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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06.18)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06-18 조회수1,997 추천수6 반대(0) 신고

2020년 6월 18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제1독서 집회 48,1-14
1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2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들였고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
3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
4 엘리야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5 당신은 죽은 자를 죽음에서
일으키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말씀에 따라 그를
저승에서 건져 냈습니다.
 6 당신은 여러 임금들을
멸망으로 몰아넣고
명사들도 침상에서 멸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7 당신은 시나이 산에서
꾸지람을 듣고 호렙 산에서
징벌의 판결을 들었습니다.
8 당신은 임금들에게
기름을 부어 복수하게 하고
예언자들에게도 기름을 부어
당신의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9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10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12 엘리야가 소용돌이에
휩싸일 때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엘리사는 일생 동안 어떤
통치자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13 그에게는 어떤 일도 어렵지
않았으며 잠든 후에도 그의
주검은 예언을 하였다.
14 살아생전에 엘리사는
기적들을 일으켰고 죽어서도
그의 업적은 놀라웠다.
복음 마태 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사회 심리학자 매튜 리버먼과
나오미 아이젠버그의 사이버볼
실험이 있습니다. 사이버볼은
세 명의 플레이어가 서로 공을
주고받는 컴퓨터 게임인데,
일정 시간이 지나면 두 명의
플레이어가 실험 참가자에게는
공을 주지 않습니다.
소외를 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기능적 자공명영상(fMRI)’으로
 확인합니다.
그 결과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소외감을 느낀 사람의 뇌는
신체적 통증이 있을 때와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것입니다.
즉, 집단에서 배제되었을 때의
고통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을 때의
고통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를 아마
 한두 번쯤은 모두 체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내 말과 행동을 오해함으로
인해서 생긴 일도 있고, 나의 잘못한
실수로 인해 사람들의 배척을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자기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소외시키는 때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것처럼 큰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은 이러한
폭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폭력을 행사해서는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으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폭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사랑만이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나라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의 마음을
우리가 가질 수 있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기도의 정의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입니다.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대로 기도하고 있을까요?
기도는 하느님께 무엇을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분이 모르실 것
같아서 가르쳐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며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드릴 분이 아니라, 마음을 얻어야 할
분이십니다. 따라서 어떠한 방해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청하는 자세가
우선 필요합니다. 이로써 그분과
긴밀한 관계가 되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대화를 나눈 사람과
가까운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데, 어떤 청을 드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과
가까운 관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과 가까울수록 세상의 폭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사랑을 마음에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시지요.
이제까지 그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
라고 표현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아버지’라고 표현하면서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계신 분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세상의 폭력을 무력화시키는 사랑을
간직하는 방법은 기도뿐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고난이 많았기에
즐거운 이야기를 쓴다.
(루이자 메이 울컷)
틀리다와 다르다.

저도 종종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글을 쓰다 보면 예전의 습관을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글을 쓰고

책을 읽다 보니, 종종 다른 사람의

글에 신경 쓰일 때가 있습니다.
‘며칠’을 ‘몇 일’로 쓰는 경우,

‘낫다’(감기가 낫다)로 써야 할 것을

 ‘낳다’로 쓰는 경우, ‘계발’이라고

써야 하는데 ‘개발’로 쓰는 경우,

 ‘결제’(매매 당사자 사이의

거래 관계를 끝맺는 일을 뜻함)

라고 써야 할 것을 상관이 부하가

제출한 안건을 검토하여 허가하거나

승인할 때 쓰는 ‘결재’로 사용하는

경우 등등…. 하지만 가장 많이

신경이 쓰이는 것은 ‘틀리다’와

 ‘다르다’를 똑같이 ‘틀리다’라고

쓰는 경우입니다.
‘틀리다’는 ‘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르게 되거나 어긋나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르다’는

 ‘비교가 되는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아니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너는 나랑 틀려!”
다른 것을 틀린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 소외되는 사람이 생기게 되고,

절대로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다른 맞춤법이야 틀려도 괜찮지만,

‘다르다’와 ‘틀리다’는 정확하게

사용하면 어떨까요? 분명히 사람을

받아들이는 여유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틀린 그림 찾기’가 맞을까요?

‘다른 그림 찾기’가 맞을까요?)

(예수님께서 여기에 앉으셔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셨다고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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