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용서 (마태18,21─19,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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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20-08-13 | 조회수2,166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0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용서 (마태18,21─19,1)
(마태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로마서 13:8-10) 8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사랑의 빚)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라는 계명이 있고 또 그 밖에도 다른 계명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0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만약에 다른 이에게, 너희들이 그 말씀을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그 빚을 탕감해 주는 말로, 용서의 말로 전해주지 못하면, 너희들은 그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랑이 이웃에게 어떻게 악을 행하니? 그러잖아요? 사랑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서로 흘려주는 것을 이야기해요. 서로서로 빚진 자로 사는 거예요. 이것이. 그러니까 빚진 자! 이게 나쁜 게 아녜요. 성경에서 말하는 빚진 자는. 서로가 서로의 율법의 빚을 탕감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성도란 말이에요. 서로서로 빚을 갚는 형국, 그것이 진리 안에서의 교제라는 거예요. ‘코이노니아.’ 이게 서로서로 빚진 자로 사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주어서, 율법의 빚을 더욱 가중시키는 자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게 악을 행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이신 하느님을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올바로 깨달아서, 그것이 하느님 사랑이죠,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다, 그랬잖아요? 그러면 하느님을 사랑하라 라는 말은 그 사랑이신 하느님을 그 분이 어떤 분인지 내가 잘 깨달아 알면, 그 하느님을 사랑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것이요. 그런데 엉뚱하게 오해해가지고, 그 분을 빚쟁이로 만들어버리면, 아니 채권자로 만들어 버리면, 나에게 빚을 받는 채권자로 만들어 버리면, 그건 하느님을 모독(冒瀆)하는 거라니깐요. 열심히 섬겨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이 그렇게 분노(忿怒)하셨던 거예요. 그렇게 열심을 부려 제사 드리고, 열심을 부려 율법을 지켰던, 그 바리새인들에게 대노하셨잖아요. 왜 나를 모독해? 자, 그렇게 그 하느님을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올바로 깨달아서, 그것을 구하는 자들에게 잘 전달해주면, 그것이 나에게 빚을 갚으세요! 하는 자들이니까, 내 빚을 갚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율법의 빚도 갚아 주는 거죠. 서로서로 빚을 갚고, 갚아주고 탕감해주는 그런 빚진 자, 거룩한 빚진 자들의 삶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빚 갚으심의 일인, 그런 자기 계시, 하느님이 자기를 계시하신 게, 은혜를 우리에게 흘려주시는 거고, 그게 생명의 말씀이고. 그렇게 빚 갚으심의 일인, 자기 계시, 즉, 진리의 수혈을 통해서 우리의 빚을 탕감 받고, 하느님을, 내가 그 탕감을 받는 즉시, 나의 하느님은, 나에 대해서 채무자의 자리에서 내려오시게 되겠죠, 그죠? 그게 내가 하느님을 하느님의 자리로 돌려드리는 거란 말이에요. 그 분이 나에게 그 은혜를, 빚을, 약속을, 언약을 주셨어요. 흘려주셔서 내가 알았어, 깨달아 알았어요. 그걸 모르면 그 분은 나에게 있어서 영원한 채무자라니까요. 그런데 내가 받았어요. 받아서 해결이 됐어! 탕감을 받았어요. 그러면 그 때부터 그 분은 더 이상 나에게 있어서 채무자(債務者)가 이니라 하느님이란 말이에요. 사랑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하느님을 채무자의 자리에서 해방시켜 드리며, 우리 자신을 용서하고, 그 용서의 말씀을 다른 이들에게 흘려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율법적 채무를 변제받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도 다른 이들에게 또 거룩한 빚진 자가 되어서, 빚을 갚는 사랑의 매개체로 살게 만들어 줄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들을 성도라고 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8:35) 35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의 죄를 자유롭게 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면, 이게 ‘아피에미(aphiemi)’예요. 그 용서의 이야기예요. 이것이. 자유롭게 형제의 죄를 풀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하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너를 못 풀어준다는 뜻이에요. 바꾸어 말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그 빚 갚기에 의해서 진리의 말씀을 받고서, 그 용서를 받은 자는, 그 용서가 무언지 반드시 다른 이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럼에도 형제에게 자신을 용서하고,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말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율법으로 얽어매는 말을 전해주는 자가 있다면, 그가 어찌 하느님의 그 은혜, 하느님의 빚 갚기의 그 은혜의 그 사랑을 경험한 자이겠느냐? 이런 말이에요. 네 이웃이 너에게 해코지 한 거, 그거 용서 안하면, 하느님도 너 용서 안 한 대. 그러니까 이를 악물고 용서해 버리는 거, 하느님은 그런 거 원하는 거 아녜요. 그렇게 이를 악문 자들이, 천국에 몽땅 다 들어간다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평생 거기서 이를 간다니깐요. 자, 이 말씀이 어떤 말씀의 결론인 줄 아세요? 너희들이 각각 중심으로 형제들을 용서하지 못하면, 성부께서도 너희들 용서 안 해! 이게 어떤 말씀의 결론인 줄 아세요? 일만 달란트 빚진 자. 그런데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멱살을 잡고 감옥에 쳐넣어버린 그 어처구니없는, 그 어리석은 종의 비유, 천국의 비유, 바로 밑에 결론으로 붙어 있는 거예요. 일만 달란트라는 것은 고대시대 때 아주 상상을 불허하는 액수라 그랬죠? 한 국가가,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이 로마에게 일 년 동안 바쳤던, 나라가 바쳤던 조공이 800달란트니까, 일만 달란트를 개인이 어떻게 갚아요? 못 갚는 돈이라는 것을 그냥 예수님이 예로 들은 거예요. 그 때 당시의 사람들이 상상을 할 수도 없는 돈, 그 일만 달란트! 그런데 그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어떻게 빚을 졌는지 모르겠지만, 그 빚진 자가 채권자인 주인에게 뭐라 그래요? (마태복음 18:23-25) 23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4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왔다. 25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고 하였다. 이게 하느님이 욥에게서 빼앗아간 겁니다. 그리고 그에게 진리 주신 거예요. 그가 이 땅에서, 이 역사 속에서, 가치라고 갖고 있는 그것들 다. 이런 말이에요. ‘그걸 다 팔면, 너는 나에게 빚 갚을 수 있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금요. 그거 팔아봐야 얼마 된다고. 아니 자식, 마누라 팔아 봐야 얼마 받아요? 그런데 그거 팔면, 다 팔아 오면, 빚 면제해 줄 게 이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자, 주님이 부자 청년에게 ‘너 네가 가진 거 다팔아, ‘프토코스 (ptochos)’, 가난 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나를 따라, 그러면 영생(永生)이야.’라고 이야기했을 때에, 그 ‘다 팔아’. 값진 진주를 찾아다니는 진주 장사가 값진 진주를 발견하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걸 사죠? 그 때 그 말이에요. 이게. ‘다 팔아’, 네가 여태까지 빚을 갚겠다고, 네 소유로 갖고 있는 그 모든 율법적인 열매들, 다 팔아 내 빚 갚아! 이런 이야기예요, 이게. ‘그럼 갚을 거야’라고 이야기 하죠? 그 때 그가 뭐라고 그래요? (마태복음 18장 26-27절) 26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여기 ‘가엾게 여겨’ 불쌍히 여기다,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라는 것은 주님께서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실 때 있죠? 민망히 여기사, 이게 다 ‘스플랑크니조마이’예요. 불쌍히 여기신다, 자비로 여기신다는 거예요, 자비의 마음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거반 죽은, ‘강도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할 때도 그 단어예요. ‘스플랑크니조마이’. ‘탕자를 기다리던 아버지가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를 불쌍히 여겨’, 이것도 같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불쌍히 여기다, ‘스플랑크니조마이’는 하느님의 마음이에요.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마음! 불쌍히 여긴다니깐요, 그래야 살아요. 그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이 그 종에게 임하면, 그 종의 빚이 그냥 거저 탕감되는 거예요. 그걸 천국! 하느님 나라의 섬김이라고 그래요. 구원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탕감을 받았다고 하는 자가 동관을 만나는데, 동관이란 같은 주인을 섬기는 종, 이런 말이에요. 그런데 그 동관도 빚이 있었어요.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종이, 그 동관의 목을 잡았다, 그러지요? 이 ‘프니고’라는 단어가 ‘숨막히게 하다, 질식시키다’는 말이에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숨, 호흡’이라는 것은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헤’라는 단어 자체가 ‘말’이란 뜻이에요. 소리, 말,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숨을 못 쉬게 질식시켰다는 말은, 그 내면에 이런 말이 숨어 있는 거예요. 약한 말로 그를 숨 쉬지 못하게 죽이는, 그런 형국(形局)인 거죠. 목을 잡았다. 자신은 이미 구원에 이르렀다고 자신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자들이, 상대방의 빚을 탕감해 주기는커녕, 잘못된 말로 그의 숨통을 막아 버리고, 율법의 감옥에 처넣어버리는 그런 작태를 에피소드화 해 놓은 거예요. 주인이 나를 용서했대요. 일만 달란트 탕감을 해주었대요. 그런데 또 다른 빚진 자를 만나서는, 그의 목을 졸라 감옥에 처넣어 버려요. 율법의 감옥에. 그 ‘프니고’라는 단어가 여기서 쓰였어요. (마르코복음 4:7)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율법)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율법에 의해 기운이 막히다가 ‘프니고’예요. 이게 질식해 버리는 거예요. 율법은, 사람들의 그 생명, 호흡, 진짜 호흡인 ‘프뉴마’가 아니고, 가짜 호흡이기 때문에, 그들이 숨을 못 쉬고 질식해 버리는 거예요. 율법으로. 그게 ‘프니고’예요. 하느님의 말씀이, 호흡을 주지 못한다는 거예요. 숨을 쉬지 못해요. 생명을 주지 못하고, 그를 질식시켜 버려요. 죽여 버려요 오히려.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다고 하는 자가, 그런 악한 말로, 빚진 자를 감옥에 처넣어 버린 거예요. 임금이 그를 뭐라 그러죠? ‘악한 종’이라고 그래요. 아까 우리 바오로 이야기 속에서도, 그 ‘악하다’라는 말이 나왔었죠? 같은 말이에요. 그건 악한 거예요. 그게 악이라는 거예요. 아무튼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서, 씨로 간직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용서(容恕)하고, 이웃들에게도 용서를 전하며, 그 빚을 탕감해주며, 그들에게 빚진 자로서의 자신의 빚도 탕감 받는, 그런 서로서로 사랑의 빚을 진 자들로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게 안 되면 그는 악한 자예요. ‘포네로스(Poneros)’. ‘다만 악에서 구해주세요’가 그 악(惡)이에요. 그거 못하면 그 악에서 못 나오는 겁니다. 다 연결이 되어 있다 말입니다. 이 용서의 이야기가 왜 주어지게 된 거죠? 베드로 때문이에요. (마태복음 18:21-22) 2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22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490번?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의 죄를 얼마나 용서해 줘야 하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헵토 메쿤투케스 헵타’.(ἑβδομηκοντάκις ἑπτά) 이 말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말이 아니라, 일흔, 70이라는 부사예요, 그건요. 그리고 칠(7)이라는 명사를 쭉 붙여 놓은 거예요. ‘칠십으로의 칠’이라는 거죠, 굳이 번역을 하자면, 칠십이라는 성격의 7로, ‘아피미(Aphiemi)’, 오늘 본문에 그 단어랑 똑 같아요. ‘용서해, 자유롭게 해줘!’ 이런 말이에요. ‘쉬게 해 줘!’ 칠이라는 건 안식의 숫자죠? 창세기의 칠, 그 숫자 이야기 하는 거예요. 당시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 그 칠을 어떻게 지켜내고 있었어요? 율법으로 지켜내고 있었죠? 그 칠을 율법으로 지켜내고 있었다니깐요. 십(10)으로, 율법으로 칠을 알아야 되는데, 이 칠이라는 걸 십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거죠? 거꾸로 이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을 통하여 안식에 이르겠다는 아담들의 욕망을 나타내 보여 주는 거예요. 그래서 칠로 안식이 됩니까? 칠이면 됩니까? 라고 물은 거예요. 그 행간을 보면, 마침 베드로가 일곱 번이요?라고 하니까 주님을 그걸 받아서, 당신의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그 안식을, 그 칠을, 율법으로 지키고 있잖아? 그 칠은 안 된다’는 거예요. ‘칠십으로의 그 칠’이어야 된다고 하시는 거죠. 그런데 이들은 구약에 능통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이게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았다니깐요. 칠십의 칠 이라는 게, 칠은 이레니까. 하루, 이틀, 닷세, 엿세, 이레? 칠십 이레라는 말을 하신 거예요. 칠십의 칠. 성경에 나오는 숫자. 창세기에 칠(7)이라는 언약의 수, 안식의 수가 나오죠? 그런데 이거를 하느님이 우리에게 설명을 해 주어야 되는데, 이건(7) 우리가 몰라요 뭔지. 그 안식이 뭔지.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십(10), 십계명, 율법을 주시는데, 이것을 갖다가 다섯 개, 다섯 개로 설명을 해주고, 주님은 이걸 두(2)개로 또 축약을 해주고,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산상수훈에서는 이걸 셋(3)과 넷(4)으로 설명을 해주죠? 살인, 간음, 거짓증거(3), 그리고 그걸 완성하는 게 사랑! 넷이야(4), 이렇게 설명을 해준다 말이에요. 그래서 요게 되면 그게 칠(7)이다라고 설명을 해주신다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안 사람들이 12이라는 거죠, 그들이 아들이란 말이에요. 아들. 열둘(12)은 아들의 숫자니까, ‘벤 야민,’ 이게 오른 손의 아들, 아들의 완성이라는 거고, 열둘의 첫 번째는 누구예요? 르우벤! ‘르우’가 ‘라’에서 온 거니까, ‘아들을 봐라. 내가 이제 아들을 설명해 준다.’ 그래놓고 열둘(12), 마지막에 벤 야민, 이것이 아들이야. 그런데 그 아들이라는 단어가요, 이 단어가 ‘송아지’라는 뜻도 있어요. 황소의 새끼, 이런 말. 그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황소의 새끼, 이 송아지, ‘벤’, 이걸 잡았다는 건 무슨 말이냐 하면, 하느님이 그의 육(肉)을 잡아서 죽여 버리고,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해요. 황소의, 진짜 그 소, 하느님의 아들이니까. 그가 죽고 탕자가 살아나는 거거든요? 그거는 그 안에서, 그 탕자, 둘째를 죽여 버리고, 아들로 살려내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벤 야민, 오른 손의 아들, 아들의 완성, 이게 열둘(12)이란 말이에요. 열둘! 그렇게 아들이 되면, 이들은 이 십(10)으로 이 칠(7), 안식을 안 자가 되는 거죠? 그래서 십(10)으로 칠(7)을 안 자가 되면 (10×7), 이게 칠십(70)이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열두지파가 나와서, 거기에서 70원로가 서게 되는 거고, 열두(12) 사도가 나중에 70으로, 70명이 아녜요. 거기 보면, 원문에 보면 그들을 70으로 보낸다, 그래요. 둘 씩, 짝으로. 70으로 보낸다,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 70이라는 건 이 십(10)으로 칠(7)이 되는 거지, 이 칠(7), 안식을, 이 열(10)로, 이걸로 도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그러는 거예요. 용서(容恕)라는 거, 안식이라는 건, 칠(7)입니까? 그가 알고 있는 건 율법(10)으로 칠에 당도하는 안식일을 열심히 지키는 그것 밖에 없단 말이에요. 베드로가 알고 있는 건. 그때 주님이 그 이야기를 받아서, 우리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게. 아니지, 그 칠(7)이 아니라, 칠십(70)의 칠(7)이지, 그래서 부사(70), 명사(78), 이렇게 쓴단 말입니다. 그러면 칠십의 칠! 칠십 이레가 뭔지 알면, 주님이 저 용서를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알게 되겠죠? 다니엘서 9장에 보면 칠십 이레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다니엘서는, 유다가 BC586년에 亡하죠?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하필 바벨론이에요. 바벨론이 바벨이에요., 바벨론의 바벨. 거긴 탑이라는 말이 없어요. 그냥 바벨이에요. 바벨론, 바벨 같은 단어입니다. 그 바벨론에게 유다가 망하고, 다니엘서가 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 기록된 거죠? 거기는, 이 세상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우리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의 왕들은, 느브갓네살이 다니엘한테 뭐라고 그래요? “내가 무슨 꿈을 꾸었다. 그런데 생각이 안 나, 너, 내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도 맞추고,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도 좀 해줘”. 그래요. 그런 황당한 요구가 어디 있어요? 그 말은, 꿈이라는 게,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면, 꿈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성경이 꿈, 환상, 그러면 우리에게 허락된 이 유한한 세상, 우리의 인생을 이야기해요. 그걸 꿈이라고 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환상을 본다, 그러죠? 그게 뭔지를 안다는 뜻이에요. 이상한 걸 본다는 뜻이 아니라. 요엘서에 나오잖아요? 그렇게 이 꿈 같은 이 세상을 사는데, 이 세상 왕들, 모든 아담들 이야기하는 가예요. 그 왕들은, 그 꿈이 무언지도 모르고,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람이, 너는 지금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거고, 그건 하느님이 이런 이유로 준거야 라고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나라에 유다가 잡혀와 있으니, 얼마나 속이 터지냐고. 답답한 거죠. 자, 바벨, 그 바벨이라는 건 ‘바랄’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건데, ‘섞다’라는 뜻이에요. 섞는 것은 항상, 그러니까 누룩이 어디에 섞이면 항상 술이 나오죠? 술, 그러면 성경에서 섞인 것이에요. 섞여서 창조된, 창작된 어떤 것, 인간 세상의 어떤 것. 섞으면 다 율법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이런 걸로 줬는데, 인간이 자기의 마음을 섞어 버리면, 인간의 소위 양심이라는 걸 섞어버리면, 그거 술이 된다니깐요. 인간들을 미혹하여 홀려 버리는 술! 섞은 것! 그걸 바벨이라 그래요. 그래서 거기에서 언어가 섞이는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상징적인 거죠. 그러한 곳에, 그렇게 섞이면, 거기가 심판이에요. 그곳에 하느님의 백성들이 들어갑니다. 들어가 가지고, 거기에서, 그 섞인 자들과 방불하게 살다가, 어떤 은혜에 의해 이제, 그들만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그 안에서 사는 그 기간이 70주간이예요. 그거는 이 역사 전체를 가리키는 겁니다. 다니엘서 9장에 보면. 그러니까 이 역사 전체가 우리가 포로로 사는 기간이에요. 여기가. 거기에서 하느님의 약속이 주어져요. 칠십 이레! 그 때가 되면 너희들이 풀려 날거야, 그 유다가 BC 516년에 완전히 풀려나죠? 조금씩, 조금씩 잡혀가다가, 조금씩, 조금씩 풀려나서, 나중에 계산해 보면 70년이에요. 그래서 70년 포로생활, 그러는 거죠. 하느님은 유다가 안식년을 지키지 않아서, 그 땅을 쉬게 만들기 위해, 70년의 포로생활을 그들에게 허락했다고 그래요. 성경은. 그러니까 쉬어야 되는데, 너희들은 뭔가에 쫓겨서 쉬지 않고, 안식하지 않고, 열심히 달려 버리면, 하느님은 그걸 심판하신다, 그래요. 그래서 70년을, 그 땅을 쉬게 하세요. 당신 백성들의 땅을. 그런데 안식년은 7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죠? 그러니까 70×7. 70주간이 거기서 나온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70번의 안식년을 너희들이 어겼다. 그러니까 70년 동안을 내가 이 땅을 아예 쉬게 만들어버리겠다. 그러니까 매년이 안식년이에요. 거기는 그 포로생활 전체가, 거기에서 그게 뭔지를 알면, 그들은 이 바벨론에서, 바벨에서, 안식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뭔지 알면. 왜? 그게 안식의 기간이거든요. 70이라는 것 자체가. 안식이라는 건, 너희가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너희에게 찾아오는 게 아니라, 내가 강제로 너희에게, 너희 땅을 혼돈과 공허로 만들어, 텅 비게 만들어서, 그 땅을 부정해 버림으로 너희의 안식이 오히려 완성이 되는거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너희에게 허락한 시간이 바로, 70주간이라는 거예요. 칠십으로의 그 칠이다. 율법이 아닌 은혜라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그 안식의 희년이 오는 거예요. 그 희년은 50일 해서, 오순절, 그 날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역사가 끝나는 거예요. 육신으로서의 역사가 끝나는 거예요. 그게 70주간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주님께서 ‘칠(7)로 용서할까요?’라고 묻는 베드로에게, ‘70의 7로 용서를 하라’라는 게 무슨 말이겠어요? 인생은 율법으로 용서 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 용서가 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에요. 이 모든 역사가 사실은, ‘용서의 역사’라는 거예요. 용서하시기 위해 하느님이 주신 역사인데, 그걸 아는 자는 나올 것이고, 모르는 자는 그 바벨에 가서 죽는다, 그래요. 그 용서를 우리가 알아먹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바벨, 지긋지긋한 야차들의 세상에서, 안식을 하며 자유롭게 사는 이들이 있다니깐요. 누가 뭐라고 그러던 말던. 그래서 그 바벨이라는 단어가 ‘섞다’라는 뜻과 함께, ‘기름붓다’라는 뜻을 함께 갖고 있어요. 그 바벨, 그 섞은 것 안에서, 하느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에게 기름이 부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벨이 뭐 나빠요? 성도들에게는 거기도 천국이라니깐요. 거기서 기름 받으면 되는 거예요. 진리의 말씀을 받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용서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심판 때에 왕 앞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기다려 주세요. 내가 갚을 게요.’라고 나선 거예요. 나는 7로 할 거예요, 끝까지 그런 거예요. 그러면 너는 용서를 모르는 거야!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 70이레에 쏟아 부어진 그 용서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인 거예요. 성경에 그런 말이 나오죠? ‘하느님은 모든 자가 구원 받길 원한다.’ 그게 그런 말이에요. 하느님은 이 역사를 그 용서를 위해 만드셨다. 당연히 모든 이가 구원 받길 원하는데, 하느님의 은혜가 임(臨)하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 못 받아, 그걸 설명해 주는 거예요. 모든 자가 구원 받길 원한다, 그러니까 뭐 하느님의 보편 구원론을 이야기하셨다고 이야기 하는데, 천만의 말씀. 성경은 그냥 그렇게 몇 구절만 뽑아 가지고, 자기 신학을 만드는데 사용하면 안 돼요. 사람이 만들어낸, 창작해 낸 엉터리 신학이란 말입니다. 그것은. 자 그래서 그 임금이, 그 70이레를 이해하지 못한, 그 종에게 빚 탕감을 선언해 주었음에도, 그것이 뭔지 모르고, 다른 이에게 빚 탕감의 복된 소식을 전해 주지 못하고, 그를 오히려 목 졸라 감옥에 가두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다고 해서, 다 진리가 됐다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바오로가 그런 말을 하죠. ‘야, 내가 너희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혹시 버림을 받는 자가 될까 하노라’라는 이런 말을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바오로가 진리를 알고 나서, 너희들이 다 듣는다고 해서, 그 듣는 것이 너희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런 말이에요. 아, 실제로 그렇다니까요. 사람은요 자기가 깨달았다고 하는 것을, 확신으로 막 말할 때는, 그 확신에 자기가 넘어갑니다. 내가 그걸 확신하고 있는 줄 착각해요. 자기가 그 얘기를 막 할 때는 그런대요. 내가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멈추잖아요? 그게 자기의 마음이 되지 않은 자들은 그 때부터 불안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루터가 죽기 전에, 하느님 혹시 나 이렇게 써 먹기만 하고 지옥 보내는 것 아녜요? 이런 의심에 흔들렸다는 것이 그런 연유에서 그런 거예요. 그 단순히 우리가 이걸 듣고 있기 때문에, 나는 구원 받았다라고 착각하면 안 돼요. 그것으로 나를 용서했는가? 그리고 그 용서를 남들에게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가? 자꾸 자기를 묵상하고, 상고해 봐야 해요, 나를! 그렇게 동관, 백 데나리온 빚진 자, 그를 용서해 주지 못한 그 자는, 바벨에서, 그저 바벨이라는 섞은 재료로, 열심히 탑을 쌓고 있는 사람에 불과한 거예요. 그것을 하느님이 용서라는 것을 주었는데, 그것을 진리로 읽어 내지 못한 사람의 모형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같은 처지의 동관을 자유롭게 풀어주지는 못할망정, 감옥에다 처넣는 자가 된 거죠. 바오로는 이 땅에서 그 바벨을 통하여, 다른 바벨, 기름 부음이라 그랬어요? 거기에 당도해야 하는 성도의 현실을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로마서 15:25-27) 25 그러나 지금은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에게 구제금을 전하러 갑니다. 26 그것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같은 교우로서 정을 나누려고 기쁜 마음으로 보낸 것입니다. 27 그들은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보냈지만 그들에게는 또한 그렇게 할 의무도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의 정신적인 축복을 나누어 가졌으니 이제는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그들을 도울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냥 얼핏 보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사람들이 신령한 것을 받았으니까, 그들이 어려울 때, 육신에게 필요한 구제 헌금, 돈을 보내는 게 마땅한 것 아니냐? 이런 말로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이걸로 헌금을 착취하는데, 자주 쓰는데, 그렇게 보이죠? 여기에 무슨 구제 헌금, 돈이라는 단어도 없고, 무슨 동정했다 이런 말도 없어요. 그냥 ‘교제했다’라는 말이에요. ‘코이노니아’란 단어예요. 그리고 여기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이 ‘페네스(penes)’가 아니고, ‘프토코스(ptocos)’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은 율법의 중심이죠. 거기에 있는 ‘프토코스’, 심령이 가난한 자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절대적 가난! 그들에게 이방적인 어떤 것들이 가서, 오히려 예루살렘 밖의 어떤 것들이 가서, 그들을 섬기는 그 일을 하는 거예요. ‘그 일을 위해 내가 가겠다.’라는 그런 말이에요. 이것은요. 헌금 들고 찾아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면서 27절에서 섬김이 어떠한 방식의 섬김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요. 이걸 원문으로 보면요, ‘빚진 자들은 이방적인 것 안에서, 어차피 우리는 이 땅에서 살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로 해석되지 않으면, 그걸 이방적인 것이라, ‘에뜨노스’가 여기선 중성으로 쓰인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방인이라 해석하면 안 된다니깐요. 그러니까 중성으로 쓰이면, 그건 이방적인 것이라고 해석해야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방적인 것 안에서, ‘프뉴마, 신령한 것’으로 교제를 하는 자들이란 거예요. 우리는 그 아랫것들 갖고, 내 말 갖고, 성경을 가지고, 그 예수를 이야기 하면서, 그 안에서 그 신령한 것으로 전달해 주는 자들이란 거예요. 그게 ‘빚진 자들의 마땅한’이란 단어도 ‘빚갚다’라는 뜻이에요. ‘마땅하다, 당연하다’란 뜻이 아니라니깐요. 빚진 자들은 그렇게 이방적인 것 안에서, 영적인 것들로, 신령한 것들로, 교제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 그 육신적인 것 안에서 진리로 전해주는 그 행위를 하는 그것이, ‘빚 갚는 거야’라는 말이에요. 이 말이요. 그러니까 당연히 여기 안에서, 우리가 그런 것들을 가지고, 그 진리를 설명해 주면 그걸로 빚 갚는 거라니깐요. 그들이 용서받은 자요, 용서하는 자란 말이에요. ‘내 안에서 그 빚이 탕감되게 해 주세요. 용서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되면 나도, 나를 용서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합니다.’ 이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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