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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천국의 비밀/겨자씨의 비유(마태13,31-32)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20-07-20 조회수1,874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7월19일/주일복음말씀묵상/ † 천국의 비밀/겨자씨의 비유(마태13,31-32)

 


 

겨자씨는 첫 번째의 비유(씨 뿌리는 자)와 두 번째의 비유(밀과 가라지)에서 언급된 그 씨앗이 아니다. 좋은 밀과 악한 가라지가 있듯이 또한 좋은 종자와 악한 종자가 있다. 그러나 겨자씨의 비유는 네 번째의 누룩의 비유와 대비된다. 겨자씨는 외적인 것인 반면에 누룩은 내적인 것이다.

 

겨자씨의 비유에서 강조점은 겨자씨가 가장 작은 씨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겨자 씨를 가장 작은 것의 상징, 곧 예수님께서도 “너희에게 겨자 씨 한 알만 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향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고 하면 옮겨 갈 것이다”(마태17,20)라고 말씀하셨듯이, 믿는 이들의 불신을 말씀하실 때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13,31-33절에서 주님은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켜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라고 말씀하신다.

 

“겨자씨”는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의 원칙을 상징한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밭”은 세상을 상징한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주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심으셨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가장 작은 겨자 식물은 10피트 정도의 높이로 자라며 가장 키가 큰 것도 15피트 정도의 높이이다.

 

주님은 이 가장 작은 겨자씨가 가장 큰 것이 된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하여 사용하셨다. 1828년 이전의 대다수의 성경 해석가들은 겨자씨가 교회의 외적인 성장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빠른 시간 안에 교회가 세계 전역에 퍼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누룩이 교회의 내적인 성장을 상징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가루 서 말이 온 세상을 상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828년 이후 많은 성경 해석가들은 이러한 성경 해석의 오류를 비난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해석은 전적으로 비성경적이며, 다만 인간적인 상상력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온 세상이 개선될 수 있다면, 앞 구절에서 가라지를 언급하거나 땅의 사분의 삼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성경에서 세상을 나타내는 숫자는 다만 둘(이방인과 유대인)과 넷(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묵시7,9)뿐임을 발견할 수 있다. 앞에 있는 비유는 물론 요한 묵시록에 따르면 우리는 세상이 개선되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겨자씨의 비유를 설명해야 하는가?

 

창세1,11-12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에서 모든 것이 각기 종류대로 지어졌음을 볼 수 있다. 새는 항상 새이고, 채소는 항상 채소이다. 원숭이는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겨자씨는 나무가 되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다. 원래 교회는 가장 작고 가장 연약하며 거의 주목받지 않는 그러한 존재가 되도록 정해졌다.

 

그러나 교회는 나무로 상징되는 대형교회가 되어버렸다. 아니 교황이 있는 하나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교회가 국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통치를 위한 헌법과 법률과 시행령과 온갖 제도가 마치 구약의 율법처럼 믿는 이들을 통제하고 모든 것보다 우선되게 하였다. 물론 가톨릭을 따른 대형 개신교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의 구성은 매우 복잡하고 너무나 크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교회가 시키는 대로 맹목적으로 믿을 것이 아니라 현재의 믿음의 환경을 따져 보아야만 한다. 이미 다 아는 역사적 사실들을 몇 가지 언급해보자!

 

두 번째 비유, 곧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예시된 것처럼 2-3세기 경에 영지주의가 교회에 침입했기 때문이다. 그 때로부터 로마 가톨릭의 손아래서 교회는 수많은 부끄러운 것들을 산출하였다. 4세기 초에 콘스탄틴 대제가 정략적으로 교회를 세상과 혼합했을 때, 하루 사이에 수만 명의 군인들이 세례를 받았고 겉모양만의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사람들은 4온스의 은과 두 벌의 흰 옷을 받을 권리를 얻었다.

 

아! 교회는 나무가 되어 버렸다. 이것이 요한묵시록 2-3장의 일곱 교회 중 세 번째 교회인 버가모 교회에 해당한다(묵시2,12-17). 하늘의 새는 악한 자 사단을 상징한다(마태13,4). 그는 매우 영리해서 그가 어디에 거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악한 자가 어찌 이러한 기회들을 그냥 지나치겠는가?

 

어쩌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실로 터무니없고, 온갖 이방적인 것이 혼합됨으로써 심지어 사단의 본부가 되어 버렸다고 주장하는 성경 역사학자들도 있을 정도이다. 개신교도 역시 크리스마스와 같은 일들에 있어서 로마 가톨릭의 전철을 밟았는데, 이것은 그 새가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개신교에 날아 들어간 것과 같다.

 

그 새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그 나무는 무엇을 언급하는가? 다니엘서 4장20-22절까지는 바벨론의 능력과 권세에 관하여 말한다. 에스겔서 31장 3-6절까지는 앗수르 왕의 권력과 권세에 관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의 나무는 이 세상의 능력과 권세를 가리키는데 특별히 정치적인 방면에 있어서 그러하다.

 

새들은 사단으로부터 온 죄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 안에 있는 죄들은 사실상 온 세상의 죄들을 포함한다. 교회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 죄가 무엇인가? 불행히도 교회는 완전한 혼돈 이라고 할 수 있는 바벨론이 되어 버렸다. 교회는 또한 커다란 온갖 종류의 세상 것이 진열되어 있는 백화점과 같다.

 

가장 영리한 사단은 씨를 삼켜 버렸다(마태13,4). 그러나 사단은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사단은 전략을 바꾸어서 그 나무로 하여금 더 크게 자라게 하여 모든 새들이 거기에 깃들이게 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그리스도교의 간판을 걸고서 사단의 약을 파는 것과 같다.

 

내가 이 부분을 강조하는 것은 사단에게 결코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속지 않기 위해서는 알아야만 한다! 그것도 대충 알면 안 된다! 오늘날의 교회는 교회만 믿고 따라 오라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다! 인본주의에 찌든 엉터리들이 태반이다! 맹목적으로 믿어도 안 된다! 따져 보아야만 한다! 가톨릭 구성원들은 성경을 읽지 않고 너무 모른다!

 

그러나 평신도들이 눈을 뜨지 않으면 교회가 변화되지 않는다! 너무 크게 자란 이 나무를 허무는 일은 그래도 평신도들이 진실에 눈뜨는 길 밖에 없다! 나는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심정이지만,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평신도 개혁운동’을 계속할 것이다. 사단은 교묘하게 그 약점을 파고든다! 오늘날의 세태로 보건데, 교회의 제대까지 사단은 이미 점령하고 있다!

 

주님은 교회에게 무엇을 정하셨는가? 1요한3,1절에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갈라6,14절은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고, 1베드2,11절은 우리가 이방인이요 나그네라고 말한다. 주님께서 정하신 것은 너무나 작아서 심지어 세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은 살아 있는 동안은 하나의 길이요, 죽어 있을 때는 무덤에 불과하다. 실제로 가톨릭교회와 국교회 및 몇몇 개신교는 어떻게 거대하게 되었는가? 곧 겨자씨가 어떻게 거대한 나무가 되었는가? 그것은 그 뿌리가 매우 길고 땅 속에 깊이 박혀서 자양분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이 교회가 자라는 것을 도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영광을 취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왕이며, 전 세계에 한 국가의 왕 이상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왕을 위주로, 추기경, 대주교, 주교, 신부, 장관, 대사 등 철저히 세속적으로 계급화 된 제도 속에서 평신도들 위에 군림한다. 교회와 하느님의 말씀을 독점하지만, 그러나 살아있는 말씀이 사라졌다.

 

영국 성공회의 대주교는 상원 의원이다. 이러한 일이 있을 때 겨자씨는 거대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에서 규모가 제일 큰 개신교회가 이 나라에 10여개나 있다. 채소와 나무는 서로 완전히 다르다. 채소는 일년생 혹은 이년생 풀인 반면에 나무는 다년생 식물이다. 오늘날 교회는 그 나그네와 같은 본성을 상실했다.

 

식물은 잎이 있지만 나무는 가지가 있다. 교회의 사업이 매우 널리 알려져서 교회가 세상적인 분파로 분열되었다. 채소의 뿌리는 짧다. 그러나 나무의 뿌리는 줄기보다 몇 배나 길어서 땅 속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적이어서 세상에 뿌리를 내렸음을 가리킨다.

 

채소는 몇 달 후면 죽지만 나무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교회가 하느님을 소망하는 원래의 태도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교회가 창세기에 있는 원칙 그대로 되돌아가 채소가 되기를 갈망하신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교회는 나무가 되기를 원한다. 나무가 된 교회는 밖의 외양은 있으나 실재(reality)가 없다.

 

더욱이 그 교회는 순결함을 상실했고 세상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이끌 수 없다. 이 때 가장 유익을 얻은 것은 사단인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의 위대함을 흠모하지 말고 우리의 작음을 보존해야 한다. 역경을 견디는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지나가게 하고 안락함을 누리는 데 있어 다른 사람들로 그것을 갖게 하라!

 

우리는 고통 받고자 하는 생각과 그러한 결심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실제로 고통을 통과하는 것보다도 더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의 영이 가난해지지 않는 한 여전히 우리의 호주머니가 가난할지라도 그것을 모른다. 이기는 비결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치에 굳건히 서 있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외형에는 세 가지 항목, 곧 변질된 본성인 가라지와 변질된 외형인 큰 나무와 다음에 다룰 내적 타락과 부패인 누룩의 방면이 있다. 교회들이 소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설립한 수많은 병원들, 중고등학교들, 대학교들, 각종단체들, 신문사들, 방송국들, 대형의 복지시설들, 개신교의 YMCA, 등등 그 모두가 설립취지와는 달리 외형만 있을 뿐 이미 실재가 없다!

 

그곳에는 이미 그리스도가 없다! 그것이 오늘날의 상황, 곧 하늘나라의 외형이다. 그것은 참기름과 참기름 짜는 집의 찌든 참기름 냄새처럼 완전히 차이가 있다. 교회는 그 하늘에 속한 영적 본성에 있어서 땅에 잠시 머무는 겨자와 같아야 한다.

 

그러나 그 본성이 바뀜으로써 교회는 나무처럼 이 땅에 깊이 뿌리를 박고 많은 악한 사람들과 온갖 종류의 일들과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 사상들이 기숙하는 가지들로서 그 사업들이 번창하게 되었다. 이것이 하늘나라(천국)의 외형의 외적 조직을 형성했다. 그것이 나무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나무는 사단이 기숙하는 곳이다. 하느님은 큰 그릇이 아닌 작은 그릇들을 찾고 계신다(1사무10,21; 사도9,15).

알렐루야! 아멘!

 

 

*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을 참고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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