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07.30)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07-30 조회수2,184 추천수11 반대(0) 신고

2020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제1독서 예레 18,1-6
1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
2 “일어나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가거라. 거기에서 너에게
내 말을 들려주겠다.”
3 그래서 내가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갔더니, 옹기장이가 물레를
돌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4 옹기장이는 진흙을 손으로
 빚어 옹기그릇을 만드는데,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
5 그때에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6 “이스라엘 집안아,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복음 마태 13,47-53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7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53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사제 서품을 받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때,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미사 강론 중에 어떤 말을 해도
 사람들의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재미난 이야기를 해도, 또 진지한
 이야기를 해도 똑같이 무표정입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반응이 없는지….’를
당시의 본당 신부님께 여쭤보았습니다.
저한테 뿐만 아니라, 본당 신부님의
강론에도 똑같이 반응 없음이었거든요.
본당 신부님께서는 “원래 그래.”라고
대답해주셨습니다. 점잖은 것이
우리 사회의 미덕처럼 되어있어서
반응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나니 조금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002년 월드컵 때 다시 혼란이
 왔습니다. 응원하는 우리나라 국민은
전혀 점잖지 않았습니다. 열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신나게 응원하는 모습에서
원래 그렇지 않음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책을 읽고 이곳저곳에
가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교수법을
배우고, 코칭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잘못하고 있었구나.’
우리는 ‘원래 그래.’라는 말로
자신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원래 그런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고 실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원래 그래.”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가장 다양한
모습으로 또 뜻밖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인데 말입니다.
주님은 원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분이십니다. 이 점을 인정할 수
있어야 겸손하게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기 뜻은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가 되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선택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맞이하게 될
 우리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 안에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처럼,
세상 종말에 우리 역시 이렇게
구분되리라는 것입니다. 특히
악한 자들이 갈 곳은 불구덩이 속으로,
이곳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주님의 강한 경고 말씀을
떠올리면서 자신을 내려놓고 대신 주님을
 높일 수 있는 삶을 지금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삶을 살면 늘 내가
기준의 우선 점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높이는 삶을 살면 늘 주님이
기준의 우선 점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원래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내가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논어, ‘선진’ 편 중에서)

고통을 넘어 열정으로...

고통의 라틴어는 ‘Passo’입니다.

그런데 이 라틴어에서 파생되어

나온 단어가 Passion, 즉 열정입니다.

열정이 고통 없이 생길 수 없음을

이 단어를 통해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로 열정과 고통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단지 열정이 커져서

고통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이 하는 운동량은 정말로 많고

그래서 힘듭니다. 그러나 열정이

있어서 이 모든 훈련량을 거뜬하게

이겨내는 것입니다. 오히려

즐긴다고까지 말하지 않습니까?
고통 속에 매여 있다고 생각되면서

좌절하고 절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순간에 나의 열정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 이 열정을

찾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고통

그 자체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열정을 키워줄, 또 발견하게

해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이 역할을 담당해 주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먼저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열정을 부활 사건 안에서

보여주셨습니다.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주님께로 가야 합니다

(못난이 인형. 그러나 못생겼다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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