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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헛된 것과 실재의 대비(율법 학자들에 관한 경고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칭찬)(마르12,38-44절)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20-06-08 조회수2,336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6월6일(토)/주일복음말씀묵상/ † 헛된 것과 실재의 대비(율법 학자들에 관한 경고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칭찬)(마르12,38-44절)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23,1-36; 루카20,45-47)>

12,35-37절에서 주님은 그분의 반대자들을 굴복시키고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셨다. 대제사장들과 율법 학자들과 장로들과 바리사이들과 헤로데(헤롯) 당원들과 사두사이들이 모두 굴복되었다. 나자렛 예수는 전혀 흠이 없는 분이셨고, 기묘한 인격적인 존재로 나타나셨다.

 

유월절 어린양은 죽기 전에 사 일 동안 흠이 있는지 여부를 검사 받았다(탈출12,3-6). 참 유월절 어린양(1코린,7)이신 예수님 역시 죽으시기 전에 사 일 동안 검사를 받으셨다. 그분은 유월절 엿새 전에 베타니아(베다니)에 오셨다(요한12,1; 마르11,1). 다음 날 그분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가 베다니로 다시 돌아오셨다(요한12,12; 마르11,11).

 

제삼 일에 그분은 다시 예루살렘에 오셔서(마르11,12-15),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유월절 날까지(마르14,12; 요한18,28), 유대의 율법에 따라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로마법에 따라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요한18,28-19,6) 검사받으시기 시작하셨다. 결정적인 함정에 빠뜨리려는 여러 각도의 교활하고 올무를 놓는 검사를 하는 데 정확히 나흘이 걸렸으며, 그분은 그 검사를 흠 없이 완전히 통과하셨다.

 

이는 그분이 하느님으로 하여금 유대인들과 이방 죄인들 모두를 넘어가실 수 있도록 하는, 그분의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한,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어린양이 되실 자격을 충분히 갖추셨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분은 유대 지도자들로 대표된 유대인들 뿐 아니라 로마 통치자로 대표된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죽으셨다.

 

마르12,38-40절은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도 겉치레로 길게 기도하니 더 큰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마르8,15절에서도 주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은 그들의 외식이었으며(루카12,1), 헤로데의 누룩은 그의 정치적인 부패와 불의였다. 율법 학자들에게는 헛된 지식의 문제, 심지어는 성경의 헛된 해석의 문제가 있었다. 율법 학자들은 공허한 방식으로 신학과 교리를 가르쳤다.

 

문제는 오늘날과도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당시와 비교할 때 오히려 더욱 악화되었다. 이것은‘종말에 왔다’는 증거이다. 마르코복음 11장과 12장에 율법 학자들이 수차례 언급되어 있다. 율법 학자들은 주님께 그분의 권위에 관해 물었다(11,27-28). 바로 성경 해석에 관하여 주님께 물었던 자들이 율법 학자들이었다(12,28).

 

더욱이 12,35절에서 주님은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이라 하느뇨?”라고 되물으셨다. 이제 12,38절에서 주님은 특별히 율법 학자들에게 경고하기 시작하셨다.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이 성경을 알고 또한 교리와 신학을 아는 전문가들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들이 구약의 많은 것을 알았을지라도, 그러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

 

율법 학자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그들은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라고 불렀던 사실(시편11,1)에 대해서는 해석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라는 질문에 함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참 사람이신 동시에, 다윗의 주가 되시는 참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 학자들은 공허한 신학, 곧 실재(實在, reality)이신 그리스도가 없는 신학을 가르쳤다. 우리 모두도 오늘날의 율법 학자들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스도가 없는 것은 공허하며 망상이다.

 

당시의 율법 학자들은 구약에 따라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에 관한 빛이 없었다. 그들은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또한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나 특별한 메시지에 그리스도와 복음이 있는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다. 내 일생일대의 가장 놀라운 큰 은총에 대하여 한 가지를 말하고 싶다.

 

지난날 지독한 고난 중에 ‘내가 체험한 그리스도는 누구신가?’를 알기 위하여 성경의 말씀을 사모했고, 마침내 구체적인 길이 나에게 열린 것이다. 가톨릭 신자로서 나는 참으로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를 반복할수록 더욱 말씀을 사모하게 되고, 열리지 않았던 성경의 핵심들이 열리기 시작하고, 교파를 초월한 수많은 양의 영적 독서를 하면서, 믿는 자로서의 ‘나의 현 주소’와 ‘교회란 무엇인가?’

 

‘이제 나는 어떤 믿음의 길을 가야만 하는가?’를 확인하고 선택하게 된 것은 참으로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나의 가톨릭신자 20년을 회고해볼 때, 하느님의 말씀에 대하여는 거의 까막눈에 가까웠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20년간 평신도인 내가 자칭 성경연구가 또는 성경묵상가로 살아오면서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만일 내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지 않았다면, 우상 숭배 또는 망상 속의 종교생활로 삶을 완전히 망쳐버렸겠구나!’라는 두려움 내지는 무서움이었다.

 

인본주의 이념과 특히 좌파로 흘러가는 천주교회와 그 지도자들에 대한 선지자적 선언, 곧“교회쇄신과 회복 및 평신도 지키지 운동”이 얼마나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의‘어느 가톨릭평신도의 하느님 말씀묵상’까페를 연 목적이었다. 그동안 욕설, 저주, 무시, 그리고 나의 무능을 이기고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예배의 중심인지?, 모든 메시지의 중심과 실재와 본질이 그리스도인가를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니라면 그것은 가짜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모든 메시지의 중심과 실재와 본질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혼합과 비성경적인 부분이 너무나 많다. 마침내 하느님의 말씀이 사라지고 있다. 묵시록에 의하면 종교적 바벨론은 사라질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율법 학자들로 가득하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는 많은 가르침들은 성경적이고 학문적이다. 가르치는 많은 자들이 그리스어(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알며 여러 다른 성경 해석에 정통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들의 메시지에서 중심과 실재와 본질이 아닐 수 있음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율법 학자들은 긴 겉옷을 입고, 곧 제사장, 율법 학자, 레위인들이 입었던 길고 흰 술달린 가운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공적인 명칭인 랍비, 주인, 아버지(마태23,7; 루카20,46)라는 호칭을 듣기를 좋아했다.

 

또한 그들을 존경하는 사람들로부터 시장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했으며, 회당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 곧 성경 사본이 놓여있는 전 회중을 바라볼 수 있는 상 앞에 위치한, 권위 있는 자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고, 각종 연회에서도 영예의 자리를 차지하여 주인 다음의 좌석에 앉아 특별대우를 받기를 원하였다.

 

“그들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도,”일세기의 율법 학자들은 자기들의 직무에 대한 급료가 없었기 때문에,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이 바치는 자선에 의존해야 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남용하는 면이 있었다. 이것은 특히 과부들의 호의를 악용하는데 대한 생생한 표현이다. 그들은 비윤리적으로 사람들의 재산을 착복하였으며,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그들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장시간 기도하였다.

 

오늘 날에도 일부 종교기관에서 설립한 복지시설 등에서는 ‘소위 기적을 일으킨다는 용타는 신부가 있다’는 소문을 전국적으로 퍼뜨려 병들고 고난 중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유혹하고 그들의 가산을 삼키는 곳이 있어왔다. 그들은 자선이라고 말하지만, 가산을 탕진한 사람들은 병이 낫는다는 중간 지역 책임자들의 꼬드김과 헛된 소문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가산을 탕진한 예도 있다고 한다. 그들은 당초 설립목적과는 달리 세월이 갈수록 변질되고 세속화된 시설이 많다고 한다.

 

여기에는 시설에 수용된 장애자들을 마케팅하면서 소위 재벌급으로 재산을 모은 대규모 복지시설들도 포함된다. 물론 양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세속화되기 마련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화려한 행동, 명예욕, 탐심, 위선을 꾸짖으셨다.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헌신을 강조하지 않고 경건한 척 하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그런 위선을 요구하였다. 율법 학자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더욱 무거운 형벌을 자초하고 있는 자들이다(야고3,1). 이제 백성들에게 그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심(루카21,1-4)>

41-44절은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주님은 그분의 공적인 가르침을 행하시던 이방인의 뜰(11,15)로부터 여인의 뜰로 들어가셨다. 이 뜰 벽 맞은 편 벽에는 예배자들의 자발적인 제물과 헌금을 거두기 위하여 나팔 모양을 새겨놓은 13개의 연보궤(헌금함)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맞은 편 위치에 자리하시고, 유월절 무리들이 어떻게 헌금함에 그들의 돈을 넣는가를 살피고 계셨다. 주님은 그분의 인성 안에서 사시는 하느님이셨다. 그러한 분으로서 그분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예물을 그분께 드림에 있어서, 어떻게 그들의 충성스러움을 표현하는가를 관심 있게 보셨다.

 

많은 양을 넣은 부유한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이름 없는 한 불쌍한 과부는 두 렙톤을 헌금함에 넣었다. 한 렙톤은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되던 가장 작은 유대인의 청동 동전이었다. 두 렙톤은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이었던 로마 데나리온의 64분의 1의 가치였다(6,37). 마르코는 자기 로마인 독자들을 위하여 다시 로마의 화폐 단위로 그 가치를 말했다.

 

43-44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가운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곧 자기의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관찰하시고서 그분은 하느님께 대한 과부의 충성스러움을 칭찬하셨다. 그분의 관찰력은 사람의 관찰력과 다르시다. 사람의 눈에는 상당히 중요한 사람들, 또는 중요하게 보이려는 사람들도 하느님 보시기에는 별 볼 일없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로부터 제자들의 시선을 돌려서 한 과부에게 향하게 하신다(43).

 

이 과부는 가난하고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녀 안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생동하고 있다(29-30절). 그녀가 가진 마지막 것으로 하느님께 다 맡기고, 하느님으로부터 자기의 삶의 보장을 기대한다. 하느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하느님으로부터 자기의 삶의 보장을 전적으로 기대한다.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리라고 신뢰하였던 것이다.

 

과부는 자신을 위하여 동전 하나를 간직해 둘 수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전적인 헌신에 대한 하느님의 평가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그녀의 예를 사용하셨다. 이제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헌신이 곧 시험당할 것이다(14,27-31). 이 사건은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을 전적으로 죽음에 내어주심을 예증하여 주는 것이다.

 

그들의 풍부함을 드리는 자들은 주님의 마음을 만지지 못했지만, 작은 동전 두 닢을 드린 과부는 주님을 만졌다. 이 여자에게서 제자들과 그리고 미래의 교회는 하나의 모범을 보아야 한다. 율법 학자들에게서는 그러한 모범을 볼 수 없다. “자기의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생존을 위한 모든 물질은 자신을 위하여 얼마나 적게 남겨 놓느냐에 달려 있다. 곧 그분께서 필요를 채워 주시리라는 전적인 신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묘한 대조가 있다. 율법 학자들에게는 공허함과 헛됨이 있으며, 과부에게는 내적 실재가 있다. 우리는 실재를 귀히 여기고 공허함을 주의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돈의 문제보다 더 믿는 이들의 내적 실재를 입증하는 것은 없다. 돈이 믿는 이들의 내적 실재를 입증하는 이유는 인간 생활에서 돈이나 물질적인 소유보다 더 실재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돈과 물질은 당신에게 하느님께 대한 실재가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지배하는 생명주는 영, 곧 성령에 자신을 열어 놓을 때, 이 모든 이상들은 실재적이고 생생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돌아와 체험될 것이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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