한 마리를 구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자신들도 그런 위험에 빠지게 될 때 자신을 위해 목자도 찾아 나설 거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내용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보면 하느님의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한 영혼이라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게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그 영혼도 하느님의 창조물이라서 그러실 겁니다. 하느님의 마음이야 참으로 간절하지만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영혼이 있고 또한 하느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무법천지로 세상을 사는 영혼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도 참으로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이런 관점으로 묵상을 하면 우리는 좀 더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겁니다. 만약 돌아온 탕자에 나오는 큰아들이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동생을 반기는 아버지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한 영혼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하루 진지하게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이런 논리라면 나와 대립되는 그런 사람도 하느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영혼이라고 생각한다면 만약 자신이 그런 영혼을 향해 미움과 증오가 있다면 그때 그런 상황을 만약 하느님이 바라보신다면 어떤 마음이실 것 같습니까? 피가 거꾸로 솟을 겁니다. 그 영혼도 하느님 눈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영혼일 거라 그렇습니다.

 

결국 내가 내 형제를 미워하는 게 단순히 내 자신이 한 형제에게 미움의 감정을 가지는 문제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더 넓게 보면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구송기도가 빈말이 되지 않으려면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입술로만 하는 허황된 고백 기도가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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