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0-07-31 조회수2,078 추천수11 반대(0)

1986년 군에 입대하였습니다. 군 생활은 내무반 생활이 중요합니다.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 내무반의 질서와 군기를 주도하는 상병, 실질적으로 내무반의 일을 실행하는 일병, 이제 막 내무반으로 온 이등병입니다. 제게 내무반은 또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신발을 정리하고, 맨 구석에서 눈치를 보면서 지냈습니다. 일도 일머리를 알아야 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리모컨이 있지만 당시에는 손으로 TV 채널을 돌려야 했습니다. 1986년에는 86 아시안 게임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담배를 피우던 병장이 채널 좀 돌려봐라.’라고 말하였고, 저는 뛰다시피 가서 채널을 돌렸습니다. 채널을 볼 수 있는 주도권은 병장에게 있었습니다. 병장의 관심사에 따라서 채널을 돌려야 했습니다. 모두에게 관심이 있었던 축구경기는 함께 보았고, 늦은 시간이라도 일직하사가 눈감아 주었습니다. 돌아보니 아득한 추억입니다.

 

언제인가부터 우리사회는 무선으로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텔레비전, 선풍기, 에어컨이 무선으로 연결되었습니다. 90년대 중반부터는 핸드폰이 보급되면서 공중전화가 사라졌습니다. 빨간색 공중전화, 동전을 넣고 통화하던 공중전화는 이제 추억의 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공중전화 때문에 다투기도 했었습니다. 스마트폰은 이제 움직이는 컴퓨터가 되었습니다. 모든 정보를 검색할 수 있고, 은행업무, 쇼핑, 예약까지 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게임기도 되었습니다. 저도 스마트폰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줌으로 화상회의도 하였습니다. 무선으로 연결되는 것 중에는 블루투스가 있습니다. 컴퓨터, 스피커, 자동차, 스마트폰을 연결해 주는 기능입니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사회(Uncontact Society)가 가속화 될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비대면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우리가 입자로 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파동으로 된 세상에서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입자는 서로 연결되어야만 형체를 이루고, 변화되고, 생성합니다. 원자, 세포, 조직은 이렇게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파동으로 움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에너지라고 하고, ()라고 합니다. 태양은 입자가 아니어도 에너지를 지구에 보내고 있습니다. 파동으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무선으로 연결되는 전기는 파동으로 전해집니다. 신앙 안에서 비대면 사회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에너지가, 하느님의 기운이 세상을 창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도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말씀으로 풍랑은 조용해졌습니다. 말씀으로 소경은 보게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귀머거리는 듣게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물은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의 힘을 믿는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권능과 예수님의 표징을 당연히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던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였던 예언자입니다. 옳은 일을 하였고,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권력의 힘에 의해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고,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세례자 요한 이전에도 이런 억울한 일은 있었고, 세례자 요한 이후에도 이런 억울한 일은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행위는 어리석을 수 있고, 불가능한 일일 수 있습니다. 물리적인 법칙으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일을 통해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교회는 순교자들을 박해하였던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교하였던 분들은 신앙의 별이 되었고, 우리는 그분들의 순교를 기억하고 있으며, 우리의 신앙은 그분들의 피와 땀으로 전해졌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그분들의 순교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많은 표징을 보여 주었지만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억울함을 억울함으로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분노를 분노로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서하였고, 평화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세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세력은 지금 모두 잊혀졌습니다. 하지만 용서를 하였고, 평화를 위해 기도했던 교회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억울하고, 속상하고, 미치고 환장할 것 같은 일들을 만납니다. 그것을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으려하면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용서와 이해, 사랑과 평화만이 나를 참된 안식에로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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