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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2020년 노동절 담화문에 대한 비판!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20-05-11 조회수2,096 추천수0 반대(4) 신고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5)”는 하느님 말씀을 인용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2020년 노동절 담화문에 대한 비판!

 

<이번 주교회의의 노동절 담화문은 두 성경 구절(요한21,15; 요한16,33)을 인용하여 그들의 주장을, 언제나처럼 하느님의 말씀인양, 거짓으로 포장하여 국민들을 오도하려고 시도하였다. 왜냐하면 담화문에서 인용한 하느님 말씀의 본래적 뜻은 그런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증거 하기 위하여 두 방면, 곧 그들이 인용한 성경의 본뜻을 묵상하고(1, 2), 그 후 그들이 엉터리로 해석하여 진짜처럼 포장한 담화문 내용을 분석함으로써(3), 이들이 하느님 앞에서의 무자격, 곧 그들은 하느님께서 정한 사역자가 아닌 가짜임을 증거 하고자 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이들이 인용한 하느님의 말씀이, 주님의 의도대로 제대로 해석되고 인용되었는지 당신도 비교해 보시라! >

 

(그들이 인용한 성경 본문의 본뜻)

1.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5)

2.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담화문 내용 분석)

3.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2020년 노동절 담화문에 대한 비판.

 

 

(그들이 인용한 성경 본문의 본뜻)

 

1.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5)

 

주님은 그분의 양떼를 목양해서 교회를 건축하는 목자로서 일하고 계신다(21,15-17). 목자인 주님은 세 가지 면을 가지셨는데, 하나는 선한 목자이시고(10,11), 둘째는 큰 목자이시며(히브13,20), 셋째는 목자장이시다(1베드5,4). 목양하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단체적인 것이다. 단체는 교회이며 교회는 건축의 의미이다.

 

요한복음 21장과 베드로의 첫 번째 서신에서 우리는 목양이 교회 건축을 위한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천주교회는 극단적인 분열을 보이고 있으며, 하느님 말씀은 사라졌고, 코로나사건이후 문재인정부의 시책에 순종하여 거의 2달간 교회를 폐쇄시켜 예배를 드리지 못하였다. 많은 평신도들을 정부의 시책에 협조함으로써 교회 밖으로 내동덩이 쳤다. 오늘 사무장이 냉담한 평신도에게 밀린 십일조 내라고 고함치고 있다.

 

<그분을 향한 제자들의 사랑을 자극하심>

요한21,15절은 “이처럼 그들이 먹은 뒤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돌보아라), 하시고”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그분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되찾아주고 계셨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었지만 그는 자신의 힘, 곧 타고난 힘을 너무 의지했다. 주님을 위한 그의 사랑은 귀한 것이지만, 그의 타고난 힘은 거절되어야 하며 처리되었어야 했다. 주님은 베드로의 타고난 힘과 자신을 의지함이 처리될 수 있도록 주님의 얼굴 앞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하는 철저한 실패를 허락하셨다(18,17, 25-27).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는 계속적인 주님의 질문에 너무 실망하고 그의 실패를 뉘우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회복시키시고 계셨다. 베드로는 분명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자기 자신의 힘, 곧 자기의 타고난 힘을 너무 과신했다.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귀한 것이었지만, 그는 자기의 타고난 힘을 부인하고 처리해야 했다. 주님은 베드로의 타고난 힘과 자기 과신이 처리될 수 있도록, 그가 세 번이나 주님의 면전에서 주님을 부인하여 철저히 실패하도록 하셨다. 더욱이 베드로는 주님의 부름을 떠나 티베리아스 호수로 물러가는 데 앞장섰다. 베드로는 먼저 성령에 의하지 아니하면,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아야만 했다.

 

주님을 향한 사랑에 대한 그의 타고난 확신도, 이 실패들을 통하여 처리되었겠지만, 베드로는 그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실망과 한계를 체험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시어 그분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회복시키시고, 그분의 교회를 목양하는 일을 당부하셨으며, 그를 순교하도록 준비시키시어 베드로가 자기의 타고난 힘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게 하셨다.

 

<주님은 어떻게 베드로의 타고난 힘을 처리하셨는가?>

주님의 손이 베드로에게서 잠시 동안 떠남으로써였다. 요한10,28절에서 “주님은 아무도 믿는 이들을 그분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주님의 면전에서 세 번 부인함으로써 주님을 배반했다는 것은 주님의 손이 잠시 동안 베드로를 떠났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베드로야, 너는 자신을 너무 의지한다. 내가 너를 붙잡음으로 네가 서 있다는 것을 너는 모른다. 만일 내가 너를 붙잡지 않으면 너는 설 수 없다. 이제 내 손을 잠시 거둘테니까 네 힘으로 설 수 있나 보아라.” 그리고서 주님은 약간 뒤로 물러서셨고 베드로는 넘어졌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당신 스스로가 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우리를 붙잡고 계신다. 우리는 스스로 설 수 없다. 우리 혼자 우리 힘으로 스스로 사역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베드로의 자아는 너무 강했고 자신을 너무 의지했기 때문에 주님은 그분의 손을 잠시 동안 거두어야 했다. 그 결과 베드로는 넘어져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더욱이 베드로는 일상생활의 시험에서도 설 수 없었고, 동료들에게 고향의 호수로 물러가는 것을 주도했다. 그 당시 주님의 공급이 없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아마 그렇게 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뒤로 물러감으로써 드러났다. 주님은 그분의 손길을 잠시 거두셨고 베드로는 완전히 드러났다. 이것이 주님의 처리하심이다.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베드로는 여러 번의 실패로 인하여 내심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여러 번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아무 의미가 없는 줄 압니다.

 

이전에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으나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내가 실패하고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주님,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아시지만 저는 모릅니다. 나는 이렇게 주님께 대답하는 것 외에는 다른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나는 또 실패할 것이며 그것이 두렵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험을 거친 자아가 파쇄된 한 사람을 본다.

 

16-17절에서 “16 다시 두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치라(목양하라), 하시고,

17 세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분께서 자기에게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말씀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며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돌보아라).”고 말씀하신다(원문 참조).

 

16-17절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두 번 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을 본다. 주님께서 세 번째 이것을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깊이 슬퍼하였다. 베드로는 두 가지 이유로 슬퍼하였다. 첫째는 주님께서 이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똑같은 질문을 세 번 받는다면, 우리 또한 매우 걱정스럽고 슬퍼할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주님께서 이 질문을 세 번하심으로서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을 상기시키고 계셨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을 때 그는 불을 쬐고 있었다(요한18,25). 요한복음 21장에도 역시 불이 있다. 불을 피워서 베드로를 상기시켜 주는 주님의 행동은 매우 의미가 깊다. 주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베드로야 저 불을 기억하느냐? 네가 불을 쬐면서, 나를 부인한 것을 기억하느냐? 너는 불 쬐면서 나를 부인했지만, 나는 불을 쬐면서 너를 공급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베드로가 불 쬐면서 행했던 것을 기억나게 하셨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디 있었는가를 기억나게 하셨다. 베드로는 이 고통을 통하여 충분히 배웠다.

 

신약 전체에서 베드로에 대한 가장 좋은 그림은 요한복음 21장에 있다. 나는 21장에 있는 베드로를 매우 좋아한다. 여기에서 그는 부드럽고 온유하고 자아가 파쇄 되었다. 주님에 의해 시험을 거치고 자아가 파쇄 되는 고통을 진정으로 배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린 양을 먹이고 양을 치라고 권하심>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되찾아 주신 후에 주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이나 권하셨다. 요한복음의 앞 스무 장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갖게 하는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일을 강조한다(3,15).

 

그러나 21장에서는 믿는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는 문제이다. 15장에서는 열매 맺는 것은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의 흘러나옴이다. 21장에서 어린 양을 먹이는 것은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 곧 성령으로 양육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풍성을 누려야 한다. 이를 위해 주님을 사랑함이 필요하다.

 

주님을 믿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을 누리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으로 오셨고 생명 공급으로 오셨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믿음이 필요하고 그분을 향하여는 사랑이 필요하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주님께 참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로, 어린 양을 먹이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으로 양육하는 것이며, 둘째로, 양을 치는 것은 교회 건축을 위한 것이다.

 

양을 치는 것은 무리(요한10,14, 16), 곧 교회를 위한 것이다(사도20,28). 그러므로 그것은 하느님의 건축과 관계가 있다(마태16,18). 후에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먹음으로 자라는 것은 하느님의 집의 건축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으며(1베드2,2-5), 장로들에게 하느님의 양 무리를 치라고 권함으로써 그 사실을 나타냈다(1베드5,1-4).

 

양육함으로 자라는 것은 건축을 위한 것이다. 주님은 아직도 그들의 제자들과 함께 이런 방법으로 일하고 계신다. 오늘날 주님은 우리와 함께 어린 양을 먹이고, 양을 침으로써, 교회의 건축을 위하고 계신다. 그분의 모든 양들이 한 무리가 되는 것은 진실로 건축이다. 베드로전서 2장에서 갓난아이들인 우리가 자라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도록 순수한 말씀의 젖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요한21,15절에서 주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고, 16절에서는 “내 양을 치라”고 하셨으며, 17절에서는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친다는 것(shepherd)은 양을 보살피는 것이고, 먹인다는 것은 양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것이다. 친다는 것은 목양을 의미한다. 목양은 먹이는 것을 포함하지만, 먹임에는 목양이 포함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을 섬기면서 그분의 양을 보살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영적인 음식을 먹여야 한다.

 

단순히 형제자매들을 좋아하고 보살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먹여야 한다. 몇몇 가톨릭신학자들은 15-17절의 “치라, 먹이라”는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우월성을 확증시켜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문맥상 적합지 않는 잘못된 해석이다(1베드5,2). 베드로가 맡은 양떼, 곧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가 목자장이시다(사도20,28; 히브13,20).

 

베드로가 맡은 책임은 믿는 이들에게 말씀을 먹이고, 그들을 향하여 목자의 모든 보살핌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도,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도 찾아서 그리하라는 것을 포함한다(마태10,6; 요한10,16). 이 책임을 위해서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들은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것과 “고난당하는 것(18)”과 “나를 따르라(19)”는 것이었으며, 특히 이 책임은 양떼들 위에 군림할 책임이 아니라, 섬길 책임임을 명심해야 한다.

 

2.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요한16,31-33절은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흩어지되 각각 자기 길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버려둘 때가 오나니 참으로 이제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 33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니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터이나 용기를 내어라(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시니라.

 

비록 제자들의 신앙고백(30절), 곧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나름대로 정직하고 신실한 고백을 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한계를 그들 자신들보다 잘 알고 계셨다(요한2,24-25).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를 “너희가 마침내 믿는구나(NIV. You believe at last)”로 옮길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가 그 의미를 더욱 명확히 해 준다.

 

그들이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사실이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성령님의 강림이 있기까지는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상태의 불완전한 믿음이었다. “너희가 다 각기 제 곳으로 흩어지고”는 전능하신 주님의 명령에 의하여 목자가 침을 당하고 결국에는 양 무리들이 흩어질 것이라는 즈카르야의 예언(즈카13,7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너는 목자를 쳐서 양떼가 흩어지게 하여라. 나도 손을 돌려 그 새끼들을 치리라”)의 성취이다.

 

제자들의 충성과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곧 비참하게 그분을 잃게 될 것이다. “나를 혼자 둘 때가”는 그 제자들이 그분이 체포되시던 순간에 그분을 버리고 도망간 것(마태26,56)과 베드로의 부인(요한,17, 25-26)으로써 성취되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분을 버리시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8,29; 시편23,4; 73,25-26). 그러나 십자가에서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버려두셨다(마태27,46).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니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터이나 담대 하라(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특히 요한14-16장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제자들이 잘 견디어 나가는 것과 그분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이 세상에서의 이중적인 신분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연합하면, 곧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평안이 있을 것이지만 반면에 세상은 절대적인 압력을 가중시키게 된다. 세상의 조직, 하느님의 대적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에 반대하였다(요한1,5, 10; 7,7).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이 악의 구조를 물리치고 승리하셨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탄의 왕국을 쳐부순 “강한 자”로서, 예수님은 승리자였다. 그분은 제자들이 이 사실을 기억하고 그 승리를 함께 누릴 것을 원하셨다. “담대 하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오로지 주님만이 말씀하셨다(마태9,2,22; 14,27; 마르6,50; 10,49; 요한16,33; 사도23,11). 그분이 승리하셨기에 그분과 연합하면 우리도 역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로마8,37).

 

결론적으로 33절은 유월절 주님의 설교 전체, 특히 16장은 겁 많고 소심한 제자들로 하여금 앞으로 어떠한 상황에 직면하든지 평안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행해졌다. 인간이 살고 있는 외적인 환경으로는 세상에서 두렵고 짜증나는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면 어떠한 상황하에서라도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 속에 있게 될 것이다.

 

(담화문 내용 분석)

 

3.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2020년 노동절 담화문에 대한 비판.

 

(1. 가톨릭신문 각 교구청 주교 명의의 원문) ‘모두 두려워 문을 닫아걸고 있을 때에도 오염된 세상 한가운데서 온종일 목숨을 걸고 땀 흘리는 거룩한 이들은 누구입니까? 다들 잠든 이른 새벽,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 계단을 숨 가쁘게 오르내리다 쓰러진 그 노동자가 마지막으로 짊어졌던 짐은 쌀 포대였다고 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과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자기 목숨을 바친 성찬의 삶입니다. 힘겹게 몰아쉬었을 그 거친 숨결은 가혹한 고용 사회에서 과로에 시달리며 일하는 노동자들의 일상적 호흡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노동자는 택배인들을 지칭하는 듯하다. 최근 3년간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제, 52시간제라는 처음들은 경제정책과 기타 생산성과 관련 없는 일련의 좌파정책들의 결과로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 소상공인, 자영업자까지 총체적이고 구조적인 실업난이 가중되어왔다. 특히 우한 폐렴 코로나 사태이후 수출은 단절되었고, 내수는 절망에 가깝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더욱 염려해야할 것은, 코로나 이후 본격적으로 태풍처럼 몰려올 “경제코로나” 위기의 도래이다. 저명한 외국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특히 한국 경제의 경우 IMF때(-5.5%)보다 훨씬 강한, 경제성장률 -12.2% 이상의 심각한 국가 부도까지 예고하는, 문재인이 말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나라’에 직면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빠르면 3-5개월, 늦어도 금년 말까지 극단의 경제적 좌절과 고통과 절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난 세월 경제와 경영을 전공해온 사람으로서 엄청난 불안 속에 휩싸여 왔다.

 

이러한 위기의 와중에서 엎친데 겹친 격으로, 인공두뇌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곧 기술변혁기가 이미 우리 생활에 덮쳐옴으로써, 기술변혁기과 장기불황 내지는 디폴트 위기(국가 부도위기)의 교차점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부도 언론도 이 실상을 보도하고 대비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그 진상을 거짓으로 포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포플리즘과 무상 정책을 남발함으로써 국가부채규모가 증대일로에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국민들은 한국은행의 양적완화정책과 정부의 전 가구 백만 원씩 퍼주기 포플리즘에 속아 이제 곧 닥아 올 경제폭풍의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이런 진실은 오래전부터 예고되었으나, 거짓통계와 속임수로 감추어오다가, 이제 갑자기 경제 불항을 넘어 공황이라는 현실이 밀려온다면, IMF를 훨씬 능가하는 외환위기와 디폴트 위기, 대․중․소기업의 파산은 물론 방만한 정부조직의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며, 대규모 고용 인력의 해고와 국제적 신용 경색으로 우리 경제는 절대 절명의 절벽 위에 서게 될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기술변혁기에 맞물린 일부 온 라인 비즈니스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택배’라는 신종산업이 호황을 누리게 된다. 지금 대․중․소규모의 택배회사가 신종산업으로 수없이 생기고 있다고 한다. 오프라인 비즈니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심각한 장기불황에 들어갔고, 누적된 손실로 새로운 사업으로의 변신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지만 그 근원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환경에서 그래도 이 직종에 종사하게 된 것만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택배인들이 많다고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 직장인들이 구조조정과 해고의 위기가 강하게 닥아 옴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으나, 다른 직종으로의 이전은 물론 신규채용의 기회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몇 년 전부터 이 정부의 경제정책을 보고 ‘베네수엘라행 비행기가 떠났다’라는 불안감으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무능한 경제정책을 강행하고 있는지, 특히 잘못된 경제정책의 변경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택배인들의 삶의 고달픔을 성찬의 삶이니 가혹한 고용사회에서 과로에 시달리며 일하는 노동자들의 일상적 호흡이니, 철지난 운동권의 구호와 같은 천주교 주교들의 굴절된 노동관과 사회관을 보면서 경악하고 있는 것이다.

 

(2. 가톨릭신문 원문) 이들은 또 요한21,1-14절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동력은 비인간적인 삶을 견디며 낮은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못에 찢긴 아물지 않은 손으로 숯불을 피워 몸소 제자들의 아침밥을 해 먹이시던 주님께서는, 지금도 당신 지체인 가난한 노동자들의 상처투성이 손을 통하여 우리 모두를 먹여 살리십니다.” 라고 희한하게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이 표현들은 마치 김정일의 행차를 찬양하는 북한 아나운서의 표현을 연상시킨다. 주교들은 신학교에서 또한 평소에 해방신학에 심취하여, 어처구니없게도 이렇게 학습하다가 성령세례의 체험도 없이 인본주의 사상에 빠져 주교가 되었나 보다. 심각한 것은 해방신학과 주사파로 물든 천주교주교들이 택배인들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폄하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봉 일억 원 이상을 받는 귀족노조들이 국가의 중요부분을 장악하고 기득권과 텃세를 부려왔던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노동시장은 경쟁력을 잃었고 피폐화되었다. 시장원리가 사라지고 경쟁원리가 파괴됨으로써 국민경제전체를 위약하게 만든 주범들인 그들이, 지금 정부의 중요기관들을 장악하고, 심지어 사법부까지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주목하라!

 

(3. 가톨릭신문 원문) ‘세계적 재난 상황에서도 사재기가 벌어지지 않는 대한민국의 독특한 현실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배송노동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고강도 노동이 분명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이 속한 사회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교황청 정의 평화위원회, 간추린 사회 교리, 195항 참조).

 

비좁은 책상에서 일하며 아픈 가족을 돌보아야 했던 콜센타 노동자의 가슴 아픈 사연은 우리의 슬픈 노동 현실을 일깨워 줍니다. 콜센타는 옛날의 공장과 똑같고, 변하지 않는 것은 낮은 임금과 그들의 사회적 지위뿐이라는 어느 여성 노동자의 통찰은 아리도록 날카롭습니다. 50년 전 청계천 평화 시장의 그 열악한 노동 환경이 이 시대에는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주교들의 생각들은 모두가 이 모든 문제가 자본가의 책임으로 사회문제를 지목하고 있다. 이제 콜센타로 방향을 돌린다. 그러면서 콜센타와 여성노동자의 가슴 아픈 사연은 결국 50년 전과 같은 악순환의 되풀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침내 이들 좌파들의 주장을 실행하기 위하여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고, 그들의 좌파정책을 강력히 실행하면서, 나라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신규고용은 차단되었고, 기업은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그 책임으로 따지자면, 주교들 당신들이 주장해왔던 그런 나라로의 변환을 사실상 실패한 당신들과 문재인 정부가 마땅히 져야할 책임이 아니냐? 지난 3년간 이 정부는 사실 하나도 한 일이 없다. 무능력과 허상과 거짓으로 국민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김정일과의 가짜 통일놀이와 이제 막다른 골목에 와버린 피폐화된 경제현실 외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4.15 부정선거의 진실여부와 그 여파가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오도하는 좌경화되어버린 언론을 나팔수로 국민들을 속이고 우매하게 만들어 놓았다. 진실이 숨겨져 버렸다. 나는 기존 언론을 보지 않은지 3년이 되었다.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지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인용하는 그 여성 노동자는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기업이 성장하고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면 이러한 문제는 단숨에 고칠 수가 있다. 그러나 단순한 노동환경적인 문제를 좌파 이념에다 가져다 붙여 정치 선동하면서, 맞지도 않는 신성한 하느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장식하는 당신들의 작태는 가히 마귀적이다.

 

(4. 가톨릭신문 원문)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생태 위기와 재난이 닥칠 때마다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하루의 노동으로 하루를 살아 내는 일용직 노동자와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와 농어민, 외국인 노동자들이 지금 심각한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노동과 일자리는 인간존엄의 근본토대라고 거듭 강조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어느 때보다 에누리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 가정의 생계와 한 가족의 생존을 짊어진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우리 사회가 지켜 내고 우리 교회가 품어 안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람을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리는 폐기의 문화야말로 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집단 감염원임을 기억합시다.

 

‘하루의 노동으로 하루를 살아 내는 일용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와 농어민, 외국인 노동자들이 지금 심각한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도대체 지금 누구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또 자본가, 기업인들의 책임이라는 것인가? 경제를 바닥으로 오작동한 문재인과 그들을 지원하고 사실상 한통속인 당신들의 책임이 아닌가?

 

‘노동과 일자리는 인간존엄의 근본토대라고 거듭 강조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어느 때보다 에누리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을 인용하지 않아도 그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그 인간존엄의 토대인 노동과 일자리의 기회를 누가 상실해 버렸나? 좌파정책 때문이 아닌가? 특히 노동절 날 택배원과 콜센타 근무자만 붙들고 그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을 개선하자는 것인가?

 

이 코로나 경제위기의 파도가 급하게 밀려오는데 말이다. 한국가톨릭주교들, 당신들이 참으로 진실하다면, 이 정부로 하여금 가능한 한 빨리 경제정책의 일대 전환을 아우성쳐야 할 것이 아닌가? 이번 노동절 담화문에서 50년 전부터 불러왔던 그 지겨운 소리를 집어 치우고, 문재인과 그 정부로 하여금 시장경제로의 일대 전환을 주장해야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에 당신들이 순종하는 것이 아닌가?

 

(5. 가톨릭신문 원문) 국가 위기 때마다 되풀이 되는 구호는 ‘고통분담’이지만, 그 고통을 ‘전담’하는 것은 언제나 삶의 벼랑으로 내몰린 가난한 노동자들의 몫이었습니다. 힘없는 노동자의 희생으로 경제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야만적 자본의 논리는 지금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경제 독재이고 새로운 우상입니다(복음의 기쁨, 55항 참조).

 

‘힘없는 노동자의 희생으로 경제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야만적 자본의 논리는 지금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경제 독재이고 새로운 우상입니다’ 또 자본의 논리를 들먹인다. 이 좌파주교들은! 이 어려운 암울한 불경기에 힘없는 노동자의 희생으로 교구청을 옮겨 새롭게 웅장하게 지으려는 교구청건립계획부터 재검토해야하지 않느냐! ‘대궐 같은 xx교구청을 새로 세워 좌파교육장으로 사용하려는 것이냐?’는 오해부터 해명하라!

 

교구청마다 좌파 신부들로 가득 채워졌다는 오해도 해명해보라! ‘야만적 자본의 논리는 지금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경제 독재이고 새로운 우상입니다.’ 야만적이고 불평등하고 연봉 일억이 넘는 귀족 노조로 군림하고 있는 민노총과 좌파빨갱이 교육에 여념이 없는 전교조와 종교계의 정의구현사제단 등의 이단적 사상이 지금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경제 독재이고 새로운 우상이 아닌가?

 

작금의 경제위기가 자본가들 때문에 온 것인가? 문재인과 좌파정부의 기업을 범죄시하는 잘못된 정책운용 때문이 아닌가? 우리 경제가 그래도 이 정도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세계적인 대기업 몇몇의 덕택이다. 세계 선두를 달리는 삼성의 이재용을 감옥가든지 아니면 삼성을 포기하고 국유화하고 노조를 부활하겠다는 시도가 현재 공공연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온 국민들의 눈에는 그 과정들이 지극히 전체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독재적 발상들이다.

 

부정과 거짓과 탐욕과 주사파사상으로 신뢰를 잃은 문재인이 삼성을 탈취 국유화하여 운영한다면, 세계적인 기술을 가진 삼성의 경쟁력이 유지될 것으로 생각하는가? 아마도 공산주의 중국의 대기업처럼 부패의 온상이 될 것이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삼류로 추락하여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들은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고통분담을 “힘없는 노동자의 희생으로”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도대체 상식이 있는 이야기인가? 이들은 19세기에 살고 있는 자들인가? 도무지 현실 인식의 능력이 없는 자들이다. 물론 택배원이나 콜센타 근무자들의 노동조건이나 처우, 업무환경개선도 앞으로 꾸준히 개선되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적하는 것은 작금의 우리 경제 사정에 미루어 우선순위가 다르고, 근무 방식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6. 가톨릭신문 원문) 비정규직 노동자와 장애인, 농민과 여성을 외면한 노동 운동은 무자비한 자본 권력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절박한 위기 상황이 도리어 집단 이기주의를 벗어나 공공성과 공적 가치를 강화하는 노동자들의 참된 연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귀족노조 민노총의 이기주의와 탈법에 기인하는 것이다. 농촌에 가보라! 지금 농민들은 정말 잘산다. 지금도 가난한 농민들을 지원한다고 헌금을 요구하는 가톨릭농민회가 50년 전에는 설득이 되었지만, 지금도 똑같은 구호를 외치고 다니는 것을 보면 한심할뿐 아니라 한참 철지난 웃기는 말이다. 요즘 농민들은 정말 잘 살고 있다.

  

“공공성과 공적 가치를 강화하는 노동자들의 참된 연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를” 또 다른 민노총의 세상과 같은 무서운 세상을 공공연하게 헌법도 고치면서 만들자는 말이냐? 현재도 생산성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정치 이념에 빠진 노조들을 더 연대하여 이 나라를 노조의 나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말이냐? 기업은 다 죽고 노동자들만 남으면 폭망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전체주의 김일성 경제로 죽으려가자는 주장이냐?

 

(7. 가톨릭신문 원문) 어머니 교회는 언제나 가난하고 고통 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아파하고 연대합니다. 목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이 세상 노동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이지 어머니의 교회가 아니다. 목수의 아들인 예수가 노동자라는 말인가? 그래서 노동자로서 부활했다는 말인가? 교회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와 구호를 게으르지 않아야 하지만, 성경적 가난은 육체적 가난이 아니라 주로 영적인 것의 비유로 쓰이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5,3)”을 지칭한다. 여기서 마음은 사람의 “영”으로 번역해야 한다. 곧 “영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이다.

 

사람의 “영”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접촉하고 영적인 것들을 깨닫는 기관이다. 천국을 알고 소유하려면 우리 존재의 이 부분이 가난해지고 비워지며 짐이 내려져야 한다. 이것은 천국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지금까지 철지난 해방신학식의 노동자를 찬양하다가 마침내 또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끝을 맺는다. 이들의 짓을 자주 경험하다보니까 가증스럽기 조차하다.

 

(8. 가톨릭신문 원문) “용기를 내어라(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이 세상에서의 이중적인 신분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연합하면, 곧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평화가 있을 것이지만, 세상은 믿는 이들을 핍박하고 사망에 이르도록 유혹하고 핍박을 가중시킨다. 세상 조직, 곧 하느님의 대적과 그를 따르는 악한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에 반대하고 마침내 십자가상에서 죽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이 악의 구조를 물리치고 승리하셨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탄의 왕국을 쳐부순 “강한 자”로서, 예수님은 승리자였다. 그분은 제자들이 이 사실을 기억하고 그 승리를 함께 누릴 것을 원하셨다. 사실 예수님은 쉽게 말씀하고 계셨다. 어려움이란 언어적 표현이 아니라 제자들이 자기들이 놓여 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인 우둔함 때문이었다. 갈보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가 아버지를 떠나신 일과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실 일을 정당하게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용기를 내어라(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는 말씀은 두려움에 빠져 소심해진 제자들로 하여금 앞으로 어떠한 상황에 직면하든지 평안함을 가질 수 있도록 성령에 힘입어, 성령과 함께, 성령 충만함으로 악한 세상에 대하여 용기를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다른 표현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어떠한 고난의 상황에서도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 속에 있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왜 이 말씀을 엉뚱하게 인용했을까? 한국천주교회 주교님들은? 권위주의시대는 지났다. 교회의 계급도 무의미한 시대에 진입한 것 같다. 자업자득이다. 어느 것이 진리이며, 어느 것이 가짜인지 지금까지 불명확한 것들도 다 드러났다. 이렇게 보면 이 부정과 거짓의 시대에도 어김없이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느껴진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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