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빈첸시오 신부의 여행묵상 31 - 행복의 조건 下 (페트라/요르단)
작성자양상윤 쪽지 캡슐 작성일2020-08-20 조회수1,765 추천수0 반대(0) 신고

 

페트라 오랜 실크로드 무역시절 번창했던 지형적으로 만들어진 천연 요새의 도시로 

로마군에 의해 정복당한 적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지진으로 파괴된 그대로 잊혔다가 

19세기에 스위스 출신인 학자가 재발견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널리 유명해 것은 

1989 영화 인디아나 존스시리즈 3편인 최후의 성전 촬영지로 쓰여 지면서부터이고 

이후로 관광객들이 폭발적으로 많아졌다고 한다, 할리우드 영화의 힘은 대단하다.

페트라는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마치 인공적으로 만든 같은 절벽 사이로 길이 나있고 

넓어 지기도하고 좁아 지기도 하면서 나름 거리를 걸어가야 나온다

만약  패트라를 공격하려고 한다 해도 절벽 위에서 돌이나 , 창등으로 저항하고 방어 한다면 

도시에 도착하기도 전에 절벽 사이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 몰살 당할 같은 지형이고 

실제로 대단했던 로마군도 그래서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이렇게 좁을 길을 계속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길이 끝나면서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은 페트라의 가장 유명한 건축물인 '알카즈네'이

보통 아침에 페트라를 가게 되면 나름 높은 절벽 사이에 길이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구간이 아직 햇빛이 들어오지 못해 어두컴컴한 곳이 많은데 

알카즈네 앞쪽으로 막힌 것도 없는데다 아마도 동남향으로 자리 잡았는지 

그렇지 않아도 멋진 건축물이 아침햇살을 제대로 받아 환한 크림색을 띄게 된다.

어두컴컴한 길을 계속 걸어오다 어두운 절벽 사이로 밝게 빛나는 크림색의 건축물을 마주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 하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감동이었다

아마도 빛의 방향이 바뀌는 오후에 가게 되면 그런 감동이 줄어들 같으니 

페트라 가게 되거든 오전에 가기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페트라의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물론 도시라고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생각은 하고 왔지만 

황무지 사막한가운데 세워진 도시가 크면 얼마나 크랴 싶었기 때문이다.

이천 전에 이만 오천 정도의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니 

인구 수로만 보더라도 당시에는 결코 작은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고 

현재 남아 있는 주거지, 광장, 야외 공연장 등의 규모를 나름 도시였었다.

페트라에서 알카츠 다음으로 유명한 건축물인 알데이르  

뒤쪽 끝(내가 들어온 입구를 기준으로) 위에 자리잡고 있다

생각보다 많이 넓어서 대충 둘러보는데도 시간이 걸려 그곳 까지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같기는 했지만 

언제 여기 오겠냐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고 험했는데 

'이런 식의 산들로 둘려 싸여 있으니 공격이 불가능하지!’라는 생각이 저절로 정도다

그런데 분명히 올라 때는 나름 많은 사람들이 올라오는 듯했지만 

중간에 내가 모르는 볼거리가 있어 거기까지만 보고 다시 내려간 것인지 

아니면 올라오면서 힘에 부쳐 중간 중간에 다들 포기하고 내려간 것인지 

위에 도착하고 보니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달랑 나랑 청년 뿐이다

나는 사람들이 모두 알데이르를 보기 위해 올라가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알데이르는 힘들게 올라온 보람이 있을 만큼 훌륭했고 

좀더 올라가면 나오는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험준한 또한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명의 베두인청년들을 만났다

베두인 들은 이전부터 페트라에서 살아오던 원주민들로 

현재는 유적 보호를 위해 이상 거주가 허용되지 않아 모두 이주 밖에 없었는데 

대신에 페트라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상업적 행위는 오직 베두인들에게만 허용된다고 한다

상업적 행위라고 해봐야 거의 노점상이나 좌판 수준의 기념품 판매와 

관광객을 상대로 낙타 태워 주는 정도가 전부이긴 하지만 

그나마 아무 대책도 없이 삶의 터전에서 쫓은 것보다는 배려심이 느껴진다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 명동 성당에는 상계동 철거민의 천막들이 있었다

도시 개발에 밀려 아무 대책 없이 철거되서 없어진 사람들의 마지막 거처였었다

당시의 우리나라와 지금 이곳 요르단의 상황을 단순히 비교 수는 없겠지만 

이곳의 베두인들의 이주 과정은 팔십년대의 우리 나라의 철거처럼 야만적이지는 않았을 같다는 생각이 뜬금없이 든다.

물론 상계동 이주민들에 대한 대책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어차피 남의 땅에 짓고 살던 사람들이니 정도도 감지덕지라는 식의 현실성 없는 대책이었을 것은 뻔하다

만약 당시 우리나라였다면 베두인들을 이주시키고 페트라의 모든 상업적 행위를 

그들과는 전혀 상관 없는 어떤 기업이 들어와서 했을 것이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곳간에서 인심 난다라는 말처럼 경제적인 수준과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정치적 수준, 국민 의식수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오죽했으면 그들이 명동성당에서 천막을 짓고 살았을까

당시의 우리나라의 정치적 수준과 국민 의식 수준이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나아 졌을까

요즘도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려 하면 동네 주민들이 발벗고 나서서 반대한다

그리고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편견, 공공 임대 주택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 등등 

팔십 년대에 비해서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고 

요즘은 세계적으로 선진국으로 인정 받는 추세이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치적 수준과 국민의 의식 수준은 여전히 거기까지인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위에 있던 사람이 나랑 호주 청년 명뿐이라 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고 

호기심 많던 호주 청년은 그게 싫지 않았는지 여러 가지 대화가 오갔다

그들은 내일은 자신들의 집에서 머물게 해주겠다며 우리를 초대 했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의 초대에 쉽게 응하는 것은 위험이 일이기도 하고 

내일이면 나는 이곳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어차피 초대에 응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렇지 않아도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았던 터에 이야기까지 길어지다 보니 

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이미 사람들은 사라지고 하늘에는 석양이 드리우며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석양을 배경으로 넓은 페트라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바람이 부는데 

건조함과 황량함 온몸으로 느껴지며 여기가 사막의 땅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예전에 도시가 존재했던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작은 샘물 조차 구경하지 못했고 

나마 지하에 수맥도 거의 없는지 넓은 곳에서 그루의 나무 밖에 보지 못했으니 

지금 내가 서있는 페트라는 실제로도 상당히 건조한 땅인 것이다.

완벽한 천연 요새의 지형을 가진 페트라였지만 자체적인 충분한 공급처가 없어 

당시로서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수로水路 통해 외부로부터 끌어 들여 이를 해결했는데 

이는 결정적인 약점으로 감히 공격하지 못했던 로마군도 수로를 차단해서 결국 항복을 받아낸다.  

당시에도 먹을 양식이야 어떻게든 나름 오래 동안 저장하는 기술이 있었겠지만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곳에서는 

도시가 만큼의 많은 양의 물을 오랫동안 저장하기에는 방법적으로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결국 로마군에 저항하던 페트라도 물이 떨어진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한번 제대로 쏴보지 못한 항복하게 된다

거대한 천연 요새의 지형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작은 물웅덩이 만도 못했던 것이다.

물은 예나 지금이나 생명을 상징하기도 하고 실제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물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몸이 지니고 있는 수분이 체질에 따라 나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70%~90% 수분이라고 하고 12%정도가 부족하면 사망한다고 한다

페트라는 이런 생명과도 같은 물을 외부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거의 완벽하게 막아주는 천연의 요새의 지형이라고 해도 

인간이 삶을 유지하는데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원천인 물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페트라는 

어쩌면 도시를 세우기에는 처음부터 불완전한 지형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물이 있었다면 지진으로 파괴되고 실크로드가 쇠퇴했다 해도 

여전히 남아 있는 주거지와 시설들이 아까워서라도 할 수 있을 만큼 다시 재건해 

전성기 때의 규모만큼은 아니더라도 도시는 명맥을 유지 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페트라가 세상에 알려질 당시에는 모두가 떠나가고 

소수의 베두인들만이 유목생활을 하며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마을의 규모라는 것이 자체적으로 해결할 있는 물의 양과 비슷했을 같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대부분 남과 비교해서 얻어지는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남들과 비교해서 충분히 행복할 있는 기준을 넘어서고 

다른 이들도 충분히 행복하다고(행복할거라고)평가 한다 해도 

결국 스스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 그것은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 아니며 

혹시 행복하다 하더라도 쉽게 무너질 밖에 없는 것이다

행복의 기준은 간단하다, 내가 행복하다면 다른 누가 뭐라 해도 행복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던 본인의 생각대로 용기 있게 살아 가고 있는 청년과 함께 

가장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도시 페트라 돌아보며 

진정한 행복의 조건은 결국 안에 있는 것이 아닌지?’

그리고 '내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 10, 20, 30일에 업데이트됩니다.

 

 

 

 

도시락 내용물 - 페트라는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숙소에 부탁하면 도시락을 준비해 준다

 

  

'알데이르'로 올라가는 길

 

알데이르

 

알데이르 전망대에서 보이는 풍경

 

페트라의 황혼

 

 

페트라에 부는 흙바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