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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태복음 6:9-1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6-17 조회수2,051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6.18. 연중제11주간 목요일

(공동번역성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태복음 6:9-10)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기도라는 거, ‘프로슈코마이라는 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깨달아서, 그 뜻의 성취를 간구하고, 또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최고의 선물임을 고백하며깨달아야 고백하겠죠?그것을 이웃에게 흘려주는 그 전체를, ‘프로슈코마이, 기도라 부릅니다.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것을 막 졸라서 얻어내는, 그런 종류의 것이 기도가 아니란 거죠? 따라서 기도란, 하느님에게서부터 먼저 시작되는 것이고, 그 기도가 우리 안에서 성취가 되고, 왜냐하면, 그 분이 원하시는 거니까. 당연히 하느님이 원하시는 건, 우리 안에서 성취가 되겠죠? 그 분이 원하시는 어떤 것이 먼저 있어야, 당연한 거죠? 피조물(被造物)! 먼지에 불과한 피조물이, 원함이라는 걸 먼저 가질 수가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원함, ‘프로슈코마이’ ‘프로슈 유코마이라는 건, ‘어디 어디를 향하여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가지다라는 뜻이니까, 하느님의 기도가 먼저 있어야, 그 다음에 우리의 기도가 나올 수가 있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우리의 기도는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는 분까지도 계신데, 천만의 말씀!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기도가 먼저 있고 난 다음에, 그 뜻을 내가 올바로 깨달아, 그 뜻에 성취(成就)에 관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 기도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서 그 뜻이 성취가 되면, 우리를 통해 그것이 이제 하느님께 찬양으로, 기도로 올려지고, 그것이 또 수평적으로 흘려지게 되는 것, 그 전체를 프로슈코마이, 기도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주의 기도문을 가르쳐주신 후에, 세 빵을 구하는 어떤 친구의 이야기를 그 주의기도문에 붙여버리죠? 그리고 이게 이 이야기야!’라고 접속사를 써버린단 말입니다. 그렇게 덧붙여 주시므로 해서, 하느님의 그 선물! 그건, 그 빵!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의 그 빵! 주님의기도문의 내용이 그 빵으로 축약(縮約)이 되거든요. 그 빵! 그 하늘 양식의 그 소중함과, 그리고 그 빵은 누구에게 가면 찾을 수 있는가? 그 빵의 소재지(所在地), 올바로 파악(把握), 그 빵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열심과 노력을 부려 얻어 낼 수 있는 빵이 아니라, 갖고 계신 분이 계시단 말예요. 그 분께 찾아가야 되는 거죠? 그걸 아는 분, 누구에게 가면 그 빵이 있다는 것을 올바로 파악한, 그걸 중보자(中保者), 중재자(仲裁者)’ 라고 하죠. 기도라는 단어가 중보,’ ‘중재라는 뜻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그 중보자로서의 그 성도의 모형(模型), 어떤 이가 빵이 필요해서 밤에 찾아오니까, 그 이가 어떤 이에게 가면 빵을 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빵만이 이 친구를 살릴 수 있다.’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가 문을 두드려 얻어다가 먹이는 거, 전체가 기도란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 하는 거, 산상수훈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잖아! 내 얘기를 잘 들어서, 그걸 너희들 안에 마음으로 갖고 아가페’ ‘사랑으로 갖고 그걸 흘려주는 거, 그것이 지금 내가 너희들에게 이야기 하는 사랑이고 이게 바로 온전함 아니냐?’ 그 네러티브에 주님의기도문이 들어간 거고 그 주기도문이 뭔지 설명하기 위해 세 빵을 구하는 친구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거니까. 그렇게 그러한 그 중보자로서의 성도의 모형! 그것을 주님의기도 밑에 비유에 딱 등장을 시켜서, 그것을 깨달아 안, 그런 성도들의 자세(姿勢), 거기에 대한 하느님의 반응(反應)! ‘! 내가 그렇게 구하는데 안 주겠니?’ 하느님의 반응 반드시 주지!’라는 그 반응! 그것을 잘 설명해 주신 거란 말이죠.

 

주님은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후에, 그러한 비유(比喩)를 이렇게 붙여 주시므로 해서, 진리의 영! 그 성령에 의해 장악(掌握)이 되고, 간섭(干涉) 받기 시작한 성도에게서는, 반드시 구하라! 찾아라! 두드리라!’가 붙어 있었죠? ‘구함찾음아이테오’ ‘제테오.’ ‘두드림의 그 역동적(力動的) 움직임이 이렇게 발동(發動)이 되고, 발출(拔出)이 되고, 하느님은 그들의 구함과 찾음과 두드림의 요구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반응해 주시고, 응답해 주신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약속해 주신 거란 말이에요. 그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한 터럭도 땅에 떨어짐 없이, 전부 다 응답된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주님의 기도문도 하느님의 약속(約束)인 거예요. 우리가 하느님께 뭘 먼저 요구하여, 얻어 낼 수 있는 게 주의 기도문이 아니라, 먼저 그건 하느님의 약속이고, 그게 정말 중요한 것인 줄을 알아, 그걸 요구하게 되는 거예요. 그거 혹시 나는 거기서 제외 되면 안 돼요!’ ‘Pass me not!’ ‘나를 지나가시면 안 돼요! 하느님!’ 그 얘기란 말예요.

 

주님의기도문은, ‘기도는 이거야!’라고 가르쳐 준 게 기도문이니까. 기도라는 건 우리가 뭘 요구하여 하느님께 얻어 내는 것, 이런 의미라기 보단, 하느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것을 내가 성령의 도움으로 깨달아서, 그걸 간절히 원하게 되는 것, 그것이 기도란 말입니다. 주님의기도문을, 약속으로 보게 된 이유(理由), 그 비유의 설명으로 기술되고 있는 그 구함과 찾음과 두드림이라는 그 행위의 그 마지막 항목인 그 두드림, 크로워거든요. 그 두드림이라는 단어와, 두드리면 어떻게 돼요? 열리죠? 하느님은 그 하늘 존재의, 그 존재 메커니즘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지한 이 세상으로, 당신의 말씀! 즉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보내시죠? 깨끗한 영입니다. 그것이. ‘푸뉴마.’ 그리고 그 성령에 의해 무차별 폭격을, 은혜의 폭격이에요 물론, 무차별 폭격을 당하게 된 이들의 마음속에,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반드시 받아내야 할 어떤 빚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단 말이에요. 그건 하느님이 먼저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빚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내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준다고 그랬으니까. 근데 알고 보니까, ‘그거 없으면 나는 존재도 아니네! 완전히 영원히 죽음이네요!’ 그러니까 그건 준다고 했으니까 당연히 받아내야죠? ‘그거 당신이 먼저 준다고 했으니까 빨리 주세요!’ 이렇게 구하게 된단 말입니다. ‘아이테오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하느님은 그들이 구해야 하는 그 생명! 그 하느님의 사랑! 그 진리! 그 아가페의 사랑을, 무언가에 이렇게 감추어서, 모형 안에 내용으로 담아서,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잖아요? 그게 뭐예요? 그게 율법이고, 성전이고, 예수고, 성경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걸 껍데기로만 보면 안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게 감추어졌다는 의미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감추어진 건 어떻게 해야 돼요? 찾아야죠? 그러니까 그 찾아라제테오란 말이에요. ‘아이테오, 구해야하는 게 무엇인지 안 이들은, 하느님이 이미 이 세상에 감추어진 것으로 보내준, 어떤 모형 안에 감추어서 보내준 것을 두드리면서 찾게 된단 말이에요. ‘제테오!’ 그러면 찾게된단 말이에요. 찾을 수 있단 말이죠. 그리고는 결국 그 보물을 찾게 되는데, 그 모든 과정의 한 가운데에, 진리의 영! 그 성령이 계신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성령이 아니 계시고는, 절대로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그리고 발견하여, 내가 모든 것을 팔아, 나의 모든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적인 행위를 다 팔아, 그것을 살 수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거죠. ‘구하라, 구하면, 성령을 먼저 주신다고 그러는 거예요.

 

(루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성령을 주어서, 하느님의 그 진리! 그 아가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는 거예요. 성령이요. 그런데 그 감추어진 하늘의 보물이 어떻게 찾아진다고 그래요? 구하라! 찾아라! 두드려라! 그래야 열려요. 두드려라! 드디어 그 감추어진, 밀봉된, 비밀의 문이 열리게 되는 거예요. 그게 기도의 내용(內容)이요, 과정(過程)이며, 결론(結論)인 거죠.

거기에서 두드리다라고 번역(飜譯)된 헬라어 단어가, ‘크로우라는 단어인데요. 그 단어는 히브리어 나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번역해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두드리다, 크로우, 나카라는 말은 죽일 목적으로 때리다라는 뜻이에요. 단순히 노크하다라는 말이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마태복음, 루가복음 공히 이라는 단어는 없어요. 원문 한 번 찾아보세요. 문이 열린다라고 한글성경에는 적혀 있지만, 원문에는 이라는 단어가 아예 없다니까요. 문을 두드리다가 아녜요. 그냥 뭔가를 두드려라예요. ‘뭔가를 죽일 목적으로 두드려라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뭐를 두드리라는 걸까요? 설마 문을 박살낼 목적으로 두드리라는 건 아니겠죠? ㅎㅎ 그 두드림의 대상(對象)은 따로 있어요. 뭘까요? 세상 사람들이 죽일 목적으로 두드려서, 구약에 보면 뭘 자꾸 두드리라고 그러죠? 하느님이. 반석을 두드리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 반석은 신약으로 오면, ‘예수라고 얘기 합니다. 보세요. 세상 사람들이 살해할 목적으로 두드려서, 그 단어는 채찍으로 치다라는 뜻도 있다고 그랬어요. 채찍으로 쳐서, 살해할 목적으로 치다라는 뜻도 있다고 그랬습니다. 살해할 목적으로 쳐서, 결국 살해해 버린 어떤 분을 거기에 넣어 보면 어때요? 우리 한글성경은 이라고 했는데, 아닙니다. ‘뭘 두드렸다예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린다.’ 그랬단 말입니다. 바로 그 두드림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인 거예요.

그걸 두드리면 뭔가가 나와요?. ‘생수(生水)’가 나온다고 그랬어요. 반석을 두드리면! 그게 그 단어예요. 두드리면! 생수는 뭐래요?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성령이다! 그런다니까요. 근데 조금 아깐 또 ! 어떻게 구하는 자에게 그 성령안 주겠니?’ 그랬잖아요?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양의 문이라고 그랬죠? 그거 두드리는 거예요 우리가. 그 자신이 바로 두드림의 대상이라는 것을 스스로 밝힌 거예요. 그 문은 두드려야 열려요. 그런데 그 두드림은, 반드시 그 문인 그 대상을 살해하는 두드림이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거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한번 잘 생각해보자구요. 주님은 그렇게 세상에게 두들겨 맞아서 살해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맞죠? 원래부터 오신 목적이 그래요. 그렇게 그분이 살해 당하셔야 하늘 문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성경은 그렇게 살해당한 주님을 가리켜서, 지성소를 가리고 있는 휘장(揮帳)이라 그러죠?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휘장(揮帳)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위에서 아래로 쫙 찢어졌죠? 근데 그 휘장이 뭐라고 그래요? 지금 히브리서에. 예수의 육체(肉體). 몸이래요. 그 육체로서의 예수님은 뭘 상징(象徵)하는 거였죠? 그게 찢어져야, 지성소가 보여요. 율법! 예수님이 율법으로 오셨다고 그랬잖아요? 그 율법이 뽀개져야, 두들겨 맞아 부서져야, 그 안의 진리(眞理), 터져 나올 수 있단 말이에요 밖으로. 그래서 그 휘장이 두들겨 맞아 찢어진 거란 말입니다.

하느님의 그 계명(誡命)을 상징하는, 그 휘장! 그래서 휘장이 열 폭입니다. 그래서 항상 병풍도 열 폭이 진품이에요. 원래 열 폭으로 만들게 되어 있었어요. 뭘 가리는 것! 이런 의미로. 하느님의 율법이 하느님의 지성소로 가는 길을, 오히려 막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그게 휘장이었어요. 열 폭으로, 십계명을 의미하는 거죠

그러니까 성경을 말씀을 법으로 율법으로 보게 되면, 지성소는 막히는 거예요. 감춰진 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휘장으로 오셔서, ! 십계명! 율법으로 오셔서, 언약의 기둥 위에서 찢어진 거예요. 반으로. 다섯 다섯으로 찢어진 거라니까요. 그랬더니 율법이 깨져버리고, 그 안의 진리인 지성소가 드러났단 말이에요. 그래서 다윗이 물맷돌 다섯 개! 돌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 한다고 그랬죠? 구약에서. 근데 다섯이에요. 물매! ‘휘장이란 단어예요 그게. 휘장, 다섯 개인 돌로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었던 골리앗을 쳤더니, 그게 무너지는 거라니까요.

 

, 그렇게 율법으로 오신 예수가, 찢어지고, 율법의 문이 부수어지고, 지성소의 은밀(隱密)한 것이, 이렇게 드러난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상의 하느님 살해사건이, 먼저 일어나야 돼요. 예수가 그렇게 안 죽으면 안 된다니까요. 세상이 그 하느님을 두들겨 패서, 죽여 버려야 돼요. 두드려서! 살해할 목적으로 두드려서 그걸 죽여야 된다니까요. 그건 필연적(必然的)인 과정이며, 필수적(必須的)인 항목(項目)인 거예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일어난 게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베드로가 아이! 무슨 소리예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죠!’ 그랬다가 이 마귀새끼야!’라는 욕을 먹은 거예요 하느님에게. ‘사탄아! 그게 하느님의 일을 대적(對敵)하는 거야!’라고 얘기 했다니까요

그러한 세상에 하느님 살해사건을 통해서, 인간과 세상의 그 한계(限界)가 폭로(暴露)되는 거예요. ‘너희들의 율법적 열심은, 결국 하느님을 죽이는 거야!’ ? 그 분의 은혜와 사랑을 거부하는 거니까. ‘우리도 할 수 있어요.’니까. 결국 그 분을 죽이는 거야. 살해하는 거야.’라고 그들의 실체가 폭로되는 게, 세상의 하느님 두드림이에요. ‘죽이는 거예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해 생명사랑을 불어 넣으시는, 그 하느님의 사랑이, 그 혼돈(混沌)과 공허(空虛)와 흑암(黑暗), 그 한계를 덮어서, 하느님 나라를 완성(完成)해내는 거죠? 그게 복음이에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예레미야서에 보면, 이스라엘의 상태였어요. 그런 자들을 하느님의 아들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내는 게, 하느님의 일이란 말이에요. 야곱이 열심히 연마(硏磨)하고 수련(修練)하여, 이스라엘이 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 그렇게 하느님은 하느님나라를 홀로 완성하세요. 그런데 오직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만이, 자기가, 하느님을 두드려 패서 살해한 자라는 것을 인식(認識)하고 인정(認定)하게 된다는 거예요. 다른 이들은? ‘내가 언제 하느님 죽였어요?’ 그러죠? 주님은 뭐라고 그래요? ‘두들겨! 네가 두들겨서 죽였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돼!’라고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그게 두드려라 그래야 열린다.’예요. 네가 두들겨서 그 하느님 죽였다는 거, 도륙(屠戮)하고 살해(殺害)했다는 거, 네가 반드시 알아야 돼!’ 그러는데, 세상은 뭐라고 그러냐면, ‘저놈들이 죽였지. 나는 안 죽였어요. 내가 만약에 그 자리에 있었으면, 내가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해서라도 막았을 거라고 이렇게들 얘기 한다니까요. 그게 오늘날 율법주의이며 인본주의예요. 하느님을 향하여 이 목숨 받치겠다는 거? 그 목숨 바쳐서 하느님을 어떻게 보호(保護)하냐고? 그 목숨이 뭔데? 하느님은 그거 죽은 거라고 그러는데, 자기는 죽어도 살았대요. 그리고 이걸 바치겠다는 거야.

 

내가 죄인 중의 죄인이 맞습니다. 내가 하느님 살해범(殺害犯) 맞습니다.’ 이 고백을 성도는 반드시 해야 하는 거고, 그 일은, 반드시 필연적(必然的)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돼요.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 폭로(暴露)가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덮으신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 수 있게 된단 말입니다. 그걸 자기부인(自己否認)이라고 그러죠? ‘맞아요. 제가 하느님 살해범 맞습니다.’라는 게.

그렇게 되면, 율법으로서의 예수! 행동 강령으로서의 성경! 섬김의 대상인 성전! 그것이 나로부터 사라지게 되죠. 우리가 그걸 모르면, 예수나 성전은 나에게 섬김의 대상이 되고, 성경도 나의 행동 강령이 된다니까요. 그러면 그거 열심히 해서 죽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바로, 그 하느님 살해범입니다. 그런 내가 무엇을 할 수가 있어요? 하느님이 나에게 은혜를 덮어 주셔야죠! 하느님이 나에게 사랑을 부어 주셔야죠!’라고 나를 부인하게 될 때 비로소 내가 살아나는 거라니까요. 그걸 두드린다라고 하는 거예요.

반석인 예수를 두드려야 생수이신 성령! 그리스도가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반드시 예수를 죽여라!’라고 얘기 하는 거예요. 앞 뒤 뚝 잘라서, 그냥 우리 로마노가 예수를 죽이래.’ ㅎㅎ 그러면 절대 안 됩니다. 제가 이단(異端)되는 거예요, 그러면.

 

(요한12:22)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거짓말 하는 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래요. 그러면 예수가 그리스도입니까? 맞아요. 예수가 그리스도인데, 섬김의 대상으로서의 십자가 이전의, 그 예수! 그리고 그 예수가 한 말! 그 예수가 행한 일! 이걸 우리가 그냥 막연히 그게 날 구원 한 거야!’라고 알고 있으면, 우리는 잘못된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거예요.

이게 원문으로 보면 호 아르네오마이 호 티 예수스 우 에이미 호 크리스토스인데요. ‘호 아르네오마이’ ‘부정하다.’ 이런 말이죠? ‘부인(否認)하다.’ ‘호티가 왜냐하면. ‘예수스예수가. ‘! 에이미!’ ‘에이미는 뭐 be 동사니까. 그 앞에 가 붙어 있어요. ‘절대(絶對) 부정(否定)’이라고 나와 있죠. , ‘우 에이미 호 크리스토스.’ 그럼 뭐예요? ‘예수가, 그리스도가 절대 아니라는 것을다시, ‘호티가 앞에 있으니까, ‘예수가 그리스도가 절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다.’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런데 한글성경은 고 를 빼 먹었다니까요.

그러니까 보세요. 그거 하나 빼 먹으면 성경이 이렇게 완전히 다른 책이 된다니까요. ? 그 예수는 사람들 안에, ‘아버지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육체! 율법으로 왔기 때문에. 그러면 그 예수는 죽고, 깨지고, 두들겨 맞아 깨지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생수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아버지로 우리 안에 들어오죠. 그렇게 되면, 내가 생명(生命)을 얻는 게 되고, 내가 아들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 예수가 아버지로 내 안에 들어와야, 그리스도의 영으로 내 안에 들어와야, 내가 아들이 되는 거죠?

 

, 이 요한1서가 히브리서 다음에 있어요. 히브리서는, ‘히브리건너가다라는 뜻이니까, 이 히브리서 다음의 책들은 건너간 자들에 대한 이야기란 말예요. 그러면 그 예수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와, 내가 아들이 된, 히브리서가 아들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전부가 다. 그 아들이 된 그 자에게 있어서, 그 안에 들어온 그리스도의 영은 뭐예요? 그를 아들로 낳게 한 거니까.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을 부정하는 자! 그리고 그 예수만! 그리고 그 예수가 한 말! 그 예수가 한 기적! 그 예수가 한 일! 그걸 막연히 내 밖의 사건으로 두고, ‘그것이 나를 구원 했어!’라고 막연히 그냥 추측하는 걸 믿음이라고 갖고 있는 그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 그런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한다.’라는 말이 거기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들이 뭐라고요? 적 그리스도! 사탄이라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 죽으면 안돼요!’ 그랬더니 사탄아!’ 그랬잖아요. 그 얘기라니까요.

그러니까 구하고 찾는 이들은 반드시 두드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반석을! 그 예수를! ‘나카!’ 죽일 목적으로요. 그 율법을 두드려서 살해해 버려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노이고열립니다. 그 지성소의 문이 열려요. 그런데 그렇게 자신이 예수라는 문을 두드려서, 살해(殺害)해버린 자라는 걸 올바로 깨달은 자들은, 이 세상 속 아담으로서의 자아(自我)! 선악과 따먹고 나는 선악의 주체로 얼마든지 선과 악을 구별(區別)하여 선을 추구하고, 악을 멀리하며,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그 삶을 살 수 있어라는 이 자아를 살해당하는 거죠?

그러면 내가 예수를 두드려 죽이면, 누군가 또 나를 두드리는 거네요? ‘내가 그 예수 죽인 자 맞습니다. 내가 두들겨서 죽인 자 맞습니다.’라는 이걸 올바로 깨달아 고백 할 수 있는 자는, 그 자아를 살해당하는 거니까, 누군가 나를 두드려야 될 거 아녜요? 그래서 묵시록에 보면, ‘내가 두드린다.’ 그게 똑같은 단어예요. ‘내가 너 두드리잖아, 열어!’ 그 단어도 똑 같은 단어예요. ‘그럼 내가 들어갈게그런다니까요.

그래서 그 분이 보배가 되어 내 안에 들어오면, 껍데기인 나를 삭제(削除)당하는 거예요. 그게 죽음이라니까요. 서로 두드리는 거요, 서로! ‘우리는 예수님 죽인 자 맞습니다.’라는 이 두드림! 예수님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게 참 된 고백이야? 그럼 너 죽는 거야!’라는 그 두드림! 성도는 신앙생활에서 이거 하는 거예요. 두드리고, 두들겨 맞고, 죽이고, 죽는 겁니다.

 

우리가 이 논리(論理)를 좀 더 확실하게 증명하기 위해서는, 아노이고, 열린다라는 그 단어의 용례를, 함께 살펴봐야 돼요. 단순히 오픈이라는 그런 말 아녜요 그 단어 자체가 아노’, ‘아나위에 것이라고 그랬죠? ‘에피는 공간적 위지만, ‘아나, 아노뗀, 위의 것으로 나야 돼’, ‘거듭남아노뗀이잖아요? 그게 위의 것으로 나라라는 말이라고 그랬죠? 그래서 아래의 입으로 난 자들은 위의 입으로 진리로 반드시 나야 돼위의 것으로 나야 된다, 거듭남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그 아나,’ ‘아노이고아나위의 것이고, 열린다, ‘이고열린다니까, ‘위의 것으로 열린다라는 그런 말이란 말예요. ‘위의 것으로 열린다.’ 그러니까 위의 것으로 열린다는 게 뭐예요? 단순히 문을 연다라는 듯은 아니겠죠? ‘아나이고, 위의 것으로 열린다!’ , 하느님이 아래의 것으로 우리에게 모형으로 여러 가지를 주셨어요. 성전, 율법, 예수, 성경, 사람, 세상, 근데 이것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위의 것으로 열리면, 그게 아노이고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반드시 그 전에 뭐가 선행 돼요? 그 껍데기들이 두들겨져서 깨져야, 열린단 말예요.

산상수훈이 어떻게 시작되죠?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의 시험에,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거야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그 산에 앉으셔서, ’ ‘호 호로스그 성전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딴 데는 평지라고 하는 거예요, . 산이 아니고. 그러니까, 산이야? 평지야? 두 번 얘기 한 건가? 그런 말이 아니라.

성경에서 그 산그러면 그 성전이에요, 예루살렘! 그 산에 앉으셔서,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그러면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 너희를 살리는 거야라고 주님이 말씀 하셨는데, 그 입이 드디어 열리죠? 그러면 뭐를 전해 주겠다는 거야? 살리는 말을 주겠다는 거죠? 그게 진리잖아요. 그래서 율법을 예수님이 입을 열어 진리를 설명해 주시는 게 산상수훈이에요. 열다아노이고예요. 그렇게 열리는 거예요. 두드리면! 그 입이 열리는 거예요. 살리는 말이 나오는, 그 하느님의 입이 열리는 거예요. 두드리면!

그런데 주님이 산상수훈을 이야기 해줬어도 못 알아들었잖아요? 그러면 진짜 그걸 알아들을 수 있는 진리로 그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오셔야 되는 거죠? 그래서 두드려야 열린다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가 죽어야! 반석이 두들겨 맞아 죽어야! ‘열리는 거야, 아노이고.’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율법을 위의 것으로, 열어 주셔야 돼요. 그래야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 단어는 영적 개안(開眼)이 필요한 소경들의 눈 뜸 사건에도 그대로 쓰여요.

 

(마태복음 9:27-30) 27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눈이 멀어, 정말 봐야 할 것을 못 보는 어떤 이들의 모형(模型)이에요. 소경, 귀머거리, 절뚝발이, 문둥병자, 중풍병자, 혈루병자 이건 전부 비진리로 말미암아, 꽁꽁 묶여 있는, 죽어 있는 이 세상 전체를 그냥 모형 하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게 소경이죠? 정작 봐야 할 것을 못 보고 엉뚱하게 법으로, 그냥 문자, 표피적으로 보고서, ‘나는 본다.’라고 하는 그런 자들! 하느님의 말씀을 그렇게 보는 자들을, ‘소경이라 그래요. 날 때부터 소경이에요.) 28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여기서 밝아졌다라는 게 아노이고예요. ‘열렸다라는 거, ‘눈이 열렸다, 감추어졌던 진리가 밝게 보이기 시작했다.’라는 그런 의미로 쓰는 거란 말이죠. 이렇게 감추어졌던 진리가 밝게 열려서,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둘러싸고 있던 껍질이 두들겨 맞아 사라져야 되는 거예요.

 

(마태복음 25:10-12)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성경에서, ‘소녀, 처녀이런 건, 반드시 신랑(新郞)이 있어야, 그 반쪽을 채워, 온전한 것이 되는, 어떤 존재가 그 신랑을 찾지 못했을 때, 불완전한 반쪽으로 있을 때, 그걸 처녀’ ‘소녀라 그래요. 그래서 성경에서 남자를 알지 못한 자! 이거 뭐 굉장히 순결하고 깨끗하고, 이런 의미로 마리아를 묘사한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찬만의 말씀! 마리아란 이름이 쓴 물이란 뜻이란 말예요. 그럼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건 뭐예요? 신랑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의 죽어야 할 자라는 뜻이에요. 그 자에게서, 그 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게 구원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이 처녀! 처녀는 처녀로 있으면 안돼요. 신랑을 만나야 신부(新婦)가 돼요. 그래서 신부와 처녀는 항상 대조가 된다니까요. 근데 여기에서 열 처녀 중에 다섯은 신랑을 만나서, 신부가 되어 들어가는데, 기름을 준비한 자들은! 나머지는 그냥 어리석은 처녀로 남아요. 반쪽을 못 만난 불완전한 자! 근데 그들이,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그래요. 문을 두드리면서 열어 주세요.’ 이게 아노이고예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나는 처음부터 너희들을 몰랐다.’ 그래요. ‘난 너희 못 봤어.’

두드리면 열린다면서요? 어떤 이들한테는 안 열리네요. 열어 달라고 두드리는데, 안 열어 줘요. 왜 안 열어줘요? 기름이 없었어요. 기름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게 없으면, 진리의 말씀은 곧 내 신랑이잖아요? 내 안에 그 말씀이 들어오면, 그게 내 신랑이죠? 내 생명이란 말예요. 나를 낳게 하는 아비이기도 하고. 그게 없으면, 진리의 말씀이 없으면, 첫 남편이로마서 7장의 얘기로 돌아가는 거예요. 첫 남편이, 율법인 남편이아직 안 죽은 자인 거예요. 그 남편이 죽어야, 다른 남자에게 가, 그 남자와 연합하여 사람이 되는 거예요. ‘아들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 율법을 아직 못 죽인 자! 그걸 처녀라고 그래요. ‘어리석은 처녀!’ 그들은 밖에서 계속 에 속해서 살다가, 밤의 것들로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다가, 결국 에 죽어요. 그들은 밖으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 갈일만 남은 거예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를 간다는 건, 양식이 아닌데, 공갈빵처럼 그것을 양식인 것처럼 씹는 거 있죠? 근데 허풍선이야! 하나도 안 씹히죠? 그럼 뭐예요? 이빨만 갈잖아요?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를 뿌드득 뿌드득 갈면서 두고 봐!’ 이게 아니라. ‘양식이 아닌데 그걸 양식인 것처럼 먹고 있는 너희들! 그래 밖으로 쫓겨나서 이만 갈 거야. 내가 죽이지 않아도, 너희들은 그냥 죽어!’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세례 사건 후에, ‘세례(洗禮)’라는 게, 예수님이 아랫물에 빠져 죽고, 위의 아나 바이노위의 것으로 올라오는 걸, ‘세례라고 그러잖아요? 세례 사건 후에 성령이 오시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십자가의 세례! 그걸 세례로 묘사(描寫)하는 거란 말예요. 죽으시자 성령이 오시죠? 성령이 오신다는 건 뭔가가 열린다는 뜻이잖아요? 그 때 무엇이 열린다고 얘기 하냐면? ‘하늘들이 열린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한번 보세요.

(마태복음 3:16-17) 16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 아래의 물! 저주의 물에서, ‘아나바이노.’ 위의 것으로 이제 올라오세요)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그리스도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호라오예요. 영적으로 보는거) 17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늘들안에서 소리가 나와요. 어떤 말이 나와요. 그런데 이것이 아들이고, 이것이 내 사랑이다그래요. 주격이에요. ‘아가페내 사랑하는 아들이다가 아니라, ‘이것이 내 아들이고, 이것이 내 사랑이다예요. 내 안에, ‘하늘들안에서 소리가 나와요. ‘하늘들이 열리고, 그 하늘들에서 성령이 나오는데, , 생수가 쏟아져 나오는데, 그 안에서 그 생수가 어떻게 나오냐면, 하늘들 안에서 나오는 소리로, 많은 물소리 같은 소리로! 나오는데 이것이 아들이고, 이것이 아가페다, 이것이 사랑이다라는 소리로 나오는 거예요.

예수가 저주의 물에 빠져 죽고, ‘아노바이노, 위의 것으로 올라 왔더니’ ‘하늘들이 열리고 성령이 나오는데, 그것이 소리로 나와요. 말로 나와요. ‘이것이 아들이고, 이것이 사랑이다!’ 그러면 그 하늘들이 뭘까요? 오늘 우리가 공부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이거든요. 제가 그 하늘들을 설명하기 위해 지금 여기까지 온 거예요. , 두들겨서 열렸어요. 뭐가? ‘하늘들! 그런데 그 하늘들 안에서 성령이 쏟아져 나오고, 그것이 말로 쏟아져 나오는데, 어떻게 쏟아져 나오냐면, ‘이것이 아들이고, 이것이 사랑이야라고 나와요.

성경에 나오는 하늘, 하느님의 그 고유(固有)한 영역성(領域性)! 그 영역성과 신성(神性)을 상징하는, 그런 영적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며 개념이 맞아요! 그렇다고 해서, 하늘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피안(彼岸)의 공간으로만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늘들은요, 하느님의 그 처소(處所)! 즉 하느님께서 진리로 거하시는, 내용으로 그 안에 거하시는, 모든 곳을 가리키는 영적 영역! 그걸 하늘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그것들이 모형(模型)이 많기 때문에 그걸 하늘들이라고 써요.

 

(히브리서 9:23-24)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을 본뜬 모상들은 이러한 의식(, 정결예식)으로 깨끗하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것들은 그보다 나은 제물이 필요하였습니다. 24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하늘들은 우리들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늘들안에, 그 어떤 것이 들어 있어요. 그를 살리는 어떤 것! 그를 하늘이 되게 만드는 어떤 것! 그 어떤 것이 들어 있는데, 그건 참이죠? 그것이! 그것들의 모형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 밖에 그것들은 반드시 율법으로 정결하게 돼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하늘들안에 들어 있는 그것은, 그런 것들로는 절대 정결하게 될 수 없고, 그것과 다른 더 좋은 제이라고 했는데, 이건 최상급이거든요. ‘최고 좋은 그 제물! 그 제물로만 정결하게 돼!’ 그래요, 그 안에 있는 그건.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물이에요. 십자가! 그러더니 갑자기 그리스도가 나와요.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참 것이 알레떼이아예요. 그러니까 진리의 그림자인이런 말이에요. , ‘하늘들 안에 어떤 것의 모형이라는 말이 앞에 나오고, ‘참 것의 그림자라는 말이 나와요. 그러면 하늘들안에 어떤 것이 뭐라는 거예요? ‘참 것의 그림자니까, ‘진리라는 말예요. 알레떼이아니까! 그것! 하늘들 안에 그 진리가 있는데, 그것의 모형들이 뭐예요? 성전이고, 그것이 율법이고, 이렇잖아요? 그것들은 율법의 그 정결예식, 율법의 행함으로, 정결하게 하느님이 정하셨단 말예요.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이 하느님 앞에 이렇게 나타났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그 프로소폰, 그 하느님 되심이 밝히 드러난다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그 안에 들어갔더니, 비밀이, 은밀함이 벗겨졌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프로소폰파님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옮긴 거니까, 하느님이 은밀하게 감추어 둔 것이 그리스도가 하늘들 안에 들어갔더니, 그 안에서 열리더라는 거예요. ‘진리로 열리더라.’ 이런 말이에요 이게. 그렇다면 예수가 제물로 죽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들어가서, 하느님의 은밀한 것을 밝히 드러내어 나타난 그 나타낸, 그 하늘들은 바로 우리라는 게 이제 자명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호 우라노스해 놓고, 복수로 쓰잖아요? 그러면 그냥 교회, 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 그래서 우리를 하느님 나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하늘이에요. ‘너희는 거룩한 나라다그러죠? 하늘.

 

(베드로전서 1:3-4)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위로나게, ‘아노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4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진리의 말씀, 진리의 호흡. ‘프뉴마,’ 생명)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들이란 하느님의 생명의 호흡(呼吸)을 공유(共有)할 수 있게 되고, 그 하느님의 충만한 말씀 안에서 발견된, 진리의 눈을 뜨기 시작한 존재들, 그 자체의 존재 상태를 하늘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느님은 하늘이신 하느님을 예시(例示)하기 위해서, 이 땅에 율법과 예수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주셨어요. , 율법 성경도 하늘을 설명하고 있고, 예수도 하늘을 설명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하느님 나라라고 한 거죠. 그리고 땅의 것으로 주신 성전이, ‘! 그 하늘적인 것,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는 것.’ 그것으로 이 성전이 이해되어지면, 그걸 호 우라노스, 하늘이라고 해요. 그래서 호 우라노스가 그냥 단수로 쓰이면, 그 성전이에요. 그 성전! 그런데 호 우라노스호 호로스라는 단어와 어근이 같다고 그랬죠? ‘호 호르니스,’ ‘그 산,’ ‘그 새,’ ‘그 성전,’ ‘그 하늘다 같은 말이에요. 히브리 사람들은 그 산,’ ‘그 새,’ ‘그 하늘이걸 같은 단어로 쓴다니까요.

, 그 성전과 예수가 진리로 그 그리스도로 깨달아 알아져서, 그것이 마음이 되면, 그것을 생명이라고 그러고, 그 생명을 품은 이들을 성경이 그 하늘들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이 딴 건 다 짝을 맞춰 주셨는데, 그 하늘만 텅 비워 놓은 거예요. ‘하늘은 없잖아요? 파란 하늘이 저 하늘이에요? ㅎㅎ 언젠가 올라가고 말 거야!’하고 계속 가다 보면 하늘이 나와요? ‘하늘은 없어요.

그래서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이라고 그랬잖아요! 하늘이 검다. 가도 가도 끝이 없어. 그건 무슨 말이에요? 바로 그 하늘들이 여기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의 진짜 원형(原形)인 그 하늘은 반드시 존재(存在)한다. 이 세상적인 어떤 것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 하늘이 만약 뭐, 저 멀리 어딘가에, 저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면, 인간들은 반드시 어떤 로켓트를 만들어서도 거기 갑니다. 그러니까 그 하늘은 여기 어디 있으면 안 돼요. ‘그 하늘은 반드시 이 땅과 다른 차원의 것으로 존재 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거기를 텅 비워 놓은 거예요. ‘그 하늘만 없어요. 근데 그 하늘, 우리 안에서, 먼저 맛보아 알게 되는 거예요. 그걸 현실천국(現實天國)’이라 그런다고요

 

, 그렇게 성전과 예수가 진리로 깨달아져서, 그것이 마음이 되면, 그걸 생명(生命)’이라 그러고, 그 생명을 품은 이들을 성경이 하늘들이라고 부른다고 그랬어요. 그러면 그 하늘들안의 그 생명! 그 진리는 무엇을 설명하는 거다? 그 하느님 아버지! 그죠? 진리는 아버지를 계시(啓示)하는 거니까. 아버지의 그 아가페! 사랑을 계시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걸 가진 이들이 아들이라고 그랬어요! 하나만 가진 자, ‘모노게네스, 독생자입니다. 그것이 외아들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있는 그 진리가 아버지! 그러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들 안에 있는 그! 아버지!’ 기도가 이렇게 시작된단 말예요. 그 진리의 영을 선물 받은 성도가, 구하고 찾기 위해서, 율법과 예수를, 물론, 성령의 도우심으로 두드려서 그것이 열리면, 그것이 죽고 열리면, 그 율법의 문을 위에서 아래로 찢어버린 후에 어디로 들어가요? 지성소! 골방에 들어가죠? 그리고 문을 닫으면, ‘그 하늘들안의 그 아버지의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기도하라!’는 거예요. 그렇게 되지 않으면 기도라는 것 자체를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 하늘들 안의 그 아버지란 건, 그걸 한마디로 그냥 축약(縮約)시켜 놓은 거라니까요. 그게 안 되면, 골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너희들이 그 하늘들 안의 그 아버지!’ ‘지성소 안의 그!’가 되지 못하면, 너희들은 프로슈코마이할 수 없어! 이런 뜻이에요.

그렇게 그 율법의 문이 열려 버리면, 그에게, 그 은밀함에 감추어진 그 하느님 아버지의 그 프로소폰, 얼굴호라오깨달아 알게 되어져요. 그때 그 사람 안에 아버지가 들어 있다라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 너를 아들로 낳은 그것! 그 진리죠? 그런데 그거 하느님을, 진리는 하느님을 담고 있는 거니까. 그분이 아버지예요. 그걸 설명해주기 위해, 이런 육적 아버지들을 이 땅에 있게 하신 거예요. 그런데 이 부자 관계만 얽혀 버리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하느님이 내가 칼로 왔다.’ 뭐부터 끊어 낸다고 그래요? 가족 관계부터 끊어 낸다고 그래요. ‘그거는 사실 원형이 아냐.’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 아버지 진짜 아버지 아냐!’ 이렇게 얘기 하는 거죠? 그때 그렇게 그 아버지가 그 안에 들어가 있게 되면, 그 사람은 아들이 된 거고, 거기에서 그 육적 나의 가능성(可能性)과 그 육적 자아의 행위가 이제 전부, 삭제(削除)되는 거예요. 하느님 앞에 몰수(沒收)당하게 되는 거죠. 따라서 골방의 문이 열리게 되면, 예수도 죽고, 율법도 죽고, 이 세상 속의 나도 죽는 거예요. 예수도 두드려 부수어지고, 나도 두드려 부수어지는 거예요. 그래야 문을 열어요.

 

(요한묵시록 3:19-20) 19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사랑해라’ ‘젤러스’) 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는 반드시 책망과 징계 속으로 들어간대요. 죄를 드러내는 책망(責望)과 징계(懲戒)예요. 쉬운 말로 두들겨서 죽이기 위한 책망과 징계! 그 속으로 들어간다는 거예요. 여기서 예수님이 두드린다라고 하셨을 때에 그 두드리다크르월.’ 똑 같은 단어입니다. ‘살해하기 위해 두드려버리는 것.’ 그리고 그 문밖에 서서라는 말을 직역하면, 무슨 성화(聖畵)같은 거 보면 예수님이 문밖에 초라하게, ㅎㅎ 이렇게 서서 계속 두드리고 있는데, 밖에는 손잡이가 없어! 안에서 열어야 돼. 그래야 내가 들어가. 이게 알매니언주의자들이 잘 써먹는 그림인데. 그러니까 우리가 열어야 되는 거라고. 맞아요. 우리가 열어야 되는 건데, 그런 식으로 여는 게 아니라. 이 말은, 문 위로 이스테미, 굳게 세웠다는 뜻이에요. 문은 누구예요? ‘양의 문인 예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이라는 그 문! 그 위로, ‘이스테미!’ 거기서 스타우로스, 십자가가 그언약의 기둥이 서면, 그게 이스테미되는 거예요. ‘서는거예요. ‘똑바로 서다.’ 그 예수라는 문 위로 똑바로 섰다. 완료(完了)예요. ‘똑바로 섰다’ ‘이스테미 되었다.’ 그게 똑바로 섰으니, ‘십자가가 똑바로 섰으면, 인제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두들겨서 죽여야 하는 자들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니가 아니라, ‘내가 그 문 위로 섰다, 세웠다.’라는 거예요. 계약을 이제 세웠다, 성취했다. 그러니까 이젠 두드린다. 그 전에는 두드릴 수도 없어요. 두드려봐야 열릴 문이 없거든요. 그 때는.

내가 문 위에 이스테미, 똑바로 세웠다.’ 이제 두드린다. 두들기면, 내가 너희들에게 먼저 성령을 보냈는데, 그 성령이 그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의 문은 열린다는 거예요. ‘열린다라는 것은 그의 죽음, 그의 육적 죽음, 육체의 죽음을 전제(前提)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한다고 그래요? ‘내 음성을 듣는다고 그래요. 듣고 문을 여는데, 그 진리의 음성이 들리면, 내 육적 자아(自我), 아담적 자아가 삭제(削除)당하는 거예요. ‘너 아니잖아!’ 그러면 그가 듣는 말은 그건 진짜 양식이네요? ‘그러니 내가 네 안에 들어가, 내가 내 양식(糧食)으로 너하고 같이 먹을게. 이젠 네가 들을 줄 알잖아!’ 그런 말이죠. 그런데 그 전에 뭐가 전제돼요? 그 문 위로, 그 문이 무엇인지? ‘이스테미, 똑바로 세우는 일이 전제 돼야 되는 거죠? 그러면 열려요. ‘아노이고예요. 이것도.

그렇게 그리스도가 내 안의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이제 나로 처소(處所)를 삼으면, ‘가 아들이 되는 거죠?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영! 그 진리! 그 말씀이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빠와 아들. 열심히 먹는 거예요. 같이. ㅎㅎㅎ 그래서 안의 그 진리를 아버지!’라고 하는 거고, 그 생명을 가진 자체가 하느님의 처소인,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아브하느님의 성전이란 말이죠 아버지예요. 그래서 예수님도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이렇게 얘기 한 거예요.

 

(요한복음 14:2-3, 8-10, 18-20, 23-24) 2 내 아버지의 집(‘오이키아, 성전’)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너희 안에’)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데이크노미눈에 보이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호라우,’진짜 내용으로알다)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데이크노미눈에 보이는 걸로)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호 코스모스’) 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진리의 영이 온다! 성령이 온다! 아버지가 온다! 그래 놓고, ‘내가 온다!’ 그래요 또. 그러면 그 예수는 아닌 거 아녜요? 다시 와야 하는 예수니까. 이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의 영인 예수! ‘내가 다시 온다.’ 그 내용으로서의 예수가 온다는 거예요. 그걸 진리의 영이라 그러고 그걸 아버지라고 그래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그 내 안에 있는 게, 그게 아버지야!’ 내가 그걸로 올께!’ 그러는 거예요.

우리가 뭐예요, 여기서? 내 안의 아버지와 그리스도죠? 그러면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하나라면서요? . 그러니까 그걸 예수님이 우리라고 그래 버려요. 그 아버지가! 내가! 그리스도가! 너에게 와서 너를 거처 삼겠대요. 조금 아까 위에서 그랬죠? 너희 안에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그랬어요.

그런데 그 처소(處所)가 어떻게 마련이 되냐면? 예수가 죽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들 안에 들어가면, 그들이 성령의 도움으로 그걸 깨달아 알면, 그가 진리를 품은 자가 되어, ‘예수의 처소가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 ‘아버지의 처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내가 들어간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그래놓고. 그러니까 내가 처소 예비하러 간다.’ 그건 나 십자가에 죽으러 간다.’ 이런 말이에요. 하늘나라에 맨션 지으러 간단 말이 아니라, ‘나 죽으러 간다.’ ? 네 들 안에 아버지로 들어가려고. 아버지로 들어가려고.

아버지의 말씀! 그것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가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의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기도부터 이제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때부터가 청원이잖아요? ‘이렇게 해주세요!’ 주님은 그렇게 당신을 진리의 영!’이라고도 하시고, ‘다시 오는 나!’ 라고도 하시고, ‘아버지!’라고도 말씀 하세요. ‘말씀!’이라고도 말씀하시고. 그러니까 아버지가 처소 잡고 계신 하늘은, ‘가 맞는 거고, 교회의 이야기예요. 성경은 다. 예수 안의 교회! ! 가 맞는 거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진리의 영!’ ‘진리의 말씀!’아버지인 거고. 그렇게 되어 다른 이웃들에게, 그 생명 탄생의 현실을 전할 수 있는 그 존재도 바로, ‘아버지인 거예요. ‘아브, 아버지.’ 우리가 그 아버지의 존재가 되지 않으면, ‘기도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라는 말이에요.


, ‘그 하늘들안의 그 아버지라는 그 말이 머리속에 확 들어오죠? 그래야 주님의기도문은 시작이 될 수 있어요. 우리가 바로 그 하늘들 안의 그 아버지의 상태로 존재하는 거예요. 그건 이미 이루어진 거예요. 그게 하느님의 약속(約束)이니까. 주님의기도문이라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뜻이니까 그러면 그 뜻은 이미 이루어졌죠? 그러나 그건, 육체(肉體)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강력한 간구(懇求)! 구함! 찾음이 된단 말이에요. 그거! ‘그 기도를 하시란 말이에요.

우리가 하느님의 은혜로 하늘에서 세워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구하게 되고, 하느님은 이 세상에 은밀(隱密)한 것으로 감추어 두신 ,그 보물을 재테오,’ 찾게 하시며, 우리는 그것을 찾는 동시에, 율법(律法)과 율법으로 오신 예수를, 두드려서 삭제(削除)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러면 그렇게 두드려서 그걸 삭제하게 되면, 드디어 진리의 문이 열리게 되는 거고,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그 은밀한 것 안! 그 골방 안으로 들어가, 그 문을 닫아 버리면, 우리가 그 하늘들안의 그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그 상태가 되는 거예요. 내 안에 진리(眞理)를 품은 자가 되는 거죠. 그러며 이제 비로소 기도(祈禱)가 시작되는 거예요.

 주님의 기도 - 2011년 6월 16일 연중 제 1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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