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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05.07)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05-07 조회수2,058 추천수2 반대(0) 신고

 


2020년 5월 7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도 13,13-25

13 바오로 일행은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가고,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14 그들은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15 율법과 예언서 봉독이 끝나자

회당장들이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형제들이여, 백성을 격려할 말씀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바오로가 일어나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살이할 때에 그들을

큰 백성으로 키워 주셨으며, 권능의

팔로 그들을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18 그리고 약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의 소행을 참아 주시고,

19 가나안 땅에서 일곱 민족을

멸하시어 그 땅을 그들의

상속 재산으로 주셨는데,

20 그때까지 약 사백오십 년이

걸렸습니다. 그 뒤에 사무엘 예언자

때까지 판관들을 세워 주시고,

21 그다음에 그들이 임금을 요구하자,

하느님께서는 벤야민 지파 사람으로서

키스의 아들인 사울을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임금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22 그러고 나서 그를 물리치시고

그들에게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복음 요한 13,16-20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17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8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19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공자의

‘논어’ 첫 구절이 생각납니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제때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뜻입니다.

배우고 익힘으로써 변화하고

성숙해지는 자신을 보는 일보다

기쁜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에 과연 그런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겠냐는

의문이 듭니다. 누군가에게

배운다는 것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특히 자기 생각과 다르면 그 안에서

배우려는 생각보다는 무조건

반대하려는 마음을 갖습니다.

이런 마음에서 과연 기쁠 수가 있을까요?

얼굴 붉히면서 싸우지

않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보통 거의 하루에 한 권꼴로

 책을 읽습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기쁨을 얻습니다.

사람들과 만남에서도 배우고

 익히려고 노력합니다. 내 생각과

전혀 다르다 해도 찾으려 노력하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자리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틀렸다는 생각을

놓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하기가 힘듭니다.

그 근거를 물으면 인터넷에 다 나와 있는데

그것도 몰랐냐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식한 사람 취급을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평생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인터넷의 자극적인

가짜 뉴스만 보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양한 앎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한쪽으로만 기울어진 생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종들이 주인과

똑같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즉,

예수님은 당신 종들이 한없이

겸손해져서 당신과 똑같아지기를

 바라는 사랑 많은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그 겸손을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겸손을 스스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 겸손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사도들을 맞아들이는 것에서 보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더욱더 확대되어서 이웃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을 보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내 생각과 다르다고 반대하고,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반대하고,

 내 편이 안 되었다고 반대하고,

나보다 가진 것이 많다고 반대하고,

나보다 더 능력이 뛰어나다고 반대하고,

나보다 행복해 보인다고 반대하고…….
예수님을 너무나도 많이 반대했던

우리였습니다. 반대했던 사람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

이유는 그들 안에도 예수님께서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조건 반대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의미를 찾으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 일상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영이 온전히

하느님 안에 있을 때,

세상은 완전히 잊힌다.

(실루아누스)

이해한다는 것.

“세상이, 그리고 사람들이

날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상담 오신 분에게

 “무엇을 원하세요?”라고 묻자

곧바로 하신 대답이었습니다.

이분은 이것이 늘 불만이었습니다.

친구도 자기를 이해해 주지 않고,

가족도 자기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관계라면 당연히

이해해줘야 하지 않나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이분은 자기가 사랑의

관계라고 말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한 불평과 불만을

계속해서 던지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이 먼저 이해하고 지지해야,

나에 대한 이해와 지지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만을 이해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해 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랑의 관계라 할지라도 상대방이

 내가 아니기에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먼저 내가 나를 이해하고,

여기서 더 나아가 다른 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서 함께 하는 관계의

여지가 생겨납니다.

(주님과 같은 겸손의 모습에서

성령께서도 함께하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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