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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코로나 시대에 주일미사 참례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8-29 조회수1,922 추천수2 반대(0) 신고

 

요즘 코로나로 인해 예수님의 존함이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로 갈라져나간 개신교 신자들로 인해서 생긴 현상입니다. 오늘 인터넷에서 기사 하나를 봤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대충 빨리 스캔만 하고 봤습니다. 간단한 결과를 말씀드리자면 설문조사에서 지금 국민들이 개신교와 천주교, 불교 세 종교만 단순 비교를 해봐도 개신교는 코로나 발병 현상이 집단적으로 일어나는 현상과 맞물려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에 대해 거부감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반면 상대적으로 천주교와 불교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에 교회 관련 기사를 보면 오랜 시간 개신교에서 신앙생활을 한 신자 가운데 요즘 개신교가 하는 일련의 행동을 보면서 종교에 염증을 느껴 천주교로 개종을 하고 싶다는 내용의 댓글이 심심찮게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오늘날 개신교 내부에서 종교의 본질을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최소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학창시절에 일반 사회나 도덕 교과서에도 기독교의 가장 큰 정신은 박애와 사랑이라는 것 정도는 최소한 알고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고등학교까지만 나오고 수업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에서는 믿음의 자녀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가르침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등불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국민들의 원성과 지탄의 대상이 되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몰지각한 신앙인들 때문에 독실한 신앙인이 욕을 먹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하다 보니 종교에 회의를 느껴서 개종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로서는 좋은 현상이긴 합니다.

 

이런 사회적인 현상과 관련해서 이번 주일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 시국인 이 시점에 정말 딱 어울리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지금 연일 방송에서는 종교 행사를 하더라도 비대면 예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부 교회는 정부의 방역지침을 잘 준수하는 교회도 있지만 정부의 방침에 제동과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라는 기치를 걸고 종교탄압을 운운하며 일부 목사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현장 예배를 사수해야 한다고 하는 게 방송을 통해 전해지자 개신교 내부에서도 이건 아니다.”라는 시각으로 자성을 하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관련된 일이라서 종교를 떠나 정부의 방침에 적극 협조를 해야 한다고 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하나로 정리하자면 사랑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랑도 둘로 나누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부자청년에 나오는 복음과 다른 복음의 내용을 잘 살펴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핏 보면 하느님 사랑이 첫 번째이고 이웃사랑이 두 번째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근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여쭤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요약해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이웃사랑을 둘째라고 말씀하긴 하셨습니다. 근데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여기서 둘째라고 하는 부분에서 조사 가 붙었습니다.

 

조사 가 붙었다는 것은 순위가 둘째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위치만 둘째지 첫 번째 하느님 사랑과 비중이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이웃사랑이 하느님 사랑 다음 순이라면 그냥 둘째라고 해야 합니다. 이치에 맞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실제 두 개로 양분되어 말씀하셨지만 의미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동일한 레벨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는 첫째 계명은 우리가 가까운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동등한 레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오늘날의 크리스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적극 따르고 순종해야 합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뜻과는 무관하고 동떨어진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오늘 제 2독서에 나오는 로마서의 말씀을 잘 묵상해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을 바치라고 하면서 이게 진정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배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제사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데에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제물이긴 제물인데 이 제물은 첫째가 거룩해야 합니다. 그리고 살아 있어야 하는 제물입니다. 구약에서는 동물을 죽여서 제사 때 제물로 바쳤지만 신약에 와서는 죽은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걸 제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산 제물이 무엇인지는 2독서에 나오는 말씀에 나오는 문맥상 의미를 읽으면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 로마서 122절에 나오는 내용일 겁니다.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이 말씀이 어쩌면 거룩한 산 제물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할 겁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이 변화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독서에 나오는 현상을 잘 분별(식별)할 수가 있을 겁니다.

 

1절에 나오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에서 하느님 마음에 드는이 부분에 대한 200주년 성경 주해서를 보면 영적 예배라는 표현이라고 하는 주석이 달려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주석에 근거해서 요즘 현상에 접목해서 생각을 해보면 지금 개신교에서 생존전략으로 주장하는 현장예배를 진정으로 그게 하느님께서 원하는 예배일지 한번 철저히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이 주장하는 형식으로 만약 계속해서 현장예배를 강조한다면 오히려 복음정신인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정신과는 전혀 다른 탈복음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 됩니다. 물론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하는 게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원래는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하지만 개신교 성경에도 나오고 또 개신교에서 자주 강조하는 표현인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이 표현은 방금 전에 주석 성경에 있는 주석 내용과 동일한 의미로 해석이 될 겁니다. 바로 이게 영적예배가 될 것입니다.

 

현장 참여하는 방식의 육적인 의미의 예배도 중요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것은 영적으로 거룩한 산 제물이 더 중요한 의미의 예배가 될 것입니다. 2독서 2절의 내용은 거룩한 산 제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약간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바로 오늘 주일 복음에 나오는 내용이 가장 쉽고 간결한 내용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일 복음 24절부터 한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아마 없을 것입니다. 자주 나오는 내용이고 또 내용도 어렵지 않은 내용입니다. 내용은 단순하게 설명이 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심오한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면 관계상 24절부터 매일미사나 성경을 한번 자세히 봉독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응당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게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에서는 날마다라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 지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우리가 지어야 할 십자가는 조금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시대의 십자가는 사형수의 틀입니다. 실제 십자가를 지셨고 또 다른 의미의 십자가는 인류를 너무나도 사랑하신 성부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자신 스스로가 십자가상에 당신의 몸이 제물이 되어 죽임을 당하셔서 대속제물이 되신 게 예수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이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사형틀의 십자가는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가 무엇이냐고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의미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십자가 하면 막연하게 고통, 상처 등 부정적인 의미만 연상을 할 수가 있지만 꼭 부정적인 내용만 있는 게 아닐 것입니다. 좋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단적으로 하나만 예를 든다면 이중적인 의미도 있을 겁니다. 바로 사랑희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육체적으로는 엄청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근데 그 고통을 왜 겪었을 것 같습니까? 죽음의 그늘에서 죽어가야만 하는 저희들의 영혼이 불쌍하기 때문에 그 고통도 저희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감수를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이 모습이 가장 전형적이고 모범답안일 겁니다.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 하느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배말입니다. 그 길을 예수님께서 저히 보고 따르는 것만이 진정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가 있고 또 어디 가서도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가 있을 거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이지만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은 정말 그들이 늘상 주일예배 때 기도 시간에 말하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지 한번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2독서에서도 말씀하십니다. 현세에 동화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하는 말씀과 동일할 거라고 보여집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거룩으로 가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올해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복음에 나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내용을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내용에 이어서 베드로가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는데 자신은 그에 대해 무엇을 보상받을 수 있는지 예수님께 여쭤보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때 베드로의 믿음이 좀 아쉽기도 합니다.

 

설사 보상을 기대했다고 해도 말로 그 의미를 드러내지 않았으면 얼마나 멋졌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해 주실 것인데 말입니다. 거룩으로 가는 길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길과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는 의미와 동일한 의미라고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자아를 죽이는 의미입니다. 자아를 죽일 때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에 비례해서 질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잘 지는 사람은 단순히 고통의 십자가만 바라보면 지기 힘들 수가 있지만 그 고통의 십자가 너머에 있는 영광을 바라모면 힘든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 말씀에 한번 주목했으면 합니다. 어쩌면 이 말씀이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코로나 팬데믹이 유행하는 시점에 우리가 꼭 명심하고 가슴에 필히 새겨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27절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행실대로 갚는다는 의미는 성경 곳곳에 나오지만 여기서 나오는 표현은 시편에 나오는 것을 차용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내용이 있습니다.

 

저도 오늘 알았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나오는 행실이 말씀의 의미가 천주교 4대 교리 중에도 나옵니다만 상선벌악과 같은 그런 의미로써의 의미보다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의 주석을 잠시 인용하겠습니다. 지금 예수님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에 따라 장차 종말에 재림하실 예수께서도 똑같은 모양으로 대하시겠다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이다. 이 주석의 내용이 어쩌면 오늘 제가 지금까지 서술한 글 내용의 가장 하이라이트가 되고 의미심장한 말이 됩니다. 제가 나름대로 한번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성모찬송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나중에 언젠가 이 세상에서 귀양살이의 삶을 다 마친 후에 예수님을 뵙게 될 때 우리의 행실 여부에 따라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때의 행실은 일반적인 의미의 행실을 상징할 수도 있겠지만 주석을 바탕으로 묵상을 해본다면 지금 예수님에 대해 가지는 행동과 마음에 따라 종말에 가서 그때 예수님께서도 그대로 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지금 이런 혼돈의 시기에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고 자신과 싸워야 될 것입니다. 이런 싸움에서 승리할 때 우리가 마지막 하느님의 심판대에서 얻게 될 영광은 참으로 벅찰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가상한 노력을 한다면 그 노력과 수고는 절대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미사 참례 자체만으로 믿음과 신앙을 측정하는 절대적인 지표는 아니겠지만 나중에 궁극에 가서는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이 믿음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하느님께서 저울로 판단하실 때 정상참작 사유는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수고와 노력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늘나라에서 열매를 맺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이면서 가장 중요한 게 하나 제 1독서에 나오는 말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일 제 1독서 예레미야서 209절에 나옵니다. 이 말씀을 끝으로 잠시 묵상을 하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을 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외부적인 환경의 요인으로 신앙에 무서운 도전이 엄습해오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어쩌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향한 특히 개신교 신자들에게 해당이 됩니다만 그렇다고 우리라고 해서 여기서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도 어느 시점에 자칫 방역과 정부 방침에 협조하지 않게 되어 지금처럼 개신교와 같은 상황이 일어난다면 세상 사람들의 비난의 화살이 천주교에게도 쏟아지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다른 변수와 맞물려서 악화일로로 번지게 된다면 각자의 신앙에도 위기로 작용될 수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위기에서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바로 오늘 이 말씀이 많은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바로 뼈 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입니다. 자신에게 신앙의 위기가 닥쳐와도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뼈 속에 새겨진 말씀이 있다면 이 말씀이 자신의 신앙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가 될 것이라고 하니 지금 이럴 때일수록 말씀을 좀 더 가까이 해서 말씀으로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마지막 하느님 대전에서 자신에게 다가올 영광을 생각한다면 이런 어려운 환경도 지혜롭게 잘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은혜로운 주일되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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