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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08.12)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08-12 조회수1,728 추천수4 반대(0) 신고

2020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제1독서 에제 9,1-7; 10,18-22
주님께서는
1 내가 듣는 앞에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이 도성의 징벌이 다가왔다.
저마다 파멸의 무기를
손에 들고 나와라.”
2 그러자 북쪽으로 난
윗대문 쪽에서 여섯 사람이
오는데, 저마다 파괴의
무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는
서기관 필갑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와서
구리 제단 곁에 섰다.
3 그러자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그때까지 자리 잡고
있던 커룹들 위에서 떠올라
주님의 집 문지방으로 옮겨 갔다.
주님께서는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 필갑을 찬
사람을 부르셨다.
4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저 도성 가운데로,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5 그분께서는 또 내가 듣는
 앞에서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도성을 돌아다니며 쳐 죽여라.
동정하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마라.
6 늙은이도 젊은이도,
처녀도 어린아이도 아낙네도
다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내 성전에서부터
시작하여라.”그러자 그들은
주님의 집 앞에 있는 원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였다.
7 그분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집을 부정하게 만들어라.
그 뜰들을 살해된 자들로 채워라.
가거라.” 그러자 그들은 도성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쳐 죽였다.
10,18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
문지방에서 나와 커룹들 위에 멈추었다.
19 그러자 커룹들은 날개를 펴고,
내가 보는 앞에서 땅에서 치솟았다.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들도 옆에서
함께 나갔다. 그들이 주님의 집
동쪽 대문 어귀에 멈추는데,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20 나는 크바르 강 가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떠받들고
있는 생물들을 보았다. 나는
그들이 커룹임을 알 수 있었다.
21 그들은 저마다 얼굴이 넷이고
날개도 넷인데,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 같은 형상이 있었다.
 22 또 그들의 얼굴 형상은
 내가 크바르 강 가에서 보았던 모습,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복음 마태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성당을 다니는 한 자매님께
구애를 한 세 청년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시인이고, 또 다른 한 명은
가수였으며, 마지막 한 명은 화가였습니다.
각자 자신의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이 자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시인은 멋진 시로, 가수는 사랑의 노래로,
화가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매는 누구를 선택했을까요?
누구의 사랑이 제일 크다고 느꼈을까요?
이것만으로는 그 누구를 특별히
선택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셋 다 사랑의 표현만 다를 뿐
모두 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 표현도
다양합니다. 누구는 봉사와 희생으로,
누구는 기도와 묵상으로, 누구는
자선과 기부로…. 이 모든 사랑이
다 똑같이 중요하고 큰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모습의 사랑이든 상관없이
기쁘게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것만 더 크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착각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를 판단하고,
다른 이를 형편없는 모습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사랑을
깎아내리는 모습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혼내신 것입니다.
고유한 사랑의 방식. 각자가
보이는 사랑의 색깔을 서로가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함께 마음을 모아서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화합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망과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결국 우리 탓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이나 삶의 방식에서
 일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만 맞고 남은 틀리다는 생각,
나의 사랑만 크고 남의 사랑은
볼품없다는 잘못된 생각 등으로 인해
진정으로 일치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형제가 죄를 지을 때 먼저 단둘이
만나서 타이르고, 말을 듣지 않으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하지요.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을 때 교회에 알리라고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어떻게든 일치하도록
노력하라는 의미입니다.
나와 다르다면 그냥 포기하고
상종도 하지 않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방식은 주님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일치할 수 있도록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우리가 될 때, 그 자리에
주님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기도는 삶에서

첫째가는 일입니다.

우리는 기도문만

읽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혼자보다 함께.

책을 읽다가 가족과 친척을

구별하는 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즉, 가족의 불행은 가슴을 찌르고,

친척의 불행은 연민에서

멈춘다는 것입니다.

이는 혈연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가슴을 찌르는 아픔이 느껴진다면

가족과 같은 관계가 분명합니다.

반대로 혈연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경우도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모두 한 가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족을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혹시나 겪게 될

가슴을 찌르는 고통의 무게 때문일까요?

철저히 남과 남의 관계에서만

머무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올해 코로나 19 감염병 때문에

철저한 거리 두기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가족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혼자’라는 외로움보다 ‘함께’라는

사랑의 관계를 해야 하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함 안에서 하나의 일치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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