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20년 5월 2일 토요일[(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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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0-05-02 | 조회수1,370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0년 5월 2일 토요일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아타나시오 성인은 295년 무렵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알렉산데르 대주교를 수행하여 니케아 공의회(325년)에 참석하였다. 328년 알렉산데르 대주교의 후계자가 된 아타나시오 주교는 아리우스 이단과 투쟁하는 가운데 여러 차례 유배를 당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성인은 특히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 책을 많이 남겼으며, 수도 생활의 창시자인 안토니오 성인의 전기를 써서 서방 교회에 수도 생활을 알리기도 하였다. ◎제1독서◎ <교회는 굳건히 세워지고,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내려가게 되었다. 애네아스라는 사람을 보았는데, 전부터 침상에 누워 있었다.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그러자 곧 애네아스가 일어났다. 그를 보고 주님께 돌아섰다. 여제자가 있었다.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 한 사람이었는데,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다. 말을 듣고 그에게 사람 둘을 보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그들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를 옥상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베드로에게 다가가 울면서, 지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다.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리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살아난 도르카스를 보여 주었다.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화답송◎ 시편 116(114─115),12- 13.14-15.16-17(◎ 12)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주님께 나의 서원 채우리라.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하네. ◎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저는 당신의 종, 당신 여종의 아들. 당신이 제 사슬을 풀어 주셨나이다. 당신께 감사 제물 바치며, 주님 이름 부르나이다. ◎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복음환호송◎ 요한 6,63.68 참조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복음◎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6,60ㄴ-69 가운데 많은 사람이 60 말하였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영성체송◎ 1코린 3,11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알렐루야. ◎오늘의묵상◎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둘로 나뉩니다. 한쪽은 투덜거리며 예수님을 떠나갔고 다른 한쪽은 예수님께 믿음을 두고 그분과 함께 머뭅니다. 제자들이 갈라지는 결정적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 바로 당신이시라고, 그 빵을 어서 먹으라고 재촉하신 말씀입니다. 힘들지만 때로는 위로가 될 때가 많습니다. 대개 힘든 경우는 상대의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이고, 위로가 될 때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애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결국 서로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지니는 일입니다. 배고파야 빵을 먹고, 배고픈 삶을 살아야 빵에 대한 간절함을 지니게 됩니다. 예수님을 떠나간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위로보다는 불편함으로 다가온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자신들의 배고픔을 채워 주지 못한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보았으면 합니다. 흔히 돈과 명예, 권력에 비판적인 것이 신앙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돈, 명예, 권력에 배고파하는 현실을 살아갑니다. 돈을 배고파하되 어떻게 쓸 것인가, 명예를 소중히 여기되 그 명예를 어떻게 도모할 것인가, 그리고 권력을 지향하되 그 권력을 더욱 올바로 힘 있게 사용하려면 어떤 삶을 추구할 것인가 되물어야 합니다. 신앙적 배고픔은 돈과 명예, 권력을 내려놓는 데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명예, 권력을 하느님 안에서, 이웃들과의 나눔 안에서 제대로 사용하면서 체험합니다. 배고픔으로, 하나의 빵이라도 함께 먹는 만찬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들이 예수님 곁을 지키는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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