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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천국의 비밀/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13,3-8; 18-23; 루카8,4-15)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20-07-17 조회수2,019 추천수1 반대(0) 신고

 

2020712/주일복음말씀묵상/ † 천국의 비밀/씨 부리는 사람의 비유(마태13,3-8; 18-23; 루카8,4-15)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매우 단순한 내용인 것 같지만 사실상 깊고 심오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의 임재 안에서 우리 마음의 참 상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감추어진 모든 것이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난다. 본문 3절의 씨 뿌리는 자는 주님 자신이시다(마태13,37).

 

그렇다면 씨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그 안에 생명으로 들어 있는 왕국, 곧 하느님 나라의 말씀이다(13,19). 씨는 또한 아들들, 곧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이다(13,38). 여기에서 세 가지, 곧 하느님 나라의 말씀과 하느님 나라의 아들들과 씨 안에 있는 생명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서로 관련이 되어 있다.

 

이 셋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하느님 나라의 말씀은 사실상 말씀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결국에는 이 씨가 믿는 이들인 하느님 나라의 아들들을 산출한다. 그러므로 씨는 하느님 나라의 말씀을 가리키고, 생명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며, 또한 우리, 곧 하느님 나라의 아들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존재 안으로 뿌려진 생명의 산 말씀이 되심으로 우리는 왕국(하느님의 나라)의 아들들이 되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장이나 가르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늘나라(하느님 나라)가 자랄 수 있도록 생명의 씨이신 그분 자신을 믿는 사람들 안으로 뿌림에 의해서 하늘나라를 건축하심을 본다.

 

하느님의 나라, 곧 천국의 건축은 절대적으로 생명의 성장의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교회가 일과 수고에 의해 건축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는 오직 씨이신 그리스도를 인성 안으로 뿌림으로써만 산출될 수 있다. 이 씨가 사람들 안에서 자라서 교회를 산출할 것이다.

 

말씀 안에 계신 그리스도 자신이 인성 안으로 뿌려진 바로 그 생명의 씨는 교회를 자라게 할 것이다. 교회는 일이나 수고나 교회내의 직책이나 계급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생명의 성장에 의해서 산출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는 가르침이나 일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산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인성 안으로 뿌림으로써만 산출된다.

 

이 씨는 자랄 것이며, 그 안에 있는 생명은 하느님 나라를 산출할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절대적으로 자라는 생명의 문제이다. 하느님 나라의 근원은 생명의 씨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는 예언자나 왕이 아닌 씨 뿌리는 자로 나타나신다. 그분의 손에는 다스리거나 권위를 행사하기 위한 왕권이 없고, 생명을 산출하기 위한 씨가 있다.

 

그분은 그분 자신을 씨로 뿌리기 위하여 씨 뿌리는 자로 오셨다. 우리 모두가 이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만일 우리가 이 이상을 본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생명의 문제이며, 교회는 우리의 인성 안으로 뿌려진 생명의 씨의 성장의 문제임을 알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하느님을 위하여 한다는 잡다한 일들을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복음서를 기도로 다시 읽고 깊이 묵상한다면 최초의 그리스도의 일꾼이 그리스도 자신임을 볼 것이다. 그분은 일을 하시지 않았다. 그 대신 그분은 씨를 뿌리고 계셨다. 자만하고 교만한 자에게는 이 비유가 비밀이다. 이 비유와 주님 자신의 해석에 따르면, 이 씨는 우리의 마음 안으로 뿌려진다(13,19).

 

여기에서 주님은 영에 관해 어떤 것도 언급하시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씨가 뿌려진 장소라고 말씀하신다. 먼저 우리의 마음을 통과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다. 1베드3-4절에서 우리의 영은 우리 마음의 속사람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우리의 영이 우리 마음으로 둘러 싸여 연결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마음을 구성하는 주된 네 가지 부분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혼의 부분과 영의 부분인 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잘 몰랐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그분을 믿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 우리가 그분을 믿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분이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셨다. 곧 우리가 마음을 열어서 그분을 영접했을 때, 그분은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은 그리스도께서 자라는 흙이 아니다. 흙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이 비유는 우리의 마음이 토양, 곧 흙이며 씨가 뿌려져서 자라는 바로 그 장소임을 명백하게 한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비밀이 숨어 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이 뿌려진 밭인 마음에는 네 가지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마태13,4절은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라고 말씀 하신다. (또는 길가)은 사람들의 통행으로 굳어져 씨들이 그것을 뚫고 자라기가 어렵다. 여기서 새들은 악한 자 곧 마귀를 의미하고, 마귀와 그 졸개들이 그 사람의 마음을 이미 상당히 오랫동안 억압해 왔으므로 마음이 굳어져 하느님의 생명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마음이다.

 

믿는 이들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경우가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기 전부터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환경과 타고난 기질에 의하여 그들의 혼(생각, 감정, 의지)에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다. 곧 심리적, 정신적인 상처가 심각한 사람들을 말한다. 심리적 정신적이라는 것은 바로 혼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 사람의 생각의 불균형과 감정의 미성숙을 초래하고, 그들의 깊은 혼의 상처들은 그들의 무의식 속에 깊이 숨겨졌고, 그들의 의지는 이미 악한 자에게 빼앗겨 자유의지가 상실된 연약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이 무의식에 깊이 숨겨진 혼의 상처들은 그들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사로잡아 지금도 그들을 통제하고 있다.

 

만일 교회 안의 많은 믿는 이들이 이처럼 크고 작은 심리적 혹은 정신적 상처들을 숨긴 채 믿음 생활을 시작하고 계속 한다면, 겉모양은 하느님을 열심히 믿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에게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또한 다른 믿는 이들과의 교통에서의 심각한 장애는 물론 혼란과 방해와 갈등과 방어기제로 믿음의 열매를 맺기가 어렵다.

 

이러한 심리적, 정신적 결함과 장애가 그 사람의 무의식 속에 교묘히 숨겨져 있지만, 이러한 깊은 상처들은 쉽게 자각할 수가 없고, 그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 또는 개성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특히 상처가 심각한 사람들은 이처럼 무의식의 통제 아래 있으므로 자기를 합리화하고 거짓으로 자기를 방어함으로 그 원인을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 있다.

 

이것을 심리학적인 표현으로는 자아 방어기제(psychological defence mechanism)라고 부른다. 이것은 자존심이 강할수록, 자신의 인격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할수록, 이 방어기제가 더 발달되고 강하게 작용한다. 또한 머리가 좋을수록 이 방어기제는 교묘하게 자기를 꾸미므로, 언뜻 보기에는 방어기제라기보다는 훌륭한 인격적인 면으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자아 방어기제는 투사(projection), 합리화(rationalization), 지화(intellectualization) 등으로 표현된다. 만일 이러한 방어기제들이 그 인격의 한 부분으로 확고하게 형성되어 있으면, 세상의 현실을 현실대로 바라보기보다는 이 방어기제를 활용하여 그럴 듯하게 꾸민 이유로 반응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정서와 방어기제를 통하여 여과시켜서 사물을 보게 되므로 짙은 색안경을 낀 채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 중이서 이러한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그럴 듯한 이유를 내걸어 현실을 왜곡하고 무시하면서 자기 이론에 열중하여 좀처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객관적인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사회가 왜곡되고 혼란이 가중된다. 마치 세상 사람들 모두가 색안경을 끼고 명화를 감상하는 것과 같은 모양이다. 소위 성직자들을 포함하여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나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어떤 경우는 오히려 대단히 힘든 경우를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이 진리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인 동기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각종 지식과 이론을 동원하여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영적인 성장은 물론 하느님과의 일치도 매우 힘들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의식 속에 자신을 방어하는 성()을 매우 견고하게 쌓아 놓았고, 이것을 자기 자신도 잘 의식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 허구의 성이 잘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방어기제가 어떤 것이며, 어떠한 때에 교묘히 사용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이것이 영적 여정에서 해결해야할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바로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기적 구원이다. 오늘날 교회 내부는 물론 우리 사회 전체가 자기의 얼굴과 정체성을 교묘히 숨기고 살아가고 있다.

 

마치 가면 안에서 가짜 자유를 누리는 가면극과 흡사하다. 오늘날 교회의 부패와 분열이나 정치 사회적 양분화 현상들이 모두가 이로써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대한 문제는 이를 치유하고 교정해야할 교회가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치유할 능력을 가지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오늘 내가 말하고자 하는 중점이 바로 이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더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어릴 때부터의 이러한 심리적 혹은 정신적인 상처들이 무의식 속에 교묘히 숨겨져, 오랜 기간 동안 마치 아스팔트처럼 견고하게 포장된 사람들이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면 그들의 열심과는 반비례하여, 믿는 이들을 분열시키고 교회의 성장은 퇴보되며 하느님의 말씀은 사장(死藏)되어 버린다!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 오늘날의 교회의 실정이 바로 이러하다.교회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크고 작은 심리적,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종합병원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의 표현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교회는 그동안 이러한 문제들을 너무나 등한시해 왔으며, 불행히도 오늘날 영적으로 이것들을 감당하고, 영적인 상담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역자가 전무한 실정이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것은 악한 자와 관계된다는 말씀이다.길과 같은 굳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악한 영에 억압된 자들이다. 이런 부류 사람들의 특징은 극히 세상 적이거나, 성도 상호간 교통이 잘 되지 않거나, 수시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성격이 모난 자이거나, 특히 교회 내에서 자기 신념이나 이념으로 성경의 말씀을 왜곡하면서 이를 가르치거나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영은 혼탁하고 순수하지 못하다. 그들이 교회를 아무리 오랫동안 다녔다고 해도, 말씀에 저항이 오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영적 성장과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들은 도무지 영적인 성장과 변화가 없는 사람들이다. 자기 위주의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들이며, 순간적인 자기변명에 능하고, 매사에 색안경을 끼고 사물을 대하는 객관성이 결여된 사람들이다.

 

19절에서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고, 그들이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람(성직자나 수도자들 포함)들은 아무리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면서 많은 봉사와 사역을 한다고 해도, 생명의 성장이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완전한 치유는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심리적, 정신병리학적인 환자는 완치가 어렵다.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는 상담이나 약을 투약하여 병세를 완화해줄 수 있을 뿐, 그 증세를 완전히 치유할 수는 없다. 어쩌면 장기적으로는 병을 약화시킬 뿐이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치유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말씀이 잘 심겨지지 않으므로, 믿음이 성장되기 어렵고, 결과적으로 지식적인 사람으로 남게 되며, 나아가 성령세례의 체험이 없으므로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역자의 자격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사람을 상담할 수 있고, 그들에게 성령의 통로가 됨으로써, 굳어진 길가와 같은 딱딱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영적인 통찰력과 영적인 능력이다.

 

여기서 영적인 통찰력과 능력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딱딱하게 굳은 마음이 되도록 억압하고 있는 귀신을 묶고 좇아내는 영적인 능력을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이러한 부분에서 얼마나 무지한가? 오늘날 이 사역을 감당할만한 영적인 성직자나 수도자가 존재하는가? 오히려 그들은 이것을 관념적으로 이해하며 부정하고 있다.

 

나는 감히 말하겠다. 한국 가톨릭 사제들 중에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거의 없다고 말하겠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철학적 신학의 지식만 있을 뿐,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신학을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성령에 힘입어 귀신을 축사한 체험이 있는가? 당신의 마음은 딱딱하게 굳은 길인가?

 

당신의 마음은 말씀이 오면 바로 악한 자가 빼앗아 가는가?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잘 모르겠는가? 굳고 딱딱한 길과 같은 마음, 곧 사람들이 밟고 다녀서 딱딱해진 길처럼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악한 영에 억압된 자들이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파서 씨를 뿌린다고 해도 싹이 나고 성장하기는 쉽지 않다. 만일 당신이, 또는 교회가, 딱딱하게 굳어진 믿는 이들의 마음을 열도록 굳은 땅을 파고 구멍을 내고 열어줄 수만 있다면, 그들도 완전한 구원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데 말이다.

 

5-6절에서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20-21절에서 돌밭이나 흙이 얕게 덮인 바위 위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지만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씨가 마음 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을 방해하는 돌과 바위들이, 곧 감추어진 죄들과 무의식 안에 있는 상처들(트라우마), 세상적인 욕망, 자기 연민이나 우울증이 그 사람의 깊은 곳에 숨어 박혀 있는 것이다. 해가 솟아올라 작열하는 햇살은 얕은 뿌리를 말려 태워버리는 환난이나 핍박이다.

 

말씀 때문에 환란이나 박해가 일어나면이란 믿음이 올 때 처음에는 기쁨을 느끼지만, 우리의 마음 안에 숨겨진 성질과 정욕과 자아와 육체와 수시로 부딪친다. 이것들이 흙 밑에 숨겨진 바위들이다. 그러나 딱딱하고 굳은 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 곧 첫 번째 종류의 땅보다는 훨씬 나은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믿는 이들이 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당신은 악한 자에게 억압당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 아니면 흙 밑에 숨겨진 바위들이 있는 사람인가? 당신 안으로 뿌려진 말씀이 당신 안에서 뿌리를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이 모든 바위들이 조만간에 드러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지금 행복하고 주님을 찬양한다고 외칠지라도, 당신 안에는 뿌리가 약하므로 환난이나 핍박이 올 때, 당신은 뿌리 없는 식물처럼 당신을 마르게 할 것이다.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 안에 감추어진 성질과 정욕과 자아와 육체와 다른 모든 소극적인 것들을 파내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7절에서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고 말한다.

22절에서 주님께서는 7절의 말씀을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해석해 주셨다.

 

세상의 걱정이나 재물의 유혹은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받는 피할 수 없는 유혹들이다. 이 모든 가시들은 씨의 성장을 방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시를 통하여 하느님은 당신을 단련시키신다.

세상의 염려나 재물의 유혹이 당신의 것이 됨으로써, 그로 인한 고난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이 고난을 통과하면서 믿음이 성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가시가 그 뿌리 채 뽑히지 않는다면, 말씀인 씨는 자라지 못할 것이다.

 

8절은 또 어떤 씨들은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신다. 좋은 땅은 세상적인 왕래로 굳어지지 않고, 감추어진 죄들이 없고, 금세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속지 않는 좋은 마음을 상징한다. 이런 마음은 순수하게 부담 없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땅이 되어, 말씀이 자라고 열매를 맺고 심지어 백배의 결실을 가져오게 한다(23).

 

이러한 종류의 마음은 사람의 영과 어울리는데 있어서 진실로 순수하다. 그러한 마음은 그리스도가 자라는 좋은 땅이다. 생명의 씨이신 그리스도는 오직 이러한 종류의 마음, 곧 이러한 종류의 흙에서만 자랄 수 있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가 자랄 수 있는 흙이기 때문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매우 단순한 것 같지만 사실상 깊고 심오하다! 그것은 그분의 임재 안에서 우리 마음의 참 상태를 드러낸다. 우리 안에 감추어진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당신은 어떠한가? 모든 것이 혼합되었는가? 당신은 영 안에서 가난하고 마음이 순수한가?(마태5,3)

당신 속 깊은 곳에 감추어진 무의식의 바위들이 있는가? 세상 걱정과 금전의 유혹은 어떠한가?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자라게 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자라게 해야 한다.씨는 곧 말씀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 안에는 교리나 형식이나 지식적인 말씀은 있으되, 살아 있는 실재의 말씀이 사라져 버렸다.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교리와 의식과 의례와 인간의 신념으로 대체되어 버렸다. 만일 그들의 신념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해방신학이라는 이단에 근거한 것이라면 이 교회는 지극히 위험한 지경의 처하게 된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일이나 거창한 의식을 갖춘 왕의 행렬로 오지 않는다! 감추어진 것은 결국에는 드러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오직 우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성장에 의해 건축된다. 주님은 그분 자신을 사람 안으로 씨 뿌리는 역사를 하고 계신다는 것에 우리 모두가 깊은 인상을 받기를 기도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번식으로 건축된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확대이며 우리 안으로 말씀으로 뿌려진 씨이신 그리스도의 번식이다. 이 씨 뿌리는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건축을 위한 예비 작업이다. 그런데 오늘날 천주교회에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사라져 버렸다! 묵시록17장의 종교적 바벨론이 완성되고 있다! 어이할꼬?

알렐루야! 아멘!

 

*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 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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