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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01 조회수2,109 추천수14 반대(0)

산보 중에 강의를 듣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주원준 박사님의 길가메시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춘향전에 대해서 논문을 쓰려고 한다면 조선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 하듯이, 구약성서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려면 근동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근동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는 수메르,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이집트의 문화와 역사를 의미합니다. 길가메시는 기원전 2,700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니 신약성서의 세계보다는 2,7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성서의 무대가 되는 세상보다도 1,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자랑하는 일리아드나 오디세이의 세상보다도 2,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문자로 남겨진 작품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중국의 고전인 논어, 맹자, 장자, 노자의 세상보다도 2,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학자들의 땀과 노력으로 우리는 고대 언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름휴가에 시간이 있다면 4,000년 전의 세상으로 여행을 가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마 그 세상은 지금과는 다른 행성의 이야기 일수도 있습니다.

 

제게 인상적이었던 작품의 내용은 길가메시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죽음의 강을 건너는 장면입니다. 죽음의 강 건너에는 대홍수를 피해서 살아남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구약성서의 노아와 같은 사람입니다. 길가메시는 불로초를 얻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노인들에게 불로초를 나누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뱀이 불로초를 가져가버렸고 길가메시는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길가메시에서 영원한 생명이란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노인의 지혜와 경륜이 젊음을 만나는 것입니다. 불로초의 모습은 가시나무였다고 합니다. 이 가시나무는 모세가 하느님을 만났던 떨기나무가 되었고, 이 가시나무는 예수님께서 머리에 쓰렸던 가시관이 되었습니다. 깨달음과 진리는 가시에 찔리는 아픔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길가메시가 추구한 것도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고통을 받아들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수메르의 뒤를 이은 아카디아의 왕 중에는 사르곤왕이 있었습니다. 사르곤 왕은 당시에 많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왕이었기에 사르곤 왕의 탄생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르곤 왕의 어머니는 신전을 지키는 사제였습니다. 아이를 키울 수 없었던 어머니는 바구니에 아이를 넣어 유프라테스 강에 흘려보냈습니다. 강 위를 떠오는 바구니는 아카디아의 공주가 발견하였고, 아이는 왕궁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모세의 탄생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구약성서는 아르곤 왕의 탄생 이야기를 모세의 탄생 이야기에 수용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결과는 다릅니다. 사르곤 왕은 스스로 높은 자가 되었고, 정복하는 왕이 되었지만 모세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었고 하느님을 높였습니다. 모세는 정복하는 왕이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다른 문화의 이야기를 수용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을 탈신화화라고 말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볼트만은 신약성서의 언어를 현대의 언어로 탈신화화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자세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였고, 고린토의 신자들에게도 전하였습니다.

 

사제들은 무엇보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충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하라고 서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하라고 독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사제는 긍정적이면 좋겠습니다. 비가 온 뒤에 땅은 더 단단해 진다고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먹구름 뒤에 밝은 태양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긍정적인 자세는 감사할 줄 알게 되고,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았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든 것들이 잘 갖추어진 곳에서는 꽃을 피우는 마음으로 사목하면 좋겠습니다. 이제 막 시작된 곳에서는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사목하면 좋겠습니다.

둘째, 사제는 겸손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이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여러분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모르는 것은 배운다는 자세로 지내면 좋겠습니다. 아는 것은 나눈다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아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모든 위를 위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세포는 바로 그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영양분을 주위에 있는 세포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줄 때, 우리의 몸은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영양분을 나누어 주지 않고 자신만 소유하는 세포가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암세포라고 부릅니다. 자신이 커지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신도 죽고 건강했던 몸도 죽이는 것을 봅니다. 우리들 모두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이웃과 동화되는 것, 그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주어진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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