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07.22)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07-22 조회수2,006 추천수7 반대(0) 신고

2020년 7월 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제1독서 아가 3,1-4ㄴ
신부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2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3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복음 요한 20,1-2.11-18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어떤 부부가 주일미사 참석을 위해
성당에 함께 가다가 사소한 문제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강도는
더욱더 강해졌습니다.
 남편은 도저히 못 참겠는지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성당에 못 가겠어.
나는 골프장에나 갈 거야.”라고
말하고서는 성당에 가지 않고
곧바로 골프장에 갔습니다.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골프를 쳐서
그랬을까요? 남편이 골프를 치다가
뒤땅을 쳐서 갈비뼈가 골절되었습니다.
이때 아내는 어떻게 말했을까요?
“봐! 성당 안 가고 골프장에
가니 저렇게 다치지. 꼴 좋다!!”
이렇게 말했을 때 남편이 과연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뉘우치며
회개할까요? 아마 앞으로 성당에
안 갈 확률이 높아질 것입니다.
만약 아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여보, 미안해요. 당신을 화내게 해서
이렇게 된 것 같아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때 남편이, “맞아! 당신 때문이야!”
라고 말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겠지요.
“당신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성당 대신 골프장에 간 내가
잘못이지. 내가 미안해.”
이렇게 말하면서 진짜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의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 대신에 원망과
분노를 상대방에 표현하면서
서로의 간격 차이를 더욱더 넓혀놓습니다.
진정으로 서로의 간격을 좁힐 방법은
상대방의 단점이나 잘못된 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역시도
포용할 수 있는 사랑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오늘 축일의 주인공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조건 없는 사랑을 간직하고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께 대한 실망으로 떠나갈 때,
그녀만이 예수님을 지켰고 그래서
예수님 무덤까지 찾아갑니다.
이 사랑으로 주님과의 간격은
더욱더 가까워졌습니다. “마리아야!”
라는 부르심을 직접 들을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제자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만약 그녀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불평과 원망의 이유로만
바라봤다면, 주님의 부르심과 명령을
들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사랑으로
받아들였기에 예수님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아가서에서는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아가 3,4)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찾는 사람은 바로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찾는 사람으로
살고 있나요?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인생은 일약 ‘대박’이 아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의미있는 발걸음을

 차례차례 밟아가는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

확률과 운명은 다르다.

신학생 때 제일 좋았던 시간은

‘먹는 시간’이었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니 늘 배고팠고

그래서 먹을 기회가 오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고기’를 먹는 날에는 특히 행복했습니다.
‘고기’에 대한 즐거움은 저만이 아닌

거의 모든 신학생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아리 모임,

 교구 신학생 모임을 산에서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할 수 없지만, 당시에는

등산 후에 산 밑의 공터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용했던 불판은 요즘의

프라이팬이나 전용 불판이 아닙니다.

등산하다가 불판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돌을 찾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슬레이트’입니다.

기름이 쫙쫙 빠져서 고기의 담백함을

 더 느낄 수 있다면서 다들 이

 ‘슬레이트’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 ‘슬레이트’가 지금은 1급

발암물질이라면서, 무조건 폐기해야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고기를 ‘스레트’에

구워 먹었었기 때문입니다.

다들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 암에 걸리는 것 아니야?”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 확률과

운명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확률이 높은 것을

마치 운명처럼 생각하는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지요. 당시에 즐겁게

또 좋은 사람과 함께 한 것이기에

몸에 좋지 않은 석면도

좋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요?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확률과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