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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버림받은 자의 하느님 (요한12:26~5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5-06 조회수1,675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5.6. (공동번역성서)

 버림받은 자의 하느님

(요한12:26~50)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27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그 때에 하늘에서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 29 거기에 서서 그 소리를 들은 군중 가운데는 천둥이 울렸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천사가 예수께 말하였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30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들려 온 음성이다. 31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 32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3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이 어떻게 돌아 가시리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었다.

34 그 때에 군중이 '우리는 율법서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사시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려야 한다고 하시니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의 아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35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빛이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잠시뿐이니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가라. 그리하면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할 것이다. 어둠 속을 걸어 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36 그러니 빛이 있는 동안에 빛을 믿고 빛의 자녀가 되어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피하여 몸을 숨기셨다. 37 예수께서 그렇게도 많은 기적을 사람들 앞에서 행하셨건만 그들은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38 그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주여, 우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으며 주께서 보여 주신 능력을 누가 깨달았습니까?' 한 말이 이루어졌다. 39 그들이 믿을 수가 없었던 이유를 이사야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40 '주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눈을 가지고도 알아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하여 끝내 나에게로 돌아 오지 못하고 나한테 온전히 고쳐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41 이것은 이사야가 예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며 또 예수를 가리켜서 한 말이었다. 42 유다 지도자들 중에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두려워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드러내 놓고 하지는 못하였다. 회당에서 쫓겨날까 겁이 났던 것이다. 43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보다도 인간이 주는 영광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44 예수께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뿐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까지 믿는 것이고 45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도 보는 것이다.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47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단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 그러나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세상 끝날에 그를 단죄할 것이다. 49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어떻게 말하라고 친히 명령하시는 대로 말하였다. 50 나는 그 명령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나 아버지께서 나에게 일러 주신 대로 말하는 것뿐이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은총(은혜)’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 하느님의 은혜앞에 완전히 부복하고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하느님의 은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자들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창조의 목적입니다. 聖徒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바로 그 자리로 회귀를 해야 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창조의 목적은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를 완성하시고 당신의 자리에 앉아계신 하느님 앞에서 절대 의존적 존재로 그 분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안식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하느님 대접을 받으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피조물의 안식은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하느님 대접해 드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worship)라는 것은 (worth + ship) 내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그 가치를 인정하고 그 가치에 절대 복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가치 부여 행위가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피조물들이 하느님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그 분의 영광을 자랑하고 찬양하는 상태를 예배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소원성취 문제해결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 무당굿과 방불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한 종류는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이고 다른 한 종류는 자신이 아닌 하느님을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전자를 죽은 자로 규정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아닌 자기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을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 합니다. 거기서 살려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성도는 그에게 주어진 일생동안에 이 세상의 힘의 원리에 의해 자신의 영광을 쫓던 삶에서 내려와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항복하고 순종하며 의뢰하는 자로 변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우라는 선악과 사건 이후에 하느님께서 뱀에게 허락하신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아나요? 다름 아닌 흙입니다.(창세3:14) 거기에서 쓰인 흙 티끌 먼지라는 의미의 단어 아파르 는 바로 그 밑으로 연결이 되는 아담에 대한 저주에 그대로 쓰입니다.

(창세3:19) 19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 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그렇게 흙에서 나온 존재가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 죽음이라는 것은 뱀으로 상징되는 마귀의 먹이가 되어 마귀와 연합이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모든 죄인들을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그러니까 모든 죄인들은 마귀의 먹이가 되어서 마귀에게 먹혀있는 마귀와 한 몸인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게 죽음입니다.

(마태23:33) 33 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

그렇게 마귀가 죄인들과 한 몸이 되는 방식은 강한 자인 마귀가 약한 자인 흙을 먹는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그걸 뭐라 하지요? 힘의 원리라 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고 그 약한 자를 자기의 수하로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 힘의 원리가 맺는 열매입니다. 그게 죽음의 원리인 것입니다.

 

(요한8:44) 44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 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장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힘의 원리를 숭앙하고 그 힘의 원리에 의해 이 땅의 다윗 왕국을 기대하며 자신들의 행위와 노력을 의지하는 자들이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것이 이제 자명해 졌지요?

그리스도와 성도간의 연합은 강한 쪽이 약한 쪽을 먹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한 쪽이 약한 쪽에게 먹히는 방식으로 그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내어줌의 방식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요한6:56)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이렇게 구원은 발뒤꿈치를 물어뜯는 박쥐같은 자들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의 죄가 예수님의 발꿈치에 밟혀 죽고 예수의 살과 피를 전가 받은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새 언약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낮아져서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것이며 그러한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축약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본문 27절과 28절을 보시면 교회의 본질인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삶이 무엇인지가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요한12:27-28) 27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그 때에 하늘에서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

 

27절에서 걷잡을 수 없으니라고 번역이 된 타랏소라는 단어는 혼란을 일으키다 당황하다 동요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굉장히 혼란스러우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 입니다. 얼핏 보면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시고 굉장히 갈등을 하셨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 이야기의 수신자는 하느님이 아니라 제자들인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러한 자신의 심경을 밝히신 후 하느님께 외칩니다. ‘아버지 제 뜻은 그러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그러니까 이 두 구절의 강세는 내가 너무나 고통스럽다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에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 그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내용이 앞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에도 등장합니다.

(마태26:39) 39 조금 더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이 구절의 강세도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뜻대로 다 하실 거면서 왜 주님은 제자들 앞에서 그러한 약한 모습을 보였을까요? 본문 30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요한12:30) 30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들려 온 음성이다.

보다시피 주님은 당신이 당할 고통 앞에서 흔들리는 연약한 인간으로서의 당신의 모습을 폭로당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당할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제자들이 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신 것은 제자들을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 앞에서 이제 곧 당신이 지고 가셔야 할 십자가의 의미를 더욱 인상 깊게 새기고 계신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예수님의 그러한 순종의 삶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이 세상 마귀 즉 뱀의 삶의 악함을 폭로하는 삶이며 그 뱀을 쫓아내는 삶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12:31) 31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

이 말씀을 곡해 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게 되면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난다고 했는데 왜 아직도 이 세상 임금이 우리를 미혹하게 놔두시는가?’ 하고 마음속에 의문을 품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자기가 정답인 것처럼 온 세상을 미혹하고 있는 마귀의 세력의 정체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폭로가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으로 규정되어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힘의 원리가 정답이 아니라 십자가의 원리가 정답이라는 것을 밝히시겠다는 것입니다.

(요한12:32) 32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들리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휩소오라는 단어는 십자가에 매달려서 들어 올려지다라는 뜻과 동시에 하느님에 의해 높이 들어 올려지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자신의 뜻과 소원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도는 기도를 해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함으로 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가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필리3:7-8) 7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자기가 원하는 어떤 것을 얻어내려는 시도를 아예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미 얻은 것도 배설물로 여기고 해로 여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전부 배설물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뜻을 버리는 자기부인의 삶이 결국 승리의 삶이며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며 그 나라의 질서를 쫓아 사는 삶인 것입니다.

(마태16:24) 24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고 예수를 따르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자기부인의 삶이었고 십자가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목적지가 바로 거기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부인시키고 십자가를 지게 하는 데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게 아버지의 믿음이며 그 아버지의 믿음에서 격발되는 자녀의 믿음인 것입니다.

(요한12:44-46) 44 예수께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뿐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까지 믿는 것이고 45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도 보는 것이다.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보고 예수를 믿어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느님은 형체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보고 알 수 있는 하느님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성품과 속성과 능력 등의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계속 수난 당하시고 배신당하시고 결국 세상에게 맞아 죽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보고 어떤 하느님을 보십니까? 약해 빠지고 무능력한 하느님이 떠오르지요 하느님이 그런 분이라는 것인가요?

기적이라는 것은 이집트 마술사들도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고 마태복음 7장의 불법을 행하는 자들도 이 땅에서 행했던 것입니다. 마귀도 할 수 있는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미루어 추측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폄하하면 안 됩니다.

 

(마태27:46) 46 세 시쯤 되어 예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이다.

자기 아들을 버리시는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떤 하느님을 봅니까? 매정한 분 피도 눈물도 없으신 분, 이기적인 분 등등 이런 이미지들이 떠오르지요 바로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철저하게 버려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버려짐은 바로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갈라3:13) 13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 받을 자다' 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우리들의 저주를 몽땅 짊어지시고 하느님께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버림받은 자들의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철저하게 버림을 받아 마땅한 티끌 같은 죄인들을 위해 자기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내 버릴 만큼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버리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그 십자가는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은 한 아들의 애통한 절규가 묻어나는 그러한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들을 버린 아버지가 그 아들을 다시 부활시키셨습니다. 그건 하나의 상징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버려져야 마땅한 어떤 무리들을 오직 당신의 은혜로 다시 살려내실 것임을 십자가의 버려짐과 안식 후 첫날의 부활에서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버려짐의 삶을 보면서 우리의 버려짐을 보아야 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보는 자는 하느님을 보는 것이고 나를 믿는 자는 하느님을 믿는 것 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의 버려짐에 의해 구원을 받은 성도의 삶에 똑같이 하느님의 버리심이 경험이 된다는 것을 압니까?

 

(로마4:25) 25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내어줌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내어줌이라는 말은 그 분의 수난의 삶과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어줌이라는 단어 파라디도미가 똑같이 쓰인 곳이 있습니다.

(마르14:10) 10 그 때에 열 두 제자의 하나인 가리옷 사람 유다가 대사제들을 찾아 가서 예수를 넘겨주겠다고 하였다.

여기서 파라디도미는 유다가 예수님을 자신의 손으로 넘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掌中에서 예수님께 순종하며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인간이 예수님을 자신의 손으로 넘겨서 자기가 예수의 주인 노릇을 하려 했다는 뜻입니다. 그게 배반입니다.

(마르1:14-15)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15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

여기에서 잡히다라고 번역이 된 말이 파라디도미입니다. 이렇게 그 파라디도미라는 단어는 배반하다 넘기다 붙잡히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에 의해 파라디도미된 것입니다. 그 넘기움이 바로 하느님이 예수님을 당신의 손으로 옮기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설교를 하다가 갔습니다.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세상에게 잡혔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잡혔습니다. 세례요한은 세상에게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게 잡혀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본시오 빌라도도 역시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꺼려서 몇 번을 놓아주려 했었던 것을 우리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그렇게 세례요한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삶을 그림자처럼 살다가 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내어줌의 삶이 세례자요한의 삶 속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세례자요한의 삶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일까요?

 

(마르6:7~13) 7 열 두 제자를 불러 더러운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 8 그리고 여행하는 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며 먹을 것이나 자루도 가지지 말고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며 9 신발은 신고 있는 것을 그대로 신고 속옷은 두 벌씩 껴입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디서 누구의 집에 들어가든지 그 고장을 떠나기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11 그러나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는 고장이 있거든 그 곳을 떠나면서 그들을 경고하는 표시로 너희의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이 말씀을 듣고 열 두 제자는 나가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치며 13 마귀들을 많이 쫓아내고 수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바로 밑에 세례자요한의 이야기가 붙어 있습니다. 중략하고 25절부터 보겠습니다.

(마르6:25~30) 25 그러자 소녀는 급히 왕에게 돌아 와 '지금 곧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가져다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왕은 마음이 몹시 괴로왔지만 이미 맹세한 바도 있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그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27 그래서 왕은 곧 경비병 하나를 보내며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감옥으로 가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건네자 소녀는 다시 그것을 제 어미에게 갖다 주었다. 29 그 뒤 소식을 들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장사를 지냈다. 30 사도들이 돌아 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예수께 낱낱이 보고하였다.

28절에 두 번이나 반복이 되어 등장하는 주다라는 단어가 파라디도미라는 단어의 어근이 되는 단어 디도미입니다. 요한에게서 예수님의 내어줌의 삶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30절입니다.

마르코가 67절에서 13절까지에서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열두제자의 파견을 기록하다가 갑자기 세례요한이 세상에게 내어줌이 되어 세상에 의해 목이 잘려 죽는 것을 회고의 형식으로 기록을 한 다음 그 세례요한의 이야기의 끝을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다시 모여서 자기들이 행한 것들을 주님께 보고하는 것으로 끝을 내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전개가 마치 13절과 30절 사이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그런 에피소드가 끼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세요? 이게 양쪽에 빵이 놓여 있고 그 사이에 그 빵을 설명하는 속에 들어 있는 것. 샌드위치 구조 수미 일치법입니다. 그러니까 양쪽에 빵의 역할을 하며 놓여있는 제자들이 파견 이야기 가운데 세례요한의 죽음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주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이 바로 목이 잘려 죽는 모양으로 나타나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례자요한을 포함한 하느님의 자녀들의 삶속에서 예수님의 버려짐의 삶이 나타나게 되는 이유가 뭘까요?

첫 번째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세상에게 내어주시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버려짐의 삶을 체험함으로 해서 그들이 어떠한 지경에서 구원을 받았는지를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에 의해 버려짐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이 침묵하시는 것과 같은 그런 암흑의 시간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세상에게 내어주시는 이유는 당신의 백성들이 그렇게 세상이 휘두르는 철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권능이 그 백성을 지키고 계심을 마귀와 세상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세상의 공격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성도를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결국에는 완성의 자리에 세우시고 마신다는 것을 마귀와 세상에게 보여주시고 또 우리들에게도 경험케 하시기 위해 하느님은 성도를 세상에게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느님이 성도를 세상에게 내어주시는 이유는 그들이 그러한 내어줌의 삶을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죽고 세상에 대해서 죽게 만들기 위해 성도를 세상에게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세례자요한이 예수님을 만나자 그는 커지셔야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성도의 삶이 그러한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없으면 도저히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그러한 불가능하고 무능력한 존재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커지고 내가 작아지는 삶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러한 내어줌의 삶을 통해 철저하게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부인하게 되고 하느님의 뜻과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완전히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목적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삶에 시작되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는 소원성취 만사형통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삶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의 완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영광을 위해 살던 자리에서 내려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나의 영광을 불태우는 삶으로의 전환이 우리의 목표 지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장의 결론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12:47-48) 47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단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 그러나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세상 끝날에 그를 단죄할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방종을 조장하는 그런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지 않아도 심판을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켜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자들임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러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히 하느님 앞에 무엇을 행위와 업적으로 디밀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면 됩니다. 그게 영생입니다. 그래서 본문 50절이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12:50) 50 나는 그 명령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나 아버지께서 나에게 일러 주신 대로 말하는 것뿐이다.'

여기서 일러준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엔톨레율법 계명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라 하면 사랑하고 용서해라 하면 용서하고 감싸주라 하면 감싸주는 것이 永生이라는 것입니다. 뭐 특별히 다른 것 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행복의 극치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 백성들의 존재 목적은 하느님을 예배하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순종의 자리에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력을 풍성하게 부으셔서 우리에게 당신이 누리시는 모든 적인 을 누리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쫓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쫓는 삶을 사시오. 마지막 결론으로 요한일서 215절 이하를 읽고 마치겠습니다.

(1요한 2:15~17) 15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마음 속에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쾌락과 눈의 쾌락을 좇는 것이나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17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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