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06.16)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06-16 조회수2,249 추천수8 반대(0) 신고

2020년 6월 16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제1독서 1열왕 21,17-29
나봇이 죽은 뒤에,
17 주님의 말씀이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내렸다.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임금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
그는 지금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곳에 내려가 있다.
19 그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그에게
또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20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이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21 ‘나 이제 너에게 재앙을
내리겠다. 나는 네 후손들을
 쓸어버리고, 아합에게 딸린
 사내는 자유인이든 종이든
이스라엘에서 잘라 버리겠다.
22 나는 너의 집안을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의 집안처럼, 그리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안처럼
만들겠다. 너는 나의 분노를 돋우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23 주님께서는 이제벨을 두고도,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4 ‘아합에게 딸린 사람으로서
성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 들에서 죽은 자는
하늘의 새가 쪼아 먹을 것이다.’”
25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26 아합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인들이 한 그대로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27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맨몸에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자루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다.
28 그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29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복음 마태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200mL를 담을 수 있는 컵이 있습니다.
이 컵에 500mL의 물을 담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생각한
만큼의 사랑만을 담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크기가 200mL를 담을
수밖에 없는데 그 이상 되는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서로 사귀는 남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어느 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데이트 비용을
 자기가 더 많이 내는 것 같고,
각종 기념일도 나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은 여자
친구에게 충실하기 위해 다른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는데, 여자 친구는
다른 친구 만나는 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계속 만나고는
 있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랑 크기가 작으면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계속 일어나면서
사랑할 대상으로가 아니라,
내게 피해를 주는 대상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요?
주님의 그 큰 사랑을 받아들이려면
당연히 그 사랑을 받아들일
내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속 좁은
모습이 아니라, 넓은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원수 사랑’이라는 명령을
하신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상대가 친구든
원수든, 믿는 이든 믿지 않는 이든,
어려움에 부닥친 이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원수가 사랑을
받는 것은 자격이 있는 자라서가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는 아무도
미워해야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쁜 것을 없애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원수를 미워해도 그에게
아무런 해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워하게 되면 내 영혼에는
커다란 해가 가게 됩니다.
사랑의 마음이 줄어들어서 주님의
그 큰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데만 머무르지 말고
기도까지 해야 한다는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시지요.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의 사랑 크기가
커지게 됩니다. 이렇게 사랑의
크기가 커지는 사람이 당연히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내 마음의 크기를
키우십시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큰 사랑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내 마음속 은은히 빛나는
 모든 기쁨을 멈추라.
오! 그렇다해도 희망의 불빛은 밝혀두라.
(토마스 캠벨)

의미 있는 삶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갇혀서

직접 삶과 죽음을 함께 경험한 바를

기반으로 ‘로고 테라피’라는 정신이론을

만든 빅터 프랭클 박사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세 가지 방향을 말합니다.
첫째,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통해서.
둘째,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셋째, 삶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이 세 가지 방향을 목적으로 삼고

꾸준히 나아갈 때 삶의 의미가 생겨나고,

그 과정에서 행복, 돈, 지위, 명예와 같은

것들을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를 보십시오.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틀어지고,

내 삶에 충실할 수 없기에

의미를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깨달음을 주십니다.

이것이 내 삶의 의미이며,

지금을 사는 힘이 됩니다.

(성체조배실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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