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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05.15)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05-15 조회수2,170 추천수9 반대(0) 신고

 


2020년 5월 15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사도 15,22-31

그 무렵

22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자기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뽑아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뽑힌 사람들은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인 바르사빠스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스였다.

23 그들 편에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의 형제인 사도들과 원로들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는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24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25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26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27 우리는 또 유다와

 실라스를 보냅니다.

이들이 이 글의 내용을

말로도 전할 것입니다.

 28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29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30 사람들이 이렇게

그들을 떠나보내자,

그들은 안티오키아로

내려가 공동체를 모아 놓고

편지를 전하였다.

31 공동체는 편지를 읽고

그 격려 말씀에 기뻐하였다.

복음 요한 15,12-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인천과 김포지역에 산발적으로

코로나19 전염병이 재확산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신자와 주민안전을

위해 5월 15일(금) ~ 22일(금)까지

또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이지만,

모두의 안전을 위한 것이기에

성지도 이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물론 저 혼자서 개인적으로 미사는

하겠지만, 성지에 공식적인 11시

미사는 없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럼, 오늘의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20년 전, 전 세계적으로 자폐증

 환자가 급증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시기에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이 여기에

 푹 빠지게 되었지요. 그러자 인터넷이

 자폐증을 부추긴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그것도 권위 있는 옥스퍼드 대학의

연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인터넷의

 해로움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주장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서로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두 사건이라도 우연히

동시에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어느 해에 황새의 수가 증가했는데

동시에 아기 출산도 증가했습니다.

 그렇다면 황새의 숫자 증가가

아기 출산과 큰 연관이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믿을까요?

황새와 사람은 전혀 연관이 없다면서,

 억지로 꿰맞추지 말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판단의 오류 속에서

사는 우리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무조건 옳다는 식으로

주장한다는 것이지요. 신앙 안에서도

 커다란 착각이 있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선택했다는 착각입니다.

자신의 선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은 어렵고 힘든

상황이 되면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제가 당신을 선택했는데, 당신께서는

저를 위해서 도대체 무엇을 하십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믿는 사람은 다른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마치 고통 속에

있었던 욥이 원망하는 아내에게 했던

 말처럼,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 2,10)

라면서 겸손한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겸손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찾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괜히 뽑아 세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어서 주님과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역시 주님에게

어떤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 자신에게 더 큰 혜택이

 돌아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이 계명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

 이 계명을 따르지 않고서는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의 선택을 외면하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먼저 선택하셨음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분명히 더 좋은 선물이 주님의

은총과 함께 주어질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외모나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나와 똑같은 영혼을

 알아보았기에 사랑하는 것이다.

(톨스토이)

부러운 것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학창 시절에는 공부 잘하는

 아이를 보면 부럽고,

운동 잘하는 아이를 봐도 부럽고,

그림 잘 그리는 아이도 엄청 부럽고,

말 잘하는 아이를 보면

특히 부러웠습니다.

이 밖에도 부러운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다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되면서 그 부러움을

 내려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내 삶에 충실하면 충분히

만족스럽게 살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뭐든 1등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공부하고, 조금이라도 좋다고 하면

다 그리로 몰립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즉, 자신의 삶에 충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아닐까요?

특히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내 삶의 한 자락을 차지하게 될 때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욕심, 질투, 비교, 열등감 등은

 나로 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입니다.

 이를 벗어던질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요?

사랑이 있으면 괜히 욕심을

부릴 일도 없고,

 질투하지도 않으며,

비교를 통한 열등감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딱 하나의 계명을 큰소리로

외치셨나 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크기를 묵상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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