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20년 9월 1일 화요일[(녹)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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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0-09-01 | 조회수1,439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0년 9월 1일 화요일 [(녹)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제1독서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1서 말씀입니다. 2,10ㄴ-16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아니고서야,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깨닫지 못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합니다.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판단할 수 있지만,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화답송 시편 145(144),8-9.10-11. 12-13ㄱㄴ.13ㄷㄹ-14(◎ 17ㄱ)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네.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네. 그 나라의 존귀한 영광, 사람들에게 알리나이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무궁한 나라, 당신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 미치나이다. ◎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네.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넘어지는 누구라도 주님은 붙드시고, 꺾인 이는 누구라도 일으켜 세우시네. ◎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네. 복음 환호송 루카 7,16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복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복음입니다. 4,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영성체송 시편 31(30),20 참조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다고 합니다. 더러운 영을 내쫓으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그분의 권위를 언급합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연거푸 두 번 나타나는 예수님의 권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알아보지만 예수님과는 거리를 두지요. ‘무슨 상관’이냐며 예수님을 멀리합니다. 더러운 영은 제 이익과 제 삶의 안위를 행여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더러운 영은 자신의 삶이 다른 이와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제 삶의 자리라고 우기는 것이 더러운 영입니다. 타인의 자리를 맴돌다 그것이 제 것인 양 여기며 기생하는 삶이 더러운 영의 삶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제대로 안다고 하여도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방해꾼일 뿐이며 낯설고 불편한, 그야말로 ‘타인’일 뿐입니다. 구별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아픈 이를 아픈 이로 보고, 슬픈 이를 슬픈 이로 보며 순수한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데 예수님의 권위가 있습니다. 제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여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에 질서와 고유성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기념하는 오늘,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움켜쥐기보다, 우리 각자의 눈에 틀어박힌 들보를 빼내고 제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 우리의 눈이 자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의 모습을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 할 것은 ‘예.’라고만 할 수 있는 순수함과 순박함이 예수님의 참된 권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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