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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십자가와 혼의 자아(自我) (마태16,21-27)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20-08-30 조회수1,582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8월31일/주일복음말씀묵상/ † 십자가와 혼의 자아(自我) (마태16,21-27)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태16,21-22절은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원로(장로)들과 대제사장(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때로부터”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시인되어지고 교회가 계시된 이후를 가리킨다. 여기서 주님이 언급하신 죽음은 구속의 죽음이 아니라 핍박을 받으시고 배척당하시는 그러한 죽음을 가리킨다. 주님의 고통의 대부분은 구속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사람들에게 배척과 핍박을 받으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임을 밝히신 뒤에 자신이 당할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주님을 붙들고 그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만류한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능력과 영광을 지닌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곧 메시아가 오면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고 이스라엘은 속박에서 풀려나며 경제적으로 번영하게 되고 종교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맞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3절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방금 거듭난 생명을 얻었지만, 즉시 그는 올무에 걸려서 사탄에게 사용되었다. 메시아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이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승리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선언하기 일보 직전에서 패배자처럼 죽음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의 수난 예고는 상식적으로 반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인물이 다름 아닌 방금 전에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던 베드로였다.

여리고성의 승리 후에 즉시 아이 성의 참패가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한 후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려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의 생각을 사람의 일에 두는 자는 사탄에게 속한 자이다. 사탄은 사람과 매우 밀접하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24절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자신’은 표현상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 의미상으로는 자기, 자아, 옛 사람, 혼 생명(혹은 혼=생각+감정+의지), 겉 사람과 같은 뜻이며, 제자들이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유일한 조건이다. 곧 우리 자신의 생각을 거절하고 주님의 뜻을 만족케 하기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바로 범사에 자신의 의사를 따르지 않으며, 자신을 중심으로 삼지 않고, 자신을 한쪽으로 제쳐두고, 하느님의 뜻을 구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객관적 진리를 명확하게 믿는 것이다(로마6,6). 자신은 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끝내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것을 우리 생활에 적용하는 문제이다. 우리 자신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으로, 이제 오직 우리 영 안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뜻대로 일하신다는 의미이다. 자기 자신이 죽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면, 그분께서 표현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제 십자가를 지고”란 무슨 뜻인가? 이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 보다 더 깊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자신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만을 따르겠다는 믿음을 기초로, 하느님이 특별히 당신에게만 정하신 어떠한 일, 곧 역경과 고난의 환경까지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기꺼이 고난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종류의 십자가가 있다. 하나는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요한11,50-52)로 객관적인 것이요, 또 하나는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해서 하느님이 정하신 주관적인 고난의 십자가이다. 주님께서 각각의 믿는 이들에게 안배하신 십자가는 서로 다르다. 비록 그 길은 다르지만 동일한 십자가이다. 십자가란 우리 각자의 삶 중에서 고통 받게 되는 고난들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생각을 우리 자신의 일에 두기를 거절함으로써 고통을 견디는 것이다. 또한 주님을 따르는 것은 주님의 길을 취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우리 자신을 끝내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끝냄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자기 십자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께서 각자에게 다르게 정하신 환경, 곧 애매한 고난 받음, 억울한 고난, 선을 행하다가 얻는 고난, 심지어 본인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 가족의 아픔과 질환 등으로 인하여 자신의 죽음을 맛보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경은 “자기 십자가”가 아니다. 환경은 “십자가를 지는” 체험의 수련장이며 수단이며 조건이다. 사람은 고난과 역경의 환경 없이는 결단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다. 크기와 강도와 길이는 다르겠지만, 고난과 역경이 오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무너지고 부서지고 죽는다. 지독한 고난과 역경의 환경이 오면 우리는 죽음을 맛본다.

 

나의 절망, 그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나의 죽음을 맛볼 때, 바로 그때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는 때이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나는 이미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끝났다. 그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과 함께 유기적으로 연합된 후, 나 자신의 옛 사람을 십자가의 끝냄 안에 계속 둔 채 십자가 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우리가 십자가 위에 머물러 우리 옛 사람을 십자가의 종결 안에 계속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아야 한다. 루카복음 9장 23절은 자기 십자가를 지되 “날마다” 지속적으로 지라고 말한다.

 

“날마다” 하루에도 수없이 지속적으로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주님의 죽으심과 동일시하는 훈련과 체험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체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동일시하는 것, 곧 우리가 우리 영 안으로 돌이킴으로써 주님의 임재를 지속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목숨(그리스어 본문에서 목숨은 혼 생명으로 번역할 수 있고 혼 생명은 옛 사람과 같은 뜻이다)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라.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우리 옛 사람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꺼이 자기 십자가에서 죽겠다고 순종하는 우리에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당신의 옛 사람, 곧 겉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성령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흐르실 수가 없다. 당신의 자아를 십자가의 죽음에 두어야만 당신이 성령의 통로, 곧 하느님의 영이 생수처럼 당신을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흐를 수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만이 ‘영적인 사람’의 시작이며, 사역자의 자격을 부여 받을 수 있다. 신학교를 졸업했고, 교회를 오래 다녔으며, 교회직분상의 지위를 가졌다고 다 사역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만든 졸업장과 자격증의 교육제도란 허점투성이다. 사역자란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함으로써 성령의 통로가 된 사람들 가리킨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이란 바로 이것이다. 성령으로 인하지 않은 상당수의 무자격자들이 교회를 점령하여 사역자의 흉내를 내면서부터 교회는 필연적으로 인본주의에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하느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한 사람만을 가장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을 통하여만 성령이 흐르게 하심으로써, 이들을 통하여 교회를 건축하고 교회를 성장시키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죽음을 통과하여 이른 봄 추운 동토를 이겨내고 대지를 뚫고 생명의 가지를 대지 위로 뻗어 올리듯, 우리도 이 죽음의 체험을 통하여 생명의 부활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로마6,5). 그러므로 이제 자신(자아)을 언제나 십자가의 죽음 위에 둠으로써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통제하시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님께서 내 안에서 내 자신(자아)에 방해받지 않고 자유를 가지시도록 허락해야만 한다. 십자가의 죽음만이 열매를 맺기 위한 필수 조건일 뿐이다. 우리의 타고난 혼 생명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자아에 대하여 죽지 않는다면, 영적 생활에서 어떤 참된 진보도 이룩하지 못한다.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말씀은 영적 생명의 문제들을 다룬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부디 자신의 영적 체험을 이 말씀과 비교해 보시기를 바란다. 만일 우리가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한 체험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적 생활의 진보는 없다. 우리는 결코 자신의 생명, 곧 혼 생명을 영적 생명으로 취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34,8).”주님은 이성과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고난과 역경 중에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지식이 아니라 맛보아 알라는 것이다. 주님의 인격을 주관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세례이다. 우리는 성령세례를 사모해야만 한다.

 

주님이 이미 이루신 십자가의 효능과 신비를(곧 객관적 진리), 이제 하느님께서 마련해 두신 당신의 환경을 통하여 그것을 적용하여 주님의 십자가의 효능을 직접 체험적으로 알라는 것이다(주관적 체험).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당신의 몫에 알맞은 고난과 역경이라는 환경을 준비하신다.

 

주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당신의 지식과 총명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알맞은 고난과 역경의 환경을 안배하시고, 그 환경을 극복하는 죽음의 과정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 만남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에 연합되어 참여했음을 체험해야만 십자가의 효능과 신비를 깨달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혼 생명>

25절은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혼 생명)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혼 생명(자신=자아)을 죽음에 넘김으로써 그들의 혼 생명을 잃어버리도록 부르고 계신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웠기 때문에 주님에게 “주여, 당신을 불쌍히 여기소서.”(원문 참조)라고 책망하고 있다. 베드로는 사람의 뜻만을 생각했고, 자기의 선생의 육신에 십자가의 고통을 받는 것을 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뜻을 생각할 줄 몰랐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을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생각해야 함을 몰랐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아를 사랑하는 마음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베드로의 생각은 주님이 십자가에 올라가 죽으시면 당신 자신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므로 당신이 받게 될 고통을 생각지 않으십니까? 주여, 당신 자신을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뜻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를 불쌍히 여기라는 이러한 생각이 사탄으로부터 왔다고 대답하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내가 십자가에 가야 할 뿐만 아니라 나를 좇는 너희들도 내 제자가 되려면 필히 십자가에 올라가야 한다. 나의 길이 어떠하면 너희의 길도 그러하다.”라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만 하느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고 착각하지 말라. 나의 제자 된 너희들도 나와 함께 하느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내가 자신을 아끼지 않고 십자가의 위치에서도 아무 조건 없이 하느님의 뜻을 행한 것 같이, 너희도 너희의 혼 생명을 아끼지 말고 버림으로써 하느님이 너희에게 하라고 하시는 것을 행해야 한다.” 고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주님께 “어찌하여 당신은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했지만, 주님은 “너의 자아를 버려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에는 대가가 요구된다. 이러한 요구에 대하여 육체는 떨지 않을 수 없다. 혼 생명이 우리 속 깊은 데에서 다스릴 때는,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제 일로 삼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혼 생명은 하느님의 뜻에 순복하지 않고 자아의 뜻을 따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아를 부인하고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의 혼 생명을 잃어버리라고 부르실 때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게 된다. 혼 생명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 순종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의 좁은 길을 택하려고 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할 때마다, 혼 생명은 손상을 입게 된다.

 

오늘 본문의 문장을 주의해서 본다면, 이 혼 생명의 역사가 얼마나 악한가를 더욱 깨닫게 될 것이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한 때는 그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비밀을 이해한 직후로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친히 베드로에게 그들이 따르고 있던 비천한 예수가 바로 영생하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신 때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라고 물으실 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님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마태16,15-16). 그러나 베드로는 이러한 계시를 얻었지만 즉시 그는 혼 생명의 지배를 받아 자기 선생에게 그분 자신을 불쌍히 여기라고 권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영적인 계시와 놀라운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혼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보장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도리어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체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의 혼 생명은 아마 다른 사람보다 더욱 감추어져서 제거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혼 생명이 십자가의 처리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의 혼 생명은 시종 사람 속에 보존되어 있고 상실되지 않는다.

 

여기서 베드로의 혼 생명이 발동한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님을 위해서였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불쌍히 여기며 주님이 기쁘시기를 원했기 때문에 고난이 주님에게 임하지 않기를 원했다. 그의 마음가짐은 좋았고 동기도 훌륭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혼 생명에서 나온 인정이었다.

 

주님은 혼에서 비롯된 모든 고려와 생각을 거절하셨다. 혼 생명으로 주님을 사모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주 예수님 자신이 혼(자아)을 부인하고 하느님을 섬겼기 때문에, 그분은 사람들이 혼(자아)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주님은 자아가 없으신 분이시다. 자신과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버린 사람은 주님뿐이시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행하신 모든 것은 주님 스스로의 생각, 곧 자신의 뜻을 실행한 일은 전혀 없으시고, 오직 주님의 영 안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랐을 뿐이다. 그분만이 온전히 자신(자아)을 버리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일을 어떻게 했는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물으신다. 베드로는 주 예수님의 육신을 하느님의 뜻보다 더 사모했기 때문에 주 예수님께 자신을 돌아보라고 권유하였다. 실로 혼 생명은 독립적으로 행동하기를 좋아하고 자기 뜻대로 행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선행으로 하느님을 섬기려 하고 하느님의 뜻을 좇아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것은 바로 혼 생명을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가 바로 혼의 뜻이 파쇄될 때이다. 한번 혼의 뜻이 파쇄될 때가 바로 혼 생명이 실제적으로 십자가의 처리를 거칠 때이다. 여기서 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버리라고 하신 것은 그들의 혼 생명이다. 이는 베드로가 그의 혼을 좇아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베드로의 말을 사탄으로부터 나온 말로 여기신 데에서 우리는 사탄이 얼마나 사람의 혼 생명을 이용하는지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혼 생명을 죽음에 넘기지 않는 한, 사탄은 언제든지 일 할 도구를 얻게 된다. 이때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므로 이 말을 하였지만 그는 사탄에게 이용을 당했다.

 

베드로가 주님께 그분 자신을 불쌍히 여기라고 간구하였지만 이것은 사탄이 그에게 미혹한 것이다. 사탄도 사람으로 주님을 사랑하게 하고 기도하게 할 수 있다. 곧 사탄은 사람이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혼 생명을 사용하지 않고서 영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기도할까를 염려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혼 생명이 존재하는 한 사탄의 사업은 크게 번창하게 된다. 믿는 이들은 결코 그들이 지금 주님을 사랑하고 있고 하늘의 일을 앙망한다고 해서 영적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자신을 사랑하고, 고난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십자가를 보고 후퇴하는 마음은 일종의 혼 생명의 표현이다.

 

혼 생명의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것, 곧 자기 목숨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서 십자가가 놓일 때마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지 않으며, 하느님의 능력을 힘입어 사람을 위해 목숨을 잃으라고 우리를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이 십자가가 우리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이것이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느님에게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고 할 때, 하느님은 우리가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를 지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이 십자가는 우리의 것이요, 하느님이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질 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 안으로 들어와 우리로 하여금 우리 혼 생명을 잃게 하기 때문이다. 매번 십자가를 지는 것은 바로 혼 생명을 잃는 것이다.

 

<죄와 자아>

여기서 우리는 마땅히 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영 단번에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날마다”(루카9,23)라는 말이 “제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 앞에 추가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십자가는 계속적으로 끊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로마서 연구에서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방면은 필독서임), 죄에 대해 죽는 십자가는 이미 이루어진 사실로서 다만 시인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의 혼 생명을 잃는 것에 관한 십자가는 구원의 또 다른 방면이다. 이것은 완성된 일이 아니라 날마다 이루고 체험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혼을 영원히 잃지 않는다거나 점진적으로 잃어버린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십자가의 혼 생명에 관한 방면과 죄에 대한 방면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죄에 대해 죽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것이고, 그분이 죽으실 때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지만, 혼 생명을 잃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기로 작정함으로 그것을 상실되게 한다는 것이다.

 

혼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은 영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로마6,6)의 위치에 서 있기만 하면 즉시 구원받을 수 있고 더 이상 그 능력에 의해 억압을 당하거나 종노릇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한 순간에 뿌리 뽑는 온전한 승리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타고난 생명인 혼 생명을 잃는 것은 한 단계식 승리해 가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더 깊이 찌르면 찌를수록 십자가는 더욱 깊이 역사하고, 성령도 영의 생명을 더 자라게 하며, 주 예수님과 더욱 연합하게 한다. 특히 믿는 이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혼 생명은 부인할 수 없고, 오직 자기가 아는 자아 생명의 그 부분만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자기의 혼 생명의 모든 부분을 빛 비추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계시가 많으면 많을수록 십자가의 역사는 더욱 깊어진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는 “날마다”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자기 자신을 아는 길은 바로 십자가의 더 많은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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