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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20년 8월 15일 토요일 [성모 승천 대축일](루카1,39~5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8-15 조회수1,727 추천수0 반대(0) 신고

 

 

성모 승천 대축일 복음(루카1,39~56)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어셨습니다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1~53)

 

루카 복음 1장 51절에서 53절까지는 하느님의 공평하신 속성에 대한 찬양이 이어진다.

51절의 ''로 번역된 '브라키오니'(brachioni; arm)는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야드'(yad)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구약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신명26,8; 시편29,14).

 

이 단어가 '권능'으로 번역된 '크라토스'(kratos; strength; mighty deeds)와 함께 사용되어 하느님의 크고 무한하신 힘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교만한 자들'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누스'(hyperephanus; the proud)는 '~위에', '~을 넘어서', '~이상의등의 뜻을 가진 전치사 '휘페르'(hyper)와 '나타나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다'등의 의미를 가진 '파이노'(phaino)의 합성어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내보이는 자들',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이것은 50절의 '경외하는 이들'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면서그 결과 또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그분의 자비가 미치지만반면에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흩어지는심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51절은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1사무2,10)는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키는데여기서 마리아는 교만한 자들을 치시는 하느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깨닫고자신의 모습을 비천한 종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높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이제 52절은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1사무2,8) 라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으로서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통치자들'과 '비천한 이들','끌어내리시고'와 '들어 높이셨으며'라는 단어들이다.

권세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느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다루고 있는 52절은 이 단어들의 대조를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먼저 '통치자들'로 번역된 '뒤나스타스'(dynastas; the mighty; rulers)는 '주권자','통치자'등을 의미하는 '뒤나스테스'(dynastes)의 복수이므로, '권세있는 자들','통치자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그리고 '왕좌'로 번역된 '트로논'(thronon; thier thrones)은 그 통치자들이 앉는 '권좌들', '보좌들'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끌어내리신다'는 것은 비록 세상 가운데서 권세있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합당치 않는 자들을 얼마든지 그 권좌에서 내리칠 수 있는 능력의 하느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 '비천한 이들'로 번역된 '타페이누스'(tapeinus; the humble)는 '낮은 지위의', '천한', '겸손한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타페이노스'(tapeinos)의 복수형이므로, '비천한 이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 단어는 앞의 '통치자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직접적으로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지만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들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는 낮고 천한 자들일지라도하느님 대전에 겸손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을 높이시는 분임이 드러난다.

세상 사람들은 좀 더 높은 지위와 권세를 위해 목숨을 걸지만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무의미한 일이다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대전에 우리가 먼저 겸손한 모습으로 바로 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53절에서도 52절과 마찬가지로,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 '좋은 것'과 '빈손','배불리시고'와 '내치셨습니다'라는 단어들의 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먼저 '굶주린 이들'과 '부유한 자들'은 복수형으로 일차적으로 경제적 의미에서의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이렇게 보면 부자들은 그들의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가 가난하게 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5,3),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5,6) 등과 같은 산상설교의 표현처럼자신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자들과 교만하여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좋은 것'으로 번역된 '아가톤'(agathon)는 '선한', '적합한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형용사로서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주시는 '좋은 것'은 바로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임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로 번역된 '에네플레센'(eneplesen; He has filled)은 '채우다','만족하다'는 의미를 가진 '엠피플레미'(empiplemi)가 원형인데이 단어는 단순한 만족이 아니라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는가득차고 넘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고 주리는 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들로서 부족함이 없이 가득 채워 배부르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빈손으로'라고 번역된 '케누스'(kenus; empty away)는 '', '헛된', '내용이 없는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로서, '좋은 것으로'라는 표현과 대조를 이루는 단어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의미하는 '케누스'(kenus)는 부족할 것이 없는 부자들이 받게 될 심판의 엄중함을 부각시켜 주며두 단어의 대구를 통해 심판을 행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부자라고 할지라도하느님 대전에 교만한 자라면 얼마든지 '텅 빈가난뱅이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배불리시고'와 대조를 이루는 '내치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엑사페르테일렌'(eksapesteilen; he has sent)은 '밖으로'란 뜻의 '에크'(ek)와 '내보내다'란 의미를 가진 '아포스텔로'(apostello)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밖으로 멀리 내보내어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스스로 부자라고 하는 자들을 빈 손으로 멀리 내보내시어 가까이하지 않는 공의로우신 하느님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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